道란 ? / 지유스님
佛法은 自己의 모습을 말함이요. 佛敎는 自己의 모습을 보게하는 가르침이다.
왜 自己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
自己의 모습을 봄으로서 삶의 모든 問題의 根本이 解決되기 때문이다.
自己의 모습이란 곧 마음을 말한다. 마음은 어떤 것기에 마음을 봄으로서 문제가 해결되는가!
마음은 이 世上 모든 것의 根源이라서,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서 마음으로 돌아간다.
과거, 현재, 미래의 無限한 時間과 東西南北 上下의 無限한 空間과 有無, 長短, 大小, 彼此 등의
이 世上 모든 것들인 無限한 千差萬別의 차별상(差別相)과 희비고락(喜悲苦樂)등 無限한 感情의
일어남과 사라짐 즉, 느낌 감정, 생각 이미지 상상, 욕구 욕망 의지 의도 충동, 의식 마음의 生滅
등의 이 世上 모든 物理的 精神的인 現象들, 이 모든 것들이 한 마음(一心)속의 일어나고 사라짐
이니 마음은 物理的 精神的인 이 世上 모든 것, 存在, 現象을 超越한 이 世上 모든 것의 根源이다.
時間과 空間, 이 세상 모든 것을 超越한 존재,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즉, 日常生活에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觸感)을 느끼고, 좋고 것 나쁜 것을 分別하고 認識해서 알며, 온갖 生覺을 할 줄 아는 자(者),
다시 말해 모든 意識作用의 本體를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意識作用의 本體인 마음은 形體가 없고, 固定不變하는 實體의 物體가 아니기 때문에,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다. 모든 의식작용(意識作用)의 本體인 마음은 一切의 生覺이 끊어진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生覺으로도 결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양도 없고 生覺이 끊어진 마음 그곳에 靈知가
소소영영(昭昭靈靈:뚜렷)하니, 이 神靈스런 앎, 靈知가 時間과 空間 , 精神的 物理的인 現象의 世界,
이 세상 모든 것을 超越한 永遠히 있는 自己의 참된 모습(眞我)이다.
修道란? 마음(心)을 닦는다는 말이고, 마음(心)을 다른 말로 道, 禪, 法, 佛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닦으려면 우선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마음의 正體를 分明히 알아야만 할 것이다.
그릇을 닦는데 그릇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아무 돌멩이나 집어서 닦고 있으면 그릇을 닦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의 正體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그릇된 生覺으로 마음인
줄 알고 닦고 있으면 그것은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 알고자 하는 生覺 그 自體가 바로 마음(心)이다.
알고자 하는 生覺을 일으켰을 때, 그 生覺을 쫓아가면 끝이 없다. 마음을 알려고 하는 그 生覺을
아무리 애를 쓰고, 몸부림 치고, 生覺을 많이 해도 점점 더 어지러워지고, 괴롭고, 수고로울 뿐이다.
그러니 마음을 알려고 하는 生覺을 쫓지 말고 마음을 알려고 生覺하는 그 자체(自體)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廻光返照). 生覺하는 그 自體를 돌이켜 보면 곧 一切의 生覺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도무지 生覺을 찾을 수 없는 그 곳에 生覺 아닌 靈知가 소소영영(昭昭靈靈:뚜렷)하지 않은가 !
이 靈知, 모든 意識作用의 本體를 즉 마음(心)이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것이다.
生覺을 돌이켜서 生覺 아닌 靈知를 보니, 이 靈知는 이제 비로소 얻은 것이 아니고, 本來부터 이미
完全하게 있던 마음이다. 다만 마음속 生覺에 執着해 있었기 때문에, 生覺 아닌 마음, 靈知를 보지 못
했던 것 뿐이다. 마음속 生覺에 執着하고 있는 것을 幻想이라 말하겠다. 幻想이 장애물이 되어 生覺
아닌 마음, 靈知을 보지 못한 것이니, 마음속 幻想을 놓아 버리면 幻想 아닌 眞心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幻想은 生하였다가 滅하는 것이기에 虛妄한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이지만,
眞心, 靈知, 모든 意識作用의 本體는 生하였다가 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永遠不滅하며 眞實한 것
이다. 이 眞心, 靈知, 모든 意識作用의 본바탕이 바로 참된 自己 모습(眞我) , 佛(부처)라고도 한다.
