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지기 (km637) 05.09.30 08:09 출처 인연사랑 | 글쓴이 인연사랑재인 (jaein0615)
내가 부처가 된 때는? /성철스님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내온 수많은 세월은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지겁이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 億載阿僧祗
자아득불래 소경제겁수 무량백천만 억재아승지
이 구절은 法華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法華經의 核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成佛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 말은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석가모니께서 印度에 出現해서 成佛하여 열반하신지 지금부터 2천 5백여 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석가세존 말씀이 自己가 成佛한 지가 무량백천만억 아승지 以前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왜 숫자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 成佛했다 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事實은 석가모니부처님이 2천 5백년 前에 이 世上에 出現하여 成佛하신 것은 方便이고 實際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以前에 이미 本來 벌써 完全한 부처(佛)이신 겁니다. 이 事實을 分明하게
똑바로 알아야만 佛敎, 卽 부처(佛)의 가르침에 대한 기본자세, 근본자세를 확립할 수 있는 겁니다.
佛子들에게 佛敎의 目的이 무엇이냐 물으면 보통 으례 '成佛이다', 卽 부처(佛)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례껏 그렇게 말하지만 實際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實際의 內容은 衆生이 본래부처(本來是佛)
입니다. 깨쳤다 또는 깨달았다는 말은 衆生이 本來부처(本來是佛)임을 깨쳤다는 말일 뿐, 어리석은
衆生이 깨달아 變化해서 부처(佛)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前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만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本來로
成佛 즉, 佛(부처)였더라 즉, 본래부터 부처(佛)이더라는 事實입니다.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본래부터 부처였었는데 다시 무슨 成佛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衆生을 제도하기 위한 方便으로 하는 말일 뿐인 겁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道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부처의 본래모습,
부처의 진실한 모습, 本來是佛의 實相을 올바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事實은 석가모니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一切 衆生, 一切 生命, 심지어는 잡동사니 돌과 바위,
有情, 無情 , 有像 無像을 포함한 宇宙 全切가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다 成佛 즉, 부처
(佛)였다는 소식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世界를 '娑婆世界(사바세계)'라 말합니다. 宇宙萬物이 本來是佛인 事實을 모를 때는
이 세상이 사바세계지만, 宇宙萬物이 本來是佛인 事實을 올바로 알고 이 세계를 보면 이곳 사바세계
는 사바세계가 아니고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지금 여기 있는 세계가 그대로 極樂世界입니다.
그래서 佛敎의 目標는 衆生이 變하여 부처(佛)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本來是佛, 본래 부처임을
똑바로 깨쳐서 各者가 본래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成佛이라는 本來是佛이라는 事實을 똑바로
깨우쳐서 아는 것입니다. 同時에 온 十方法界, 온 宇宙가 불국정토(佛國淨土)라는 이 事實을 올바로
분명하게 깨치는 것이 佛敎의 궁극의 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救援'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天堂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부터 부처(本來是佛)임을 確實하
게 깨치고, 온 十方法界가 本來 佛國土, 본래 淨土인 事實을 깨달으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 사실, 본래 부처라는 사실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獨特한 立場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도 이렇게 宇宙萬物이 本來是佛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즉 부처란 표현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뜻하는 말입니다.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成佛해 있었다고 하는 말은 本來부터 이 世上 모든 存在가 佛生不滅 즉, 부처(佛) 아닌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動物, 植物, 鑛物, 심지어 땅, 바다 저 虛空까지도 不生不滅 즉, 佛(부처)아닌
것이 없는 말입니다. 또한 모든 곳(一切處), 十方法界 우주 全切, 一切時가 모두 다 佛生不滅 즉,
부처(佛)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淨土이며 佛國土인 것입니다. 즉, 이 세상 모든 존재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햇빛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光明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볼 때는 宇宙法界 全切가 光明인 同時
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부처 아닌 존재 없고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本來是佛임과 지금 여기가 佛國淨土임을 몰라서 아직 그 진실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지금 여기가 사바세계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本來是佛임과 지금 여기가 佛國淨土
임을 보지 못하는 根本的인 病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全切가 다 光明뿐이고, 눈을 감고 보면 全體가 다 暗黑뿐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宇宙萬物을 볼 때는 全切가 다 부처(佛)이고, 우주전체가 다 佛國土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세상을
보면 우주만물 전체가 다 衆生일 뿐이고 우주전체가 다 사바세계 地獄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
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감고 캄캄한 暗黑世上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밝은 光明世上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불국토)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一切 問題가 다 解決
됩니다.
