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전문가의 권위를 너무 믿지 마라

장백산-1 2018. 5. 18. 22:20

[세상읽기] 전문가의 권위를 너무 믿지 마라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입력 2018.05.18. 21:17 수정 2018.05.18. 22:00




[경향신문] 

“교육자, 의사, 사회복지사 같은 오늘날의 전문가는 마치 사제나 변호사처럼 합법적으로 권력을 확보하여 자신들만이 필요를 만들고 필요를 제공하도록 법을 제정한다.” 한평생 인간 공동체의 자율성을 강조한 일리치 선생이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한 말이다. “전문가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라 고 끼워 넣는 것을 우리가 결핍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전문가들이 인간을 불구로 만드는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 못했을 것이다.” 예리하다!

전문가들은 ‘보통사람들’이 일리치 선생 처럼 이렇게 통찰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민중이 깨닫는 순간, 전문가들이 누려온 권력의 기반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전문가들이 가진 권력이란 사회나 민중을 대상으로 ‘처방’을 내리는 특권이다. 그렇다. 전문가라는 교육자들은 아이들이나 학부모를 상대로 미래(노동시장)에 대처하려면 특정 지식과 기술(예, ‘4차 산업혁명’)이 필요하다고 처방하며, 전문가라는 의사들은 환자나 당국을 대상으로 특정 질병에 대처하려면 특정 약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문가라는 종교인, 법률가,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근대 자본주의 발달과 더불어 민초들이 수천년 이어온 전통적 지혜나 삶의 기술은 ‘촌스러운’ 것, 원시적인 것으로 믿도록 세뇌되고 강요당했고, 대신 전문가들이 처방하고 조제한 가공의 필요를 마치 현대인의 세련된 필요인 것처럼, ‘있어 보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됐다.

최근 삼성재벌의 노조 파괴 공작 문건에 이어 경영권력 승계 목적으로 그 계열사 바이오로직스에서 엄청난 분식회계가 이뤄졌음이 언론에 드러나자, 법률 전문가 ‘김앤장’은 물론 유수한 대학의 회계 전공 교수들이 “적법한 회계처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학자로서 또다시 서글픔과 자괴감을 느낀다.

‘또다시’라고 한 까닭은 이런 일이 거의 매일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나 돼지, 닭·오리가 집단 발병을 하면 보건 전문가들의 처방으로 온갖 약을 뿌려대고 심지어 대량 학살도 감행한다. 2009년 쌍용자동차 대량 해고의 배경에는 ‘권위’ 있는 회계법인의 (짜맞춰진) 비용 절감 보고서가 있었고, 이명박 시절 4대강 ‘살리기’ 사업 강행의 이면에는 국내외에서 내로라하는 건설·토목 전문가들의 영혼 없는 과학이 있었다. 해마다 300명 이상이 과로사한 배경에는, 토·일요일은 1주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독창적’ 전문가 해석도 한 요인이었다. 게다가 많은 노동 전문가들이 각종 위원회나 컨설팅, 법정 등에서 인간적 소망을 억압하고 자본의 평화를 위해 애쓴다. 유치원부터 중·고교, 학원과 대학에 이르기까지 철학 없는 교육 전문가들도 ‘인적자원’의 상품화를 위해 분투한다. 시간과 돈, 삶을 희생시키면서 말이다.

그러나 ‘병원이 병을 낳는다’는 말처럼 전문가의 필요는 또 다른 전문가의 필요를 낳는다. 그 와중에 민중은 결핍감과 열등감에 휩싸이고 그 필요 충족 비용은 급증한다. 그렇게 무심코 따르다 보면 어느새 민중의 자율성은 해체되고 오로지 상품 세계에 갇힌 좀비가 된다. 우리는 전문가 상품의 감옥에 갇힌 ‘무고한’ 죄수들이다!

물론 권력 행사를 거부하는 겸손한 전문가도 있다. 남들이 힘들다며 가지 않으려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의사도 있고, 참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교수도 있다. 4대강사업이 사기라고 목청 높인 학자도 있고, 노동자의 고통을 공유하며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는 전문가도 있다. 많은 기업의 회계보고가 조작이라면서 양심 고발을 하는 회계사도 있으며, 민초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대안 사회를 상상하는 전문가도 있다. ‘철학 있는’ 전문가들이다. 이들이 더 많아지고 민초들이 작은 촛불을 들고 연대할수록 우리 사회는 밝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의 비중은 매우 낮을 뿐 아니라, (돈과 권력에 사로잡힌) 막강한 중독 시스템을 지탱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이들을 언제 제거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한다네, 시장의 전문가와 지식장사꾼들이, 나를 소비자로 시청자로 유권자로, 내 꿈과 심리까지 연구해 써 먹는다네….” 다가오는 선거날도, 모두 이 시를 곱씹고 나서 참여하시길!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