마음속에 執着하고 있던 幻想을 놓아버리고 眞心, 眞我, 靈知, 모든 意識作用의 本體, 부처를 보니,眞心,
한마음(一心)은 한 번도 생겨난 적도, 죽은 적도 없다. 생겨났다는 말, 죽었다는 말은 단지 眞心속에
생겨났다는 生覺이 일어나고(生) 죽었다는 生覺이 멸(滅)한 것일 뿐이다. 生覺은 千萬번 일어나고 滅
하더라도, 眞心, 靈知는 生覺이 일어남에 따라서 함께 생겨나거나 滅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眞心, 靈知
는 단지 生과 滅, 生과 死라는 生覺, 幻想, 幻影과는 전혀 關係가 없는 永遠不滅의 存在인 것이다.
生覺을 돌이켜서 生覺 아닌 眞心을 보면 이 마음에는 一切의 妄想 煩惱 幻想 妄念이라는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眞心은 一切의 相 즉, 生覺, 妄想, 煩惱, 幻想, 妄念, 槪念, 觀念이라는 이 世上을 分別하
는 意識, 分別心 즉, 나라는 것이 있다고 錯覺하는 自我意識이 끊어졌으니 空寂이요, 그 空寂속에 싱그
러운 생생한 靈知가 있으니 眞心을 眞空妙有또는 空寂靈知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空寂靈知, 마음 즉,
眞心은 극히 고요하고도 神靈스럽다. 어지럽고 산란스럽지 않아 空寂이라 하고, 感覺 知覺할 수가
없는 木石과 다르기에 靈知라 한 것이다.
공적(空寂)하고 영지(靈知)한 마음(眞心)속에 한 生覺이 일어나 그 生覺을 쫓아서 집착(執着)하기
때문에, 원래의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마음 즉, 眞心을 보지 못해 잊어버리고, 生覺은 다음 生覺으로
계속 쫓고 물리고, 꼬리에 꼬리를 이어서 많아지니 眞心인 空寂靈知는 이런 煩惱 妄想 幻想 妄念 生覺
들 때문에 점점 산란해지고 어지러워지고, 어지러운 生覺들이 眞心을 가리니 眞心은 점점 더 어두워진
것이다.
眞心이 어지러우니 不安하고, 어두우니 어리석은 것이다. 그 不安하고 어리석은 마음에서 벗어나겠
다고 이 生覺, 저 生覺으로 발버둥친 것(取捨分別 /思量分別)이 더욱 더 眞心을 어지럽게 했으니, 점
점 더 어두워져 공적영지(空寂靈知) 즉, 眞心이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變한 것이다.
혼침과 산란해진 眞心 속에 짓고 있는 生覺 妄想 煩惱들이 生과 死의 原因과 結果로 되풀이되어
過去, 現在, 未來라는 (時間이 되고, 自他의 差別 分別로 東西南北 上下의 空間이 되어 無限한
시간과 공간 속에 限없는 生과 死라는 生覺, 妄想, 幻想, 幻影이 윤회(輪廻)를 하게 된 것이다.
人間의 意識이 限없이 生과 死라는 幻想, 生覺, 妄想, 幻影 속에서 輪廻하고 있는 동안에, 그 과정
에는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도 있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福이라 하여 기쁘고 즐거워하며,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재화(災禍)라 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하기도 하며, 喜悲苦樂 憂悲苦惱등 모든
感情과 길흉화복(吉凶禍福) 등의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좋고 나쁜 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
가 하면, 이미 지나간 過去에 자기가 지은 行爲 卽, 生覺, 말, 行動인 三業이 原因이 되어 現在의 자기
에게 結果로 나타난 것이며, 또 現在의 자기가 짓고 있는 身 口 意 三業의 行爲가 또 原因이 되어 未來
의 자기에게 結果로 나타나는 것으로, 모든 결과는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거나 다른 곳에서 온 것
이 아니다. 이를 일러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한다.
밭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듯이 자기(自己)가 지은 三業의 結果를 자기(自己)가
받는 것이니, 아무리 좋지 않은 나쁜 환경(環境)을 만났다 할지라도 자기 以外에 아무도 怨望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 해서도 안될 것이다.