감도 옴도 없습니다.(不去不來),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말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내가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成佛했더라 本來 부처였더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열반을 나타내지만
실제는 내가 죽지 않고 항상 여기서 법을 설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盤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위도중생고 방편현열반 이실불멸도 상주차설법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부처였을 뿐만 아니라 미래겁이 다하도록 절대로 滅하지 않고 지금 여기 계시면서 항상 법
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석가모니부처님이 태어났던 印度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韓國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佛) 나타나 계시는 곳은 全部 지금 여기입니다. 부처
는 千百億 化身을 나타내어 시방법계에 안나타나는 곳이 없으니까 시방법계가 다 지금 여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常住不滅이라 했습니다. 항상 지금 여기에 法身佛, 報身佛, 化身佛 三身佛이 一佛로
머물러 있으면서 절대로 滅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과거에도 常住不滅, 미래에도 常住不滅, 현재에도 常住不滅 이렇게 되면 一切 萬法이 不生不滅
그대로 입니다.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화장찰해(華
藏刹海), 無盡法界, 극락정토 등 뭐라고 이름지어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털어서 三身一佛은 恒常 지금 여기 계시면서 설법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常住不滅은 석가모니 個人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宇宙森羅萬象萬物 一切가 全部 다 과거 현재 미래 할 것 없이 恒常 無盡法門을 說하고 있으며
무량불사(無量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處處法堂 事事佛供입니다. 심지어는 저 山꼭대
기에 있는 바위도 法堂 안에 계시는 佛像보다 몇 백배 이상 가는 설법을 항상 하고 있는 겁니다.
바위가 說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實際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저기 山위에 있는 바위가 恒常 無盡說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불교에서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즉, 生物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설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설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恒常 설법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形相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虛空까지도 恒常 說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온 시방세계, 우주법계에 설법 안 하는 존재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한 眞實을 分明하게 알아야만 佛敎를 올바로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제도하고 누구를 구원한다고 하는 말은 모두 부질없는 헛된 말이고 虛妄한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根本要)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본래부터 성불한 면목(本來是佛),
본지풍광(本地風光), 본래부터 전체가 불국토라는 것, 이 事實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알아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生覺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法이야. 우리 모두가 佛國土에 살고, 우리 全切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 이렇게도 혹자는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根本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토(佛土)이고, 본래 해가 떠서 온
天地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을 光明을 볼 수 없습니다. 自己가 本來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비유하자면 깨끗한 거울에 먼지가 꽉 쌓여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맑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울에 먼지가 많이 쌓여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한다는
事實,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본래 부처다, 내가 본래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눈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장님를 못면합니다.
永遠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自信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自信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光明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光明 속에 산다는
事實, 광명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완전한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없고
불국토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본래 부처라는 것, 본래 불국토에 산다는 그런 사실에 대한 自信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은 눈을 뜨지 못하여 光明을 보지 못하고, 光明을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光明, 즉 부처를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전후좌우에 황금이 꽉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哲學的으로
말하면, '現實 이대로가 있는 그대로 絶對다'라는 말입니다. 즉, 現實 이대로가 있는 그대로 不生
不滅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現實 이대로가 絶對이고 現實 이대로가 不生不滅
인데 이 不生不滅의 原理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科學이 發達함에 따라 原子物理學에서도 自然界는 不生不滅의 原理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證明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前에 宇宙法界가 不生不滅임을 선언하셨고, 과학은 오늘에
와서야 自然의 不生不滅을 실증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 내용은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人間 存在의 根本은 백천만겁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成佛한 本來是佛로 백천만겁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無量佛事를 하는 그런 큰 存在입니다. 다만 病이 무엇이냐면, 눈을 뜨지 못하여 이런 事實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明鏡에 낀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에 낀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마음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方法이며 제일 빠른 方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뜰래야 안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부처 위치에 들어간다,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參禪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方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原因,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原因이 있으니 그 原因을 除去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심(三毒心)이라고 말합니다.
