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空은 뭐고 緣起는 뭐죠?

장백산-1 2016. 3. 7. 10:44

[하도겸 칼럼] 백일법문⑦  空은 뭐고 緣起는 뭐죠?
기사등록 일시 : [2014-08-17 06:01:00]

【서울=뉴시스】하도겸 박사의 ‘생활선(生活禪) ’ <138>

불교 근본교리에 삼법인(三法印) 또는 사법인(四法印)이 있다. 삼법인이란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삼법인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더해 사법인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이 괴로움(일체개고)’이란 행복이 유지되지 않고 사라지거나 변화하는 데 있다. ‘모든 현상세계가 무상(제행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있건(有) 없건(無) 모든 존재에 변하지 않는 그 어떤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고정적인 성품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현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다(제법무아)’. 이같은 사실을 알아서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일체의 분별과 집착과 망상 번뇌를 여의게 되면 적정한 열반의 법열(法悅)이 넘치는 열반적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제법무아의 무아(無我)를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 말한다. 불교의 空은 세상에 보이는 현상(色)의 자성(性)이 空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法(우주만물)은 서로 緣起해 있다. 緣起가 성립되는 것은 반드시 空思想이 根本이 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空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했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空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있다고 하는 것이 變化하므로 없는 것이 되며, 없다고 하는 것이 실제로 없는 것도 아닌, 있는 것(有卽是無無卽是有)이다. 이것이 中道이기도 하다. 緣起  밖에 따로 空이 없고 空  밖에 따로 緣起가 없으며 空 以外에 따로 中道가 없고 中道 以外에 따로 緣起가 없다.

십이연기에서 緣起를 시간적 인과(因果) 관계가 아니라 해석과 존재의 원리로서 법계(法界)와 중도(中道)의 緣起로 봐야 한다. 사리불은 緣起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 서 있는 것에 비유했다. 시간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行)이 자식이 돼서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는다는 式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行)은 서로 의지(依持)하는 형제지간이라는 말이다. 두 개의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는 두 갈대 묶음의 平等한 처지에서 말한 것이다. 卽, 緣起란 因緣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던 것이 새로 탄생해 생겨난다는 生成의 基本原理라기보다는 一切 萬物이 存在하는 存在의 原理로 一切 萬物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 연기(緣起)다.

緣起의 根本 性稟 가운데 진여(眞如)란 나고 죽고 하는 것이 본래 없으며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 것이 본래 없다. 萬物은 서로 依持하면서 存在할 뿐이다. 緣起라고 하는 무슨 本質이 따로 있고 지말(支末)이 따로 있어서 그 本體(본질)에서 支末이 생겨난다는 말이 아니다. 緣起란 平等하고 對等한 입장에서 서로 融和해 無碍自在함을 말할 뿐 서로 앞서고 뒤서고 하지 않는다. 萬物은 서로 依持하면서 존재한다는 성격(相依相關性) 때문에 緣起란 무아(無我)가 根本 理致로 돼 있다.

생사(生死)가 열반(涅槃)이며 번뇌(煩惱)가 보리(菩提)이기에 끊어야 할 고(苦)도 없고, 집(集 : 고통의 원인)도 없고, 고통을 닦고 터득(攄得)해야 할 멸(滅)도 없고, 고통을 멸하는 길(도 道)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변견이나 사견(邪見)이나 할 것 없이 宇宙萬物  全切가 다 中道 아닌 것이 없으니 부처(깨달음)과 마구니(분별, 망상, 번뇌)가 경계선이 없어지고 화합하는 때이다. 이것이 원융무애한 중도사제(中道四諦 : 중도의 4가지 진리)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때로는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의 이승(二乘)도 말하고, 때로는 이승에 보살(菩薩)을 더한 삼승(三乘)도 말씀하지만 聲聞 緣覺 菩薩은 어디까지나 방편(方便)일 뿐이다.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은 순전히 自己의 이익(自利)에만 치우쳐 혼자 가만히 앉아서 자기의 해탈만 추구해 모든 것이 다 소극적이다. 이에 반해 보살승은 자신의 이익(自利)보다 타인의 이익(利他)이 근본이 돼 남을 위해서는 나의 해탈은 그만두고 지옥을 하루에 천번 만번 가도 좋다고 하는 대보리심을 내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비롯한 수많은 수행(육도만행 六道萬行)을 닦는다. 일체중생을 위해서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육도만행을 닦으며 한없는 세월 동안 중생을 위해서 살아간다. 보살은 이렇게 남을 위해서 남을 도우며 살면서 마침내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을 이룬다.

일승(一乘), 일불승(一佛乘)이란 말은 眞如法界를 지금 여기서 곧바로 깨닫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관(止 觀), 정·혜(定 慧)를 함께 닦아서 中道를 正等正覺해 眞如法界에 契合하면 그만이지 거기에서 보면 무슨 이승이니 삼승이니 하는 헛된 길(空路)은 없다. 一乘道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이라는 네 가지(四念處)를 올바로 알고 올바로 생각(正知 正念)한다는 것이다. 즉 몸은 청정한 것이 아니며, 受는 즐겁지 못한 괴로움이고, 마음은 항상하지 않는 無常한 것이며, 法은 고정된 실체 즉, 自性이 없는 무아(無我)라고 觀察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근본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한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 사념주(四念住) 또는 四念處를 바로 一乘道라고 했다.

萬物의 緣起하는 性稟을 법성(法性)이라고 했는데 法性은 萬法(萬物)의 자성(自性)이라는 말이다. 이 法性은 恒常 영원히 法界에 存在하므로 緣起, 곧 십이연기는 항상 法界(宇宙)에 존재하는 法性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緣起法은 眞實한 法性의 緣起 , 法界의 緣起로 緣起를 바로 보는 것이 法(진리)을 바로 올바로 보는 것이라는 말로 다른 말로 성불(成佛)이라는 말이다. 석가모니세존은 法界(宇宙, 이 세상)을 正等覺(올바르게 깨달음)하고 緣起를 직접 깨치고 中道를 직접 터득했다.

화엄종이 진여법계의 연기를 이론적으로 계승한 종파라면, 禪宗은 진여법계의 연기를 실천면에서 진여자성을 확철히 깨쳐서 진여법계를 직접 증득한 것이다.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 진여법계를 증득,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해 내려온 종파는 다름 아닌 선종(禪宗)이다. 선종이란 석가모니부처님의 中道, 卽 法界緣起(만물의 상의상관관계) · 眞如法界를 단박에 증득(頓證)한 것이며 몸소 실천한 것이다.(頓悟頓修)

※ 이 글은 ‘백일법문 (성철스님법어집)’(장경각·1992)을 정리한 불교닷컴의 ‘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을 일반인이 알기 쉽게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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