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중도의 원리 |성철 스님 법어

장백산-1 2016. 3. 27. 16:20

중도의 원리 |성철 스님 법어 

 

중도(中道)의 원리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則是空 空卽是色)

위 게송은 불자가 아니어도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입니다.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有形이 곧바로 無形이고 無形이

즉바로 有形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有形이 無形으로 無形이 有形으로 서로 通하겠습니까? 모양이 있는

바위가 모양이 없는 虛空하고 서로 通할 수 있습니까? 무형과 유형 유형과 무형은 항상 서로 통하여 있습

니다. 그런데 有形이 無形으로 無形이 有形으로 서로 通하는 그 理致가 저 自然世界의 現象을 보더라도

有形인 質量(물질/사물)이 無形인 에너지로 轉換하고 無形인 에너지가 有形인 質量으로 轉換합니다.

그래서 그냥 말로만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아닙니다. 事實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석가모니부처님 말씀

이 더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다는 事實이 確實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히 ‘4次元 世界가 어떻고’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아인슈타인의

相對性 理論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 4차원 세계를 수학적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

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세계의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

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融合하는

4차원 세계의 시대가 온다" 이렇게 하여 3차원에서의 시간과 공간의 相對的인 對立은 消滅되고  대신

시간과 공간이 融合하는 4차원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融合하는 세계 그 세

를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結局엔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 즉, 理無碍法界, 事無碍法界, 理事無碍法界, 事事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읍니다. 無碍法界라는 뜻은 양변(兩邊/ 양극단)을 떠나 兩邊이 서로서로 어떤 막힘도 없이 通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곧바로 통해 버리는 世界가 無碍法界입니다. 無碍法界는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時空) 融合의 世界로서 만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 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든지 ‘不生不滅’등의 理論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

라고 말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成佛하신 후 처음에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맨 처음 하셨는가 하면 “내가 中道를 바로 깨쳤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中道’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의 根本입니다. 中道라는 것은 서로 다른 모순이 融合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과 상대적인 대립이 融合된 世界를 中道의 世界라고 말합니다.

 

보통 보면 선(善)과 악(惡)이 서로 상대적으로 對立되어 있는데 불교의 中道法에 의하면 선도 악도 떠나

선과 악 악과 선이 서로 通해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서로 通해 버린 것입니다. 선이 곧 악이고,

악이 곧바로 선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通합니다. 서로 通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有形이 곧 無形이

고 無形이 곧 有形이라는 式으로 通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生과 死를 떠난 不生不滅에서는 어떻게 通하는가?

고전물리학에서는 質量(물질/사물 : 유형)과 에너지(無形)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서로 對立되어 있습니

다. 에너지와 질량은 서로 상대적인 대립 관계로서 서로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에너지가 卽 질량이고 질량이 卽 에너지로 에너지와 질량이 완전히 融合되어 通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佛敎의 中道의 原理 입니다. 그래서 中道 法門은 一切萬物, 一切萬法이 서로서로 融合하는 것을 말합

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超越하여 일체만물이 전부 融合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融合되어 일체만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中道라 하면 “中道는 中間이다”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中道는

中間이 아닙니다. 中道는 모순되고, 대립된 兩邊인 生과 滅을 초월하여 생과 멸 멸과 생이 서로 融合하여

서로 通하므로 生이 곧바로 滅이고  滅이 곧바로 生이 되어 통해있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轉換할 때 에너지는 滅하고 質量이 生기지 않습니까? 그러니 生이 즉 滅인 것입니다. 質量이 生겨낫다는

것은 에너지가 滅했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滅했다는 것은 質量이 生겼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에너지

生겨났다는 것은 질량이 滅했다는 것이고 질량이 滅했다는 것은 에너지가 生겨낫다는 것입니다. 그러

니 生과 滅이 完全하게 서로 通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中道라는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까지 말한 내용을 綜合해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卽, 佛敎의 根本은 不生不滅인데

그것 不生不滅이 곧 中道다. 그런데 不生不滅은 觀念論인가? 아니다. 관념론은 커녕 實證的으로 客觀的

으로 완전히 立證되는 것이다. 즉 아인쉬타인(A. Einstein)의 相對性 理論의 ‘等價原理’ 즉, E=mC제곱

으로 不生不滅 卽, 中道를 분명히 立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하면 불교

보다 더 과학적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中道란 모든 兩邊의 상대적인 對立을 떠나서 對立이 融合되어 서로 通한다는 뜻인데 석가모니부처님께

서는 中道를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의 대답 중에서도 哲學的으로 볼 것 같으면 有와 無

가 제일 큰 對立입니다. “있다(有)” “없다(無)” 입니다. 中道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닙니다.