지금의 자기(自己)는 過去에 자기가 지은 三業의 結果物인 同時에 未來의 原因이 되는 것이니, 바로
지금 여기가 가장 소중한 때와 場所인 것이다. 아무리 나쁜 환경(環境)이라 할지라도 지금 여기에서
노력하여 善한 업을 짓는 일에 힘쓴다면 未來의 善한 果報, 結果은 약속된 것이며, 또 아무리 最善의
環境이 과거에 지은 業인 善因에 依해 받았다 할지라도 그 結果도 有限한 것이라서 因緣이 다하면
없어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生覺하면 無常하고 虛無한 것이다. 나쁜 業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이렇게 觀察해 본다면 最善의 環境을 惠澤받았다고 기뻐 들뜰 일도 없고, 最惡의 상황의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해서 슬퍼하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얻고 잃는 것은 宇宙法界의 因緣에 맡기고,
마음이 동요(動搖)함이 없으면 그 不動心이 바로 道 , 眞心, 空寂靈知에 合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生覺에 執着하여 그 生覺을 쫓고, 쫓아다니는 生覺이 生과 死가 있다는 幻想,
幻影, 虛像이 되어 三業으로 짓는 行爲에 따라서 善果도 惡果도 받고 三業으로 짓는 行爲가 原因과
結果로 계속 되풀이되다 보니, 限이 없는 生과 死라는 단지 虛妄한 生覺 幻想 妄想의 바다에서 輪廻
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하게 된 것이다.
生과 死라는 虛妄한 妄想 幻想 生覺의 바다, 즉 分別하는 마음, 의식의 바다에서 輪廻를 하다 보니
단지 虛妄한 幻想 妄想 生覺일 뿐인 分別心, 自我意識이 일으키는 좋고 나쁜 것의 虛妄함과 生과
死의 無常한 實相을 느끼고 알게 되어서 生과 死라는 虛妄하고 헛된 幻想 妄想 生覺 즉, 이 世上을
分離 分別하는 意識, 分別하는 마음, 自我意識이 없는 永遠不滅의 存在를 구해 보겠다고 갖은 애를
쓰고, 몸부림쳐 보나, 헛수고만 할 뿐, 生과 死라는 헛되고 虛妄한 幻想 妄想 生覺 즉, 이 世上을 나
누고 分別하는 自我意識, 分別心에서 벗어나는 데는 아무런 效果도 없다. 生과 死라는 虛妄하고 헛된
分別心, 自我意識일 뿐인 幻想 妄想 生覺의 輪廻, 固定觀念에서 벗어나려고 限없이 努力하고 애를 썼
는데도 왜 아무런 效果도 없이 그런가 ?
그 理由는 무엇이 生과 死이며, 生과 死의 原因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석가모니도 이
生死問題 때문에 出家하여, 生死의 굴레 卽 生과 死가 實際로 있다고 여기는 幻想, 妄想, 生覺의 輪廻
를 脫出하려고 四防으로 解決 方法을 찾으러 다니다가, 그것이 헛된 짓이며 生과 死의 原因이 마음에
있는 것임을 알고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生과 死라는 幻想, 妄想, 生覺의 輪廻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함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生覺 生覺 속에서 生覺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生覺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텅~빈 바탕 지금 여기, 根源, 根本, 本質, 본래마음(眞心)을 본
것을 뜻한다. 生覺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시시각각으로 變하고 있으나, 生覺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根源, 根本, 本質, 眞心은 단 한번도 생겨난 적도
(生/起), 사라진 적도(死/滅), 變해서 달라진 적도 없다
그렇다면 生과 死의 정체란 무엇인가 ? 그것은 眞心,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空寂靈知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虛妄하고 헛된 妄想, 幻想, 生覺이라는 에너지 波動일 뿐이다.
생겨난 줄로 錯覺하고, 죽은 줄로 錯覺하고, 온 줄로 錯覺하고, 간 줄로 錯覺하고 있는 生覺, 妄想,
幻想이 生과 死의 正體인 것이다.
生覺은 眞心,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根源, 根本, 本質, 空寂靈知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幻想. 妄想, 생각일 뿐이니 生과 死, 가고 옴(去와 來)라는 生覺 妄想도 고정불변하는
實體가 없는 꿈, 허깨비, 幻想,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이다.
