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淸華 스님] 참선의 요체 (參禪의 要諦)

장백산-1 2011. 2. 12. 21:17

제 3 집

-. 참선(參禪)의 요체(要諦) [3]


아무튼 선(禪) 가운데서
어느 문제(問題)를 의심(疑心)하는 화두선(話頭禪)이 있고
또는 한 가지는 그와 같이 부처님 도리(道理)를 그대로 잠자코 관조(觀照)하는
묵조선(默照禪)이 있고,
그러나 우리 중생(衆生)이 단박에 성불(成佛)해 버리면 좋지만
그렇게는 안 됩니다.

금생(今生)에 나와서 애쓰고 배운 것이 모두가 다
가정에서 배운 것이나 유치원에서, 대학(大學)까지 배운 것이
모두가 다 있다, 없다 하는 상(相)이 있는 것만 배웁니다.
따라서 그런 것이 지금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 꼭꼭 쌓여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지혜(智慧)를 좀 배웠다 하더라도,
부처님 지혜도 누가 확실히 말한 사람도 별로 없고,
그러므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마음은 마음이고 물질은 물질이고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따라서 화두(話頭)를 들고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단박에 훤히 트여버리는 것이 아닌 것이고
한 10년 동안 화두 의심하고 다녀도 별로 얻은 것이 없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또는 묵조선(默照禪)도 역시 묵조해서 잠자코 비춰본다고 해도
자꾸만 앉아 놓으면 - 그런 저런 그 어릴 때부터 배운 것,
과거 전생에 우리가 소나 돼지나 개나 사람이나 천상(天上)이나
모두 그런데서 갔다 왔다 하다가 우리 잠재의식에 쌓아 놓은
그런 관념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같이 곁들어서 -
조금만 생각이 쉬면 그냥 딴 세계가 나옵니다.

상시(常時)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있을 때는 모르지만
방선(放禪)하면 밖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있는 것 뿐이고,
또 우리 표면의식(表面意識)이 잠들면
그때도 역시 잠재의식에서 있다는 것만 나오고
이제 과거에 싸웠던 생각, 누구하고 좋아했던 생각, 그런 것만 나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단박에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래저래 부처님 가르침 보다는 딴 생각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애써서 염불(念佛)이라 하는 그런 법(法)이 있단 말입니다.

염불(念佛)이라는 이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이 하나 뿐이 없으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하는 것 하나만 하면 될 것인데,
부처가 많이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이나
그렇게 많은 이름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우리 불교(佛敎)인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더러는 우리 스님네 가운데도 지장보살을 하면 공(功)이 더 적고
또는 관세음보살을 하면 공이 더 많고 또 그 반대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참 곤란스러운 문제입니다.

법계(法界)라 하는 것은,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이래저래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계(限界)가 있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가 못 됩니다.
법신(法身) 부처가 못 됩니다.
무량무변(無量無邊)하게 한도 끝도 없는 것이고,
공간적(空間的)으로 시간적(時間的)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부처님 경계이기 때문에
부처하면 하나의 부처 뿐 인 것이지
이래저래 많은 부처가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삼천불명경(三千佛名經)이라,
삼천 가지의 부처님 이름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청정광불(淸淨光佛), 무량광불(無量光佛), 무애광불(無碍光佛) 등등
삼천불(三千佛) 이름이 있는 그런 경(經)도 있습니다.
그러면 삼천불이 따로따로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반야지혜(般若智慧)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반야지혜로 비추어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부처입니다
.
하나의 부처님인데 부처님의 공덕(功德)이 무량한 공덕이 있기 때문에
우리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공덕을 다 말을 하려면
하나의 이름으로 해서는 전부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자비(慈悲)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智慧)도 있는 것이고
원력(願力)도 있고 그렇게 한도 끝도 없는 공덕이 있기 때문에
자비로운 쪽으로 우리가 얘기할 때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또는 지혜 있는 쪽으로 이야기 할 때는 문수보살(文殊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또는 원력(願力) 분야에서 말할 때는 보현보살(普賢菩薩),
또는 우리 중생의 영혼(靈魂)을 저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우리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리는 의미에서 보면 약사여래(藥師如來),
이렇게 있는 것이지 따로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衆生)이 잘 모르므로
중생의 생각구분해서 있는 것만 생각하고 분별 밖에는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알리기 위해서 잠시간 이름이 붙은 것이지
따로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명호(名號)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를 의미해서 있습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라는 그런 명호도
부처님의 자비(慈悲)가 관세음보살이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관세음보살 상호(相好)를 우리가 자세히 보면
여기 머리의 정상(頂上)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미타불과 둘이 아닌 아미타불의 자비란 뜻입니다.
아미타불은 또 무슨 뜻인가.
아미타불은 우리가 소박하게 방편설(方便設)로 해서는
저 십만억 불토(佛土) 밖에 있는 극락세계의 교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씀한데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은 같은 경전(經典) 내에도
방편(方便)을 떠난 진실(眞實)한 말씀도 있고,
또 진실한 말씀을 방편으로 잠시간 말씀한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들은 일차 방편으로 해서 쉽게 알아서
거기에 들어 갈 수는 있다 하더라도
종당(終當)에는 방편을 버리고 진실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도 방편으로 말할 때는
저 십만억 불토 밖에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의 교주(敎主)라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극락세계가 우리 사바세계(娑婆世界)를 떠나서
어디 저 하늘 공중(空中)에 있다고는 말씀 아니 했습니다.
극락세계가 무량무변(無量無邊)이라 끝도 갓도 없습니다.
끝도 갓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도 거기에 다 포함 되어야 하겠지요.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몸은 어떠한가.
아미타불의 몸은 육십 만억 나유타(那由他) 유순(由旬)이란 말입니다.
육십 만억 이라는 수(數)는 한도 끝도 없는 수(數)입니다.
유순(由旬)이나 나유타(那由他)는 수십억 한도 끝도 없는 수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몸이라는 것이
우리 사람 몸과 같이 국한적으로 공간적으로 이렇게 크고 작고하는 몸이 아니라
우주(宇宙)에 가득 차 있는 몸입니다.
바꿔서 말하면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입니다.

