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그 후 1년]
정의 위해 싸웠던 한국 시민, 이젠 '세계 평화' 교훈 보여줄 때
번역 | 김진호 선임기자 입력 2017.10.29. 23:03
[경향신문]
ㆍ주한 미국인 학자가 본 ‘촛불 혁명’
이 글을 쓰면서 나는 5살배기 아들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 라운지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향 캘리포니아를 짧게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아들이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잠시 뒤 어떤 노래인지 깨닫고 함께 흥얼거렸다.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내 얼굴에 퍼졌다. 아들이 부른 노래는 대한민국 헌법 1조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멜로디는 우리 가족이 서울 시민과 함께 보낸 10여 차례의 토요일을 상기시켰다. 신뢰를 잃어버린 대통령으로부터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었다.
지난 가을과 겨울, 우리는 추위 속에서 노래를 불렀고, 빗속에서 행진했다. 촛불을 켜고 구호 팻말을 높이 들었다. 시청 앞에서 친구들과 합류해 광화문으로 걸었다. 거기서 다시 청와대를 향하면서 새 친구들을 만났다. 모두가 화가 나 있었지만 동시에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 토요일 밤들이란…. 수도 한복판의 (차량이) 차단된 거리에서는 어떠한 이방인도 없었다. 연대가 솟아나 용암처럼 흘렀다. 어떠한 것도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미로에 갇힌 대통령은 자신의 귀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시는 사람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퇴진!”을 노래했다. 대통령이 듣기를 거부하자 국회로 향했다. 이번엔 “탄핵!”을 노래했다. 국회의원들은 ‘일반의지(volont g n rale)’를 들었고, 수십만명이 거리에서 요구한 것을 법 안에 봉헌했다.
서울에 사는 미국인으로 촛불운동을 목격한 것은 계시였다. 구시대 미국식 자유주의의 자랑스러운 산물이었을까. 나는 (미국)대학에서 국민의 의지에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라고 배웠다. 필연코 레닌과 스탈린에게로 연결되는 루소를 경계하라고 했다. 거리 시위보다는 헌법을 더 깊이 존중하라고 교육받았다. ‘법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온, 관념으로서의 이상적인 정부에 대해 생각하라고도 배웠다. 훌륭하고 고상한 원칙들이다. 나는 여전히 그 원칙들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목도하면서 다소 경멸해왔던 루소의 직접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평화적인 집회의 힘과 시민적 연대, 단호한 직접행동이 표출된 혁명이었다. 어차피 미국의 정치적 전통은 혼합물이다. 자치정부를 민주주의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우매한 군중을 자유주의적으로 불신한다. 두 가지가 결합돼 있다. “자유의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로 원기를 회복한다”고 토머스 제퍼슨은 말했다. 하지만 촛불혁명은 제퍼슨보다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 지난해 서울에선 자유(liberty)의 나무가 자유(freedom)의 노래로 원기를 회복했다. 시민들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자치정부를 달성했다.
아웃사이더에게 운동의 성격을 설명하기란 늘 녹록하지 않다. 어떤 미국인들은 (대통령) 탄핵의 법적 또는 헌법적 근거를 읽지 못했다고 중얼거렸다. 한국과 같은 ‘젊은 민주주의’를 낮춰 보는 사고방식이 내비쳤다. 박근혜는 어쩌다가 탄핵까지 받게 됐을까. 전임 대통령들도 그만큼 부패하지 않았었나. 백만명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한 재벌과의 야합 주장과 (최순실의) 그림자 내각 폭로는 과연 사실이었나. 진실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 박근혜가 여자이기 때문에 분노를 촉발한 것은 아닐까.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탄핵 논의에 비춰보았을 때 일부 미국인들이 품었던 이러한 의문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의 탄핵 과정은 법적인 고려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미국 대통령 탄핵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결정이다. 연방하원이 국민의 의지를 어떻게 해석했느냐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
미국인들은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젊은 민주주의’로부터 바로 그 국민의 의지를 어떻게 표출(!)하는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구의 포퓰리즘 논의와 겹쳐보면서 촛불혁명이 과연 포퓰리즘인지, 아닌지를 생각하는 것 역시 아이러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이어 유럽 곳곳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발흥하고 있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포퓰리즘은 인터넷의 주변부에서 권력과 영향력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민자들을 범죄와 가난의 원흉으로 지목한다. 사실 실업과 불평등의 이유는 세계화이건만, 종교적·인종적으로 ‘다른 그들’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이민자들은 금지하고 추방하거나 침묵을 강요하고 조롱받아야 할 대상이 됐다. 서구는 반동적이고 고립적이며 상업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본능의 분화구 옆을 위태롭게 걷고 있다. 자칫 떨어지기 십상이다. 포퓰리즘은 유럽과 미국 정치에서 먹히고 있는 병리학적 현상이다.
서구의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신들의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능케 할 길이 거기에 있다. 평등과 내적 단합,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촛불혁명은 포퓰리즘이었다. 스트롱맨(독재자)의 법에 의한 조치가 아니라, 시민적 연대의 이름으로 부패를 비난했다. 대중의 신뢰를 잃은 지도자로부터 주권을 되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제도들을 더 강화시켰다. 원기도 불어넣었다. 국회는 국민과 함께 표결을 했고, 헌법재판소는 그 결정을 지지했다. 자유롭고 공정하며 신속한 선거로 새 대통령을 권좌에 앉혔다. 대통령 궐석이라는 헌법적 위기가 길어졌지만 그 기간 동안 무질서나 혼란도 없었다. 촛불운동은 최상의 포퓰리즘이었다. 한국은 희망이 꺼져가고 반동의 먹구름과 원한 탓에 어두워지고 있는 세계에 자유민주주의의 영감을 불어넣은 횃불로 우뚝 섰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서 <혁명에 관하여(On Revolution)>에서 성공적인 혁명의 열쇠는 해방의 순간에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더 나은 도덕적 질서와 정치적 공동체를 구축하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자신의 권한이 촛불운동에서 나온 것이며, 촛불운동의 정신 안에서 통치하는 자신의 능력에 따라 심판받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지난겨울 터져나온 시민의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전진의 계기였다. 서구가 극우와 대안우파의 반동적인 정치와 싸우고 있을 때, 한국이 자유주의 원칙을 믿고 진보적인 해법을 내놓은 것은 좋은 정부와 되살아난 민주주의의 모델이다. 지구촌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가장 오래되고 익숙한 도전이다. 그 때문에 쉽게 잊힌 도전이다. 한반도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미국(대통령)의 트위터 메시지 탓에 불안정하고 위험한,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고 있다. 촛불운동 동안 보인 민주주의 정신은 평화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인들은 현대사 경험을 통해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자유의 불꽃을 꺼버릴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전쟁 전망은 자유는 물론 생명 자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미국은 1년 전까지만 해도 어쩌다 거론했던 ‘군사적 해법’을 말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참담한 부패가 시민적 삶의 르네상스를 촉발시켰던 것처럼 향후 몇 년 동안 끔찍한 전쟁 가능성이 한반도 평화를 향한 새로운 운동을 점화할지도 모른다.
혁명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정의로운 사회와 평화로운 세계를 향한 끊임없는 싸움의 새로운 국면을 열기도 한다. 한국인들은 1년 전을 돌아보면서 자랑스러워할 대목이 많다. 세계를 향해 민주주의의 교훈을 주었다. 어쩌면 지금은 세계에 또 다른 교훈을 주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평화를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이 될 것이다.
<번역 | 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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