마음 하나에 생각 하나에 迷惑해서 끊임없이 妄想 煩惱를 일으키는 사람을 衆生이라 이름하고,
마음 하나를 깨달아 끝이 없는 妙한 作用(妙用)을 일으키는 사람을 일컬어 諸佛이라 이름한다.
즉, 생각에 迷惑하면 번뇌 망상이 되고, 생각을 깨달으면 묘용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 의식 생각에
미혹하면 생사윤회(生死輪廻)요, 생각 마음 의식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 解脫이라고 한다.
마음에 迷惑했다는 말은 마음속이 생각(相)에 가려서 생각 아닌 眞心을 보지 못함을 말하고,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마음속에 생각을 지워버려서 생각 아닌 眞心을 봄을 말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마음을 보지 못한 原因은 마음을 생각(相)이 가려서이니, 그 마음을 가린
생각만 치워버리면 바로 생각 아닌 眞心이 환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생각 아닌 眞心에 능히 感覺할
줄 아는 靈知가 뚜렷하다. 이 靈知가 不生不滅의 眞正한 自己(眞我/참나)요, 생사(生死)와 상관없는
永遠不滅하는 安息處이다. 간절하게 念願하고 있던 永遠不滅한 마음이 本來부터 이미 完全하게
사람마다 다 갖추어져 있고, 내지 미물곤충(微物昆蟲)에 이르기까지 온 宇宙森羅萬象萬物에 다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衆生은 眞心을 妄想 執着이란 구름이 가려서, 이 좋은 보물를 보지 못하고 生死가 實際로
있다는 幻想, 妄想, 生覺의 輪廻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허망하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쌍히 여긴 석가모니佛이 衆生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生覺의 구름을 덜어 주기 위해
方便의 法을 說하여, 누구나 本來부터 이미 完全하게 갖추어져 있는 眞心에 돌아가게 한 것, 즉
本來成佛임을 깨우치게 일깨워 준 것이 衆生濟度이다. 衆生濟度를 한다고 해서 석가모니부처님이
衆生을 濟度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석가모니부처님이 衆生을 濟度한다고 한다면, 過去에 限量없는 부처님이 있었다는데
왜 그 당시에 중생을 제도(濟度)하지 않았는가 ?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속의 智慧를 열어 生覺에 迷惑함을 打破하여, 自己 스스로
自己를 제도(濟度)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病) 잘 아는 醫士와 같아서 病이 낫도록 患者에게
藥을 주었는데도 환자 자신이 약을 안 먹고 병을 낫지 못하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본來 이미 完全하게 갖추어져 있는 本心, 本性, 眞心, 부처, 佛性, 진리, 깨달음,
空寂靈知는 순수하고 깨끗하여 아무런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는 천진불(天眞佛)이다. 이 本心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思量하고 分別하는 마음 의식 생각으로는 미칠 수 없는 자리다. 이런 자리를
말로서 알려 하고 思量分別하는 生覺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마치 텅~빈 둥근 구멍에 네모진 기둥
을 맞추려는 것과 같아서 맞지 않는다. 텅~빈 둥근 구멍에는 둥근 기둥이라야 맞는 것이다.
일체 사량(思量 :生覺)이 끊어진 비사량처(非思量處:생각 끊어진 곳) 즉, 本心, 眞心 자리를 思量分別
을 가지고 들어가려 하니 無理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모든 生覺을 놓아야 비로소 非思量處:생각이
끊어진 곳)에 契合될 것이다.비사량(非思量)이라 말하니 아무 生覺도 일으킬 수 없는 木石같이 생각해
멍하게 있어서도 안된다. 思量處가 바로 非思量處로 뚜렷한 靈知인 것이다.
眞心, 이 마음은 思量分別心이 아니기에 空寂이라 하고 木石과 다르기에 靈知라 한다.
깨달은 사람은 마음속 妄想 分別 幻想 妄念을 쉬었기에 마음이 고요(空寂)한 同時에 靈知가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 공적(空寂)과 영지(靈知)가 원만(圓滿)하다. 그러나 생각에 迷惑한 사람은
마음을 가리고 있는 망상분별(妄想分別)을 쉬지 못했기에 마음이 어지럽고(散亂) 同時에 혼매(昏昧)
하여,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으로 空寂과 靈知가 둘 다 결(缺)한 것이다.