부처님 불경(佛經)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만 알아버리면 엉뚱한 오류(誤謬)를 범합니다.
그러한 무량무변한 뜻으로 새긴다면 모두가 다 진리(眞理)에 합당한 것입니다.
바로 우주(宇宙)가 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몸입니다.
그리고 아미타불이라는 것도 또 뜻으로 해석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목숨 수(壽)자, 수명(壽命)이 끝도 갓도 없습니다.
따라서 영생(永生)의 생명(生命)이라는 뜻이 되겠지요.
부처라는 것은 결국은 생명이라는 말이므로,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빛은 바로 지혜를 말하는 것이므로
그 지혜의 빛이 끝도 갓도 없이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해서
온 우주를 감싸고 있습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것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 보면

그 생명(生命)이 끝도 갓도 없다고 해서 무량수불(無量壽佛),

광명(光明)이 한없이 비추인다고 그래서 무량광불(無量光佛),
또는 상대(相對)할 수 없다고 해서 무대광불(無對光佛),
또는 갓도 없다고 그래서 무변광불(無邊光佛),
또는 청정(淸淨)하다고 그래서 청정광불(淸淨光佛),
이렇게 모든 이름이 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나 조사(祖師)스님들께서 우리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고구정녕(苦口煗娡)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하나의 것에만 집착(執着)해 가지고서
거기에 딱 국집(局執)해 버립니다.
그것은 왜 그러는 것인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智慧)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지혜(般若智慧)로 볼 때는 가상(假相), 가명(假名)은 원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가짜(夢-幻-泡-影)입니다.
가짜이므로 진짜로 본다면 있을 수가 없겠지요.
가짜에다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원래는 이름도 없습니다.

아! 저 같은 존재도 이제 과거에 청화(淸華)란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미래에 있겠습니까.
이 몸뚱아리가 이만큼 이렇게 나왔으므로
여기다가 임시(臨時)간 청화(淸華)라고 이름을 붙였단 말입니다.
따라서 몸뚱아리 이것도 역시 각 세포(細胞)가 모여서 진동(振動)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그것이 그대로 항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순간순간(瞬間瞬間) 변(變)하는 것입니다.

1년이나 2년이나 10년이 지나면 이제 주름살만 더 늘어나기 때문에
변화(變化)하는 것을 알 수가 있지만
우선 순간순간 사람들이 봐서는 잘 모릅니다.
분명히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며,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지금 없습니다.(諸行無常)
어느 순간(瞬間)도 같은 모습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순간(瞬間)도 어느 공간(空間)을 점유하고 있지 않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도 어느 공간에 없다고 생각할 때는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物理學的)인 도리(道理) 아닙니까.
따라서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 그대로 바로 공(空)이라, 분석(分析)한 뒤에 공(空)이 아니라
바른 눈으로 보면 우주의 정기(精氣)인 불성(佛性)의 차원에 보면
이대로 바로 공(空)입니다
.
이대로 공(空)이라고 생각해야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야심경 가지고도 충분히 깨닫는 것입니다.
나도 공, 너도 공, 색도 공, 소리도 공, 또는 맛도 공, 모두가 공입니다.
이것들이 원래 있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병(病)이 발생하여 아프다는 것도 본래는 공(空)입니다.
우리 육감(六感)이 바로 못 보아서 아프다고 하는 것이지
우리 육감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바로 본다면
내 몸뚱아리가 없거니 세포(細胞)도 원래 공(空)하거니 아픔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부르나 다 한도 끝도 없는 그런 실상(實相) 자리입니다.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고 해서 조금 못하고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없는 것이고,
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해서,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 좋고
또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라고 해서 더 낮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 보살(菩薩) 지위(地位)라는 것은
우리가 이(理)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원융무애(圓融無碍)하나의 진리(眞理)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을 좋아서 외운다 하더라도
다른 부처나 보살하고 원융무애하게 둘이 아니고
원만(圓滿)한 부처님의 성품(性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원만한 부처님의 성품(性品)자리,
우리 중생이 부처님의 그런 공덕 가운데서 중생의 영혼(靈魂)을
극락세계(極樂世界)로 인도하는 그 자리,
또는 우리 지구의 이 대류권 속에 갖추고 있는 부처님 공덕,
이것을 보고 지장보살(地藏菩薩) 그러는 것이지 따로 있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명호를 우선 그와 같이
절대로 구분을 세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른다 하더라도 다른 것도 거기에 다 들어 있고,
어떤 것이나 모두가 벌써 보살, 부처 자리를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원융무애(圓融無碍)라,
일즉다(一卽多)라, 하나 가운데 다(多)가 들어 있고,
다즉일(多卽一)이라,다(多) 가운데 하나가 들어 있습니다. (一卽多 多卽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