慾心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맑은 거울 즉,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지금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밝아질래야
안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根本 原因이냐 하면 貪欲心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貪欲만 根本的으로 除去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이 있다고 錯覺하는 生覺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는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
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
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나뿐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行動의 基準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三毒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光明을 환히 볼 수 있고,
백천만억겁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同時에, 전체 우주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을 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世上은 전부 내가 中心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곳이지만, 佛敎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根本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
니다.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봅시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成佛해서 또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人生 100年 生活이라는 것이 아무리 온갖 富貴榮華를 누리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無碍自在한 그런 大生活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100년의 부귀영화는 티끌
하나도 안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원
짜리도 안 되는 100년의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시다. 그러면 저 백천남억 무량아승지겁, 억척만겁 前부터 成佛해 있는 그 佛國土에 들어가고
그런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 나'
(眞我)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우주를 통째로 팔고
사는 그런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中心이 되어 사는 人生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 큰 發願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同時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미래겁이 다하도록 自由自在한 大自由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出家하신
理由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되는 줄 알고 王位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아주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順治皇帝)같은 분은, 만주에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大淸帝國)
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벳,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解脫道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중국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負木)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
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出家할 때, '나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가? (我本西方一衲子綠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寶位)를 헌신짝 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十方法界에서
自由自在하게 生活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財産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 25사변 때 서울대학에서 교수하던 문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
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 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번이라도 남을
위해서 생각해 본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다.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자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씌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보살의 육도만행(六度萬行) 6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佛供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비는 것이 佛供이 아니고 純粹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佛供이라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옆에 갖다
놓는 것보다는 여러 억천만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라고.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結局 마음의 눈을
떠서 未來劫이 다하도록 永遠한 큰 살림살이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석가모니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는 만큼 큰 功德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敎主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女子 분입니다.
그 당시 日本에서도 굉장한 富者로 살았습니다.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 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내가 깨쳤어! 내가 하나님
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전부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줍시다.
그러면 결국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
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도우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結局 돈벌이는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주고서는.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 봐야겠다'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財産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生活方針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欲心부리는 것은
結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結局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가지라도
남을 돕는 生活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바른 길로 서려면 승려도 신도도 모두
생활방향이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 하면 남을 돕는 데로 완전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같이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똑딱거리면서 福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生活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영원히 없어
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이 머리만 아파도 쌀
되나 가지고 절에 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자식 얼른 낫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의 思考方式으로
는 부처의 참된 제자가 아닙니다. 승려도, 신도도 부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발전
이 없습니다. 山中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
에는 승려 전문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도 논을 팔아서
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 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는데 어떻게 포교하며 또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
시키자'하는 것이 내 근본 생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結論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주삼라만상만물, 모든 生命이 백천만억겁 前부터 本來 佛이고
本來 佛國土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방법은?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화두를 배워서 마음속
으로 화두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話頭를 하고, 行動은 남을 돕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의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서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백천만억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本來 부처이고 本來 불국토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인간 세상과 천상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미래겁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벌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노력합시다.
'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도의 원리 |성철 스님 법어 (0) | 2016.03.27 |
---|---|
空은 뭐고 緣起는 뭐죠? (0) | 2016.03.07 |
상주불멸 |영원한 나를 찾아서 (0) | 2015.11.22 |
본마음 (0) | 2015.11.06 |
일승법(一乘法)과 방편법(方便法) (0) | 2015.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