空寂과 靈知라 하지만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본래 自體가 空寂하면서 靈知하다는
뜻이다. 寂寂하면서 惺惺하고 惺惺하면서 寂寂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本心과 항상 함께하고 眞心을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 生活에서 단 한 瞬間도 空氣를 여의고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이나, 너무 흔하고, 너무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空氣의 存在를 잘 모르고 있듯이,
本心도 어느 장소(一切處)나, 어느 시간 (一切時)에도, 또 망상분별(妄想分別)로 작용(作用)을 했든,
아니했든 우리 生活에서 일분, 일초도 여읜 일 없이 恒常) 같이 하고 있기 때문에 이 本心을 認識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 理由는 우리의 마음속에 生覺이 분주하여 그 생각을 쫓고, 쫓기느라고 恒常 같이 하고 있는 本心을
미처 살펴보지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러니 本心을 보려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어지러운 生覺부터
쉬어야 한다.
어떤 물건을 觀察할 때 만일 마음속이 生覺으로 複雜하거나 들떠 있으면 細密히 관찰되지 않는다.
세밀히 관찰된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고, 조용한 것이다. 또 시계의
일초, 일초, 초(秒)를 새기는 초침 소리가 낮이나 밤이나 소리의 크기가 같지만, 낮에는 잘 안 들리고,
밤에는 잘 들리는 것은 낮에는 環境소음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는 것이고, 밤에는 낮보다도 환경소음
이 적고 조용하기 때문에 잘 들리는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시계 소리에는 차이(差異)가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生覺을 쉬면 본심(本心)을 본다고 했는데, 生覺을 쉰다는 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執着과 生覺을 내려놓는다는 말이다.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 그것이 마음속을 가로막아
마음이 막힌 것이니, 마음을 가로막았던 생각을 놓으면 마음을 가리고 있던 것이 없어지니 眞心은
저절로 환하게 드러나게 되는 수밖에 없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렇게 되면 마음속에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무 탈 없는 가슴속에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고
일부러 스스로 답답해하고 不安해 하는 것과 같다. 不安의 原因이 돌멩이 때문이니 돌멩이만
치워버리면 원래 탈 없던 가슴이라, 답답하고 불안한 것은 저절로 없어지고 만다. 마음속에 執着
하고 있던 生覺을 놓은 자리에 환하게 드러난 本心은 모든 妄念 妄想 幻想 生覺이 사라졌기 때문에
지극히 고요(空寂)하고 지극히 신령(靈知)하다.
그렇다면 공적영지(空寂靈知)한 本心, 眞心은 妄想 妄念 幻想 生覺이 없을 때만 있고, 妄念 妄想 幻想
生覺이 남아있을 때는 없는 건가 하면 그렇지 않다. 진심, 본심, 공적영지한 자리, 바로 눈앞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는 妄想 妄念 幻想 生覺이야 있든, 없든, 아무 關係없이 조금도 變함이 없고 永遠
하고 不滅하지만 다만 妄念이 있을 땐, 妄念에 가려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 뿐이다. 虛空에 떠 있는 太陽
이 구름이 가리든, 가리지 않든, 變함 없이 빛을 비추고 있지만 구름이 가리면 볼 수 없고, 검은 병(甁)
속에 있는 등(燈)불도 불빛에는 변함이 없으나 검은 병 속에 갇혀 있으면 불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妄念, 妄想, 幻想, 生覺, 煩惱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자세히 觀察해 보면 實際하는 實體가 아니다.
그것이 實際처럼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은 단지 錯覺 때문이다. 錯覺은 觀察력이 不足함에서 온
것이다. 물에 비친 달 그림자가 실제 있는 실물은 아닌데, 만일 實物로 본다면 錯覺이요,
잘 살펴보지 못한 데서 錯覺했다고 하겠다.
妄念도 마찬가지다. 모양도 없는 마음속에 망념의 그림자(影像)이 비치고 있는 것일 뿐이니,
이 망념의 정체(正體)를 포착하려고 가만히 망념 속을 들여다 보면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곳 텅~빈 바탕 目前,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山이 있으면
山인 줄 알고, 물이 있으면 물인 줄 아는 靈知가 뚜렷하지 않는가! 이 靈知가 바로 眞正한 自己,
眞我, 眞心, 本心, 佛性이다.