즉, 非有非無입니다. 있음과 없음 양변을 떠나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中道에서  有와 無

아난다는 식입니다(亦有亦無).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3次元의 世界에서의 相對的인 有와 無는 완전

히 없어지고 4차원 세계로 가서 서로 通하는 有와 無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有와 無가 서로

融合해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有와 無가 融合하는 까닭에 中道라 이름한다”(有無合故 名爲中道)

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不生不滅이라는 中道의 原理에서 보면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서로

서로 生과 滅이 없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서로 融合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이 세상 모든 것이 無碍

自在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있는 것(有)가 없는 것(無)이고 없는 것(無)가 곧 있는 것(有)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色郞是空 空郞是色 입니다. 이 말씀이 中道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다  이 中道 즉, 色卽是空 空卽是色, 不生不滅을 저 멀리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에 떠가는 구름 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量子物理學에서 실제로 生이 곧 滅이고 滅이 곧 生인 中道의 原理 즉,

불생불멸(不生不澈)의 원리,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원리가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그러니 中道의

原理는 저 하늘에 떠 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져 볼 수 있는 그런

實際的인 原理다 이 말입니다. 中道의 法 卽, 不生不滅의 原理나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原理 이런 法은

아주 좋은 法이지만 사실 보면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 볼려고 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과 대립이 時間的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

에서는 상대적인 모순 대립이 直接 相通합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相對를 떠나서 하나로 融合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有)가 곧 없는 것(無)이고 없는 것(無)가 곧 있는 것(有)이고, 시(是)가 卽 비(非)가 되고

 非가 卽 是가 되어 모든 是와 非, 모든 有와 無, 相對的이고 對立的인 모든 투쟁 모든 相對는 완전히 사라

지고 모든 모순과 대립을 떠날 것 같으면 싸움을 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極樂이고 天堂이고 절대세계(絶對世界)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法이 法의 자리에 머물러서 世間相 이대로가 常住不滅이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말입

니다. 卽, 中道의 法이 宇宙萬法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에 宇宙萬物, 이 세상 모든 것, 지금 여기 있는

대로가 不生不滅, 常住不滅로 세간상상주다 이말 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世間)이

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생겨났다가 없어지고 생겨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실상(實相) 즉, 참모습은 常住不滅, 不生不滅,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中道인 겁니다.

 

그렇다면 不生不滅의 原理는 어디서 꾸어온 것인가? 어디서 꾸어온 原理가 不生不滅이 아닙니다.

宇宙 全切,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本來 이미 不生不滅입니다.

中道입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입니다. 일체만물, 일체만법이 中道, 色卽是空 空卽是色, 不生不滅이라

는 事實을 확실히 알고 이 事實을 바로 깨쳐서  이 事實대로만 알아서 삶을 살아나갈 것 같으면 天堂도

필요 없고 極樂도 필요 없고  지금 여기 이 순간 앉은 이 자리, 서 있는 이 자리 이대로가 絶對의 世界,

천당, 극락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現實, 삶, 인생, 이 세상 모든 것, 현상의 세계가 곧바로 絶對의 世界라는 眞實을

주장합니다. 마음의 눈만 제대로 뜨고 보면 이 세상, 사바세계 그대로가 있는 그대로 극락세계인 겁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어디 저 멀리 높은 곳 딴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올바로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의 눈만 제대로 뜨고 보면 太陽이 온 宇宙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 믿어 천당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있습니까? 마음의

눈만 제대로 떠서 이 세상을 올바로 알고 제대로 보면 우리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이 자리 서 있는 이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境界線은 어디 있느냐 하면 마음의 눈을 뜨면 不生不滅의 世界,

中道의 世界,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世界,  絶對의 世界이고,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면 生과 滅의 世界, 有와

無의 世界, 輪廻하는 世界, 相對的인 世界이기에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핵심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 이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

 

* 법문 출처: 해인지 <해인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