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內面)의 센터(중심), 내면의 골방 - - 성인들의 법문
예수는 ‘눈이 있는 자가 보지 못하고 귀가 있는 자가 듣지 못한다.’고 수 차례 말했다. 눈이 먼 자만 보지 못하고, 귀가 먹은 자만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멀쩡하게 눈이 있는 자가 보지 못하고, 멀쩡하게 귀가 달린 자가 듣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 역시 눈이 먼 장님이며 귀가 먹은 귀머거리이다. 이런 사람들은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이지만,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것이지만 아니 한 몸으로 있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람들을 사방팔방에서 둘러싸고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사람들이 보는 방식에는 어떤 장애(障碍)가 있다. 사람들이 보는 방식에 어떤 장애(障碍)가 있다는 것은 의심(疑心)할 바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 장애(障碍)는 아주 사소한 장애(障碍)일 뿐 크고 심각한 장애(障碍)는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방식에 장애(障碍)가 있는 것은 마치 사람 눈에 낀 작은 티끌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이 산(山) 전체를 통째로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작은 티끌 하나가 눈에 낀 것은 그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산(山) 전체를 통째로 못 보게 하는 장애물(障碍物)은 거대한 것이어야 한다. 논리적으로 본다면, 산 전체를 통째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障碍物)은 그 산(山)보다 더 거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장애물(障碍物)은 아주 작은 티끌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티끌 먼지가 사람들의 눈에 끼여있기 때문에 산(山) 전체를 통째로 못보게 하는 것이다.
눈에 낀 아주 작은 티끌 먼지가 산(山) 전체를 통째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내면(內面)의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애물(障碍物)도 산(山) 전체를 통째로 못보게 하는 산(山) 전체보다 더 거대한 장애물(障碍物)이 아니다. 사람들의 내면(內面)의 시야(視野)를 가로막는 장애물(障碍物)은 아주 작은 티끌 먼지 알갱이에 불과하다. 아주 작은 티끌 먼지 알갱이가 사람들의 내면(內面)의 시야(視野)를 가로막아 사람들을 실체(實體), 근본, 본질을 보지 못하는 장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하찮은 아주 작은 티끌 먼지라는 장애물(障碍物) 하나가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진리(眞理), 인생의 모든 진리(眞理), 세상의 모든 진리(眞理)를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애물(障碍物)은 무었일까? 장애물(障碍物)은 바로 사람의 분별을 하는 마음(분별심), 분별을 하는 생각, 망상, 번뇌이다. 사람들이 인식(認識)할 수 있는 진리(眞理)만이 사람들에게 의미를 가진다. 사람들의 지각 능력은 사람들이 인식(認識)할 수 있는 진리(眞理)를 이해하고 포착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다.
바다가 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귀가 없는 사람은 바다가 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설령 바다가 영원토록 포효한다 해도 귀가 없는 사람은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듣는 귀가 없다면 바다의 포효는 무의미하다. 찬란한 햇빛이 창살을 비추어도 눈이 없는 사람은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그가 무엇을 만지기를 원한다 해도 아무것도 만질 수 없다.
신(神)과 지복(至福)에 대해 많은 말들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경전들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원과 교회, 모스크에서 기도하고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 사람들이 신(神)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신(神)을 보거나, 신(神)의 음성을 듣거나, 사람들의 존재 깊은 곳에서 신(神)의 심장이 고동치는 소리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모든 것이 그저 공허(空虛)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 같다. 사람들은 마치 신(神)에 대해 끝없이 계속 떠들기만 하면 신(神)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와같은 짓은 귀머거리가 평생 동안 음악에 대해 떠드는 부질없는 짓이다. 장님이 빛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는 장님도 아니고 귀머거리도 아니다.’라는 착각에 빠질 가능성은 있다. 그렇게 계속 떠들어댐으로써 귀머거리와 장님은 소리가 무엇이고 빛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기 시작한다. 지구 방방곡곡에 건설한 교회와 사원, 모스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착각(錯覺)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결국에는 사원, 교회, 모스크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가진 것은 환상(幻想)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신(神)을 믿을 뿐, 신(神)을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신(神)에 대한 믿음은 끝없는 허망하고 헛된 말장난과 마찬가지로 무의미(無意味)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 때 그가 하는 말을 믿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신(神)의 존재(存在)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이 그의 주장에 대항해 신(神)의 부재(不在)를 증명하는데 실패했다고 치자.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패배감을 느끼고 신(神)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믿음은 ‘앎’이 아니다. 사람들이 빛에 대해 아무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 해도 장님은 빛을 알 수 없다. 장님에게는 빛을 볼 눈이 없다.
나는 ‘앎’이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 자리에 앉아있다. 사람들의 내면(內面)에는 어떤 센터(center, 중심)이 있다.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쎈터가 비록 지금은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지만 내면의 센터가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내면의 센터를 통해 크리슈나가 '앎'에 도달했으며 환희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예수가 '앎'에 도달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나이다.’라고 외친 것도 내면의 그 센터를 통해서이다. 마하비라도 내면의 이 센터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내면의 이 센터를 통해 붓다(覺者, 깨달은 자)가 되었다. 인간의 내면에 이러한 센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면에 자리한 그 센터는 곧 내면의 눈이며 내면의 귀다. 내면에 자리한 이 쎈터는 다만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 곳에 있는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내면의 그 센터를 일깨우게끔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 오쇼의 <생명의 에너지를 일깨워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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