이 本心은 空寂하여 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고, 靈知하여 혼매(昏昧)하지 않다. 本心은 一切,
모든 生覺의 根源이요, 一切 善惡 萬法을 갖추고 있고, 生과 死라는 分別心, 分別意識, 自我意識인
虛妄하고 헛된 幻想, 妄想, 虛像, 妄念, 生覺의 始發點인 同時에 終着點이다.(行行本處 至至發處)
여기 붉은 사과가 있다고 하자, 이 사과를 보는데 눈에 눈병이 없고, 그 밖에 障碍物이 없는限,
萬 사람이 보면 萬 사람에게 똑같이 붉은 사과일 것이다.또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男女老少,귀천(貴賤)의 차별(差別)이 없다.
붉은 사과를 붉다 하고, 해가 뜨면 밝고, 해가 지면 어둡다는 데는 만인(萬人)이 아무런 差異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當然한 事實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이상(異常)하다고 하겠다.
너무나 當然한 事實을 사실대로 보는 것이 本心이다. 당연한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데는 어떤 특별한
재주나 기교(技巧)가 必要치 않다. 재주나 기교를 부리게 되면 도리어 事實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事實을 사실대로 보는 本心은 순수무구(純粹無垢)하여一切 티라곤 찾아 볼 수가 없다. 거짓이 없고,
꾸밈이 없고, 천진(天眞) 그대로 본래의 모습이다. 그런 자리에 무슨 계교사량(計較思量)이 붙어있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本心을 가리고 있는 생각(思量分別心)을 놓아 버리면, 本心은 보기 싫어도 보여지는 것이다
이 本心은 끝없는 過去와 끝없는 未來에 걸쳐 無限한 時空間 속에서 단 한번도 生겨난 적도 滅한 적도
없는永遠하고 不滅하는 存在요, 과거, 현재, 미래의 時間과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上下)의 空間과
그 속의 모든 生滅은 한 마음, 본심, 진심,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사라
지는 꿈, 허깨비, 신기루, 幻想, 물거품, 그림자인 것이다.
本心엔 生死니, 煩惱妄想이니 하는 二分法的인 이름, 槪念, 觀念, 分別心, 自我意識이 붙어 있을 수가
없으나, 생각 마음에 미혹하고 산란하여 空寂靈知가 온전치 못하면 불안 걱정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空寂과 靈知 어느 쪽 하나가 부족하면 온전하다 할 수 없다. 空寂靈知의 本心은 靈知이면서 그대로
空寂이요, 空寂이면서 그대로 靈知이니, 空寂과 靈知는 둘이 아니다. 공적과 영지를 둘로 보는 것은
영지가 되면 산란하여 공적이 缺여하고, 공적이 되면 昏沈하여 영지가 缺하여 온전하다 할 수 없다.
수레의 두 바퀴중 하나가 빠진 것 같아서 똑바로 나가지 못한다. 空寂과 靈知가 하나라야 참된 영지
요, 참된 공적이라 하겠다. 참된 靈知는 知識이나 分別意識이 아니니 공적이요, 참된 空寂은 무기혼침
(無記昏沈)이 아니니 영지인 것이다.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 아닌 공적과 영지가 원만(圓滿)한 마음이라야 心中의 혼침과 산란을 녹이고,
두 바퀴를 제대로 갖춘 수레와 같아서 똑바로 前進하여 不生不滅의 涅槃의 언덕에 到達할 것이다.
日常生活의 動과 靜에 있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하는 것은 뜻에 맡기고, 공적과 영지를 온전히
하면서 혼침과 산란을 녹여 가는 것이 수도(修道)일 것이다. 初心者는 마음이 산란(散亂)하기 쉬우니,
動과 靜을 잘 조절해야 한다. 一向)에 動해도 안되고, 一向)에 靜해도 안될 것이다. 修道)가 熟練되고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면 一切에 無碍가 될 것이다. 虛空을 나는 새가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날더라도 허공에 마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 !
- 지은이 知有스님, 발행처 원효암선원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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