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금 여기 바로 눈앞의 행복을 찾아내자

장백산-1 2015. 12. 17. 00:51

지금 여기 바로 눈앞의 행복을 찾아내자


유당 | 2015.12.16.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v0h/5760

 

지금 여기 바로 눈앞의 행복을 찾아내자


늙음, 병, 죽음, 이별, 좌절, 실패 등의 고통에 대해 상담을 많이 하다 보니, 독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태어남, 성장, 건강, 발전, 만남, 승리, 성공 등의 기쁨을 느끼면 안 되는 것인가요?
스님은 왜 어둡고 무거운 虛無를 주로 강조하나요?"  내가 인도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지금 여기 바로 눈앞에 있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허무만 부각되었다면 내 본의와 달리 진의가 잘못 전달된 것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는 즉각 답이 나오지 않지만,  "어떻게 살려고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살려고 하지요"라는 답이 바로 나온다. 건강, 돈, 명예, 지위, 권력 등을 얻으려고 하는 것도

잘 살기 위한 것이고, 마음을 잘 닦아서 깨달음이나 해탈 열반에 이르려고 하는 것도 잘 살기

위한 것이다.

 

'잘 산다'는 말이 막연하다면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는

불교 표현을 써도 좋다. 짧게 끝나버리는 世間의 즐거움을 가짜라고 하고, 영원히 누릴 수 있는

出世間의 즐거움을 진짜라고 區分하는 것과 관계없이, 우리는 어찌 되었든 즐겁게 살려고 한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화엄경』에 나오는 말씀 중에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規定하는 대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마음은 유능한 화가와 같아서 이 세상 모든 것을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마음, 부처, 중생 이 세가지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가르침을 연결 지어서 보자.

 

나 중생과 내 마음과 부처가 어떤 差別도 없다면
"지금 여기서 내 衆生心으로 幸福의 그림을 그려내서 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즐거움이나

행복을 멀리 마음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생심으로 내 주변의 모든 事物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해 내라는 것이다.

 

의상대사는 『화엄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분이다. 그는 '법성게'에서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 즉,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
"한 순간이 바로 무량겁이다"(一念卽是無量劫)이라고 한다.

이 두 구절은 『화엄경』에서 말하는 마음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지어낸다(一切唯心造)라는 말과,
마음, 부처, 중생이 차별이 없는 하나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니,
행복과 즐거움을 마음 밖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바로 내 곁에 있는 사소한 것들에서 또한
내 마음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발견하라는 뜻이다.

 

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 티끌이 바로 우주의 見本이다.
한 티끌도 우주를 대신하는 견본이라면 이 세상 어느 것도 우주의 견본 아닌 것이 없다.
一切時 一切處에서 행복과 즐거움을 발견하고 음미하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곳 어느 때나 행복하고 즐겁지 않은 적이 한 순간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행복을 찾는데 큰 장애가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變하는 形相과 마음이다.
꽃이 피기까지는 오래 걸리는 듯 하지만 일단 피고난 꽃은 오래지 않아 시들어 버린다.
사랑이 맺어지기까지는 그 사랑이 꿈처럼 아름답고 꿀처럼 달콤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시들해진다. 사랑과 친절은 끊임없이 쏟고 베풀어야 한다. 100번 잘해 주다가도 한 번
소홀히 하면 토라질 수가 있다.

 

世上은 變하기 마련이고 人間도 변덕스런 마음을 지닌 동물이다. 아무리 우리가 주변에서 행복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어도, 世上이 계속 變化하는 변덕을 부린다면, 世上을 아름답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흔들림이 없이 變하지 않는 즐거움을 찾으려면 피고 시들고 태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世上의 理致, 自然의 理致, 諸行無常을 있는 그대로 觀察해서 터득해야 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어느 때 나와 경쟁하는 처지가 될 때도,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이 배신했을 때도,
그러한 狀況은 特別한 것이 아니라 아주 自然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世上 모든 것이

無常하고 흔들린다는 事實을 體得해야만 世上의 어떤 급작스러운 變化를 보고도 기죽지 않을 수가

있고 마음이 中心을 잡을 수가 있다. 끊임없이 變化하고 흘러가는 虛妄한 世上과 마음에 대한 免役

力을 기르기 위해서 삶의 어두운 면을 피하지 말고 똑바로 보고 수용해야 한다.

 

절집에 있으면 거의 자살 직전에 이른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들이 無常한 世上을 새롭게
되씹고 절감하게 되면, 오히려 無常하고 虛妄한 世上을 아주 當然하게 받아들인다. 주변의 變化에
失望할 필요도 없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마음이 점점 단련되어서 강해진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 중에 자살하는 이는 거의 없다.
3일 후에 죽을 사람과 30년 후에 죽을 사람 옆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치자.
누가 더 깊고 진하게 꽃을 감상할까?  참! 질문이 잘못되었다.
無常과 無我를 투철하게 體得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이를 비교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