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

장백산-1 2011. 5. 8. 19:07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

청화스님 법문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요, 냇이요, 티끌이요, 또 원소요, 소립자요, 내내야 들어가면
결국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이것이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縱橫)으로 얽히고설키고
딱 묶여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맞게 살려고 하면 될 것인데 우리 중생은 앞서 말씀과 같이 겉만 본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줄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 있게 살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보니까 이놈의 모양만 보고, 자기 몸뚱이도 사실은 자기 것도 아닌데
권력이고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 도(道),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상(實相), 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에
주인공, 본래면목(本來面目), 진여(眞如), 극락(極樂)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다르고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경을 볼 때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나오고 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몰라버립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몰라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소박할 때는 그렇게 상만 말하는 법문이 다 통할 수가 있었으나,
지금 현대는 일반 철학은 물론 헤겔 철학이나 스피노자의 철학을 다 배웠기 때문에
그야말로-스피노자는 불교도 많이 공부했으므로 책을 보면 이거 부처님 말씀 같구나,
이렇게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라 그런 치우친 불교해설을 하면 잘 통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뜻도 그것이 아닌 것이고, 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지금 현대는
이것저것 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같은 수행법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이라.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공부라던가,
또 모두는 다 비었다. 다 비었다 하더라도 사실 중생들은 비었다는 것을 못 보니까
실감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은 너무나 허망하고 말입니다.
도인들이 보면 빈 가운데 다만 비어있지 않고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자리,
모두를 찬란스러운 불성으로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실상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아니라 텅 비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허무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은 별 것이 아니지만 내내야 마음 저변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같이 그런 고도한 법문이 아니면
우리 마음이 항시 안정을 못 취합니다.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있다고 해소 불안스럽고 텅 비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합니다.
전부가 다 부처다 이렇게 되어버려야 본래성품이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니 풍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가장 풍요해지는 행법 이와 같이 현상이나 실상이나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한 법문이 앞서 천태지의 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우주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달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 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이 개운한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어디가 아파도 우리 불성은 아프지 않고,
아파도 말뚱말뚱 불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이러한데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마음 두고 사는 것이 불교인의 생활이지요.

염불(念佛)도 결국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항시 부처를 염합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결국은 부처뿐인 것이니까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옛날의 방편염불은 부처님 그러면 저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준다 이런 식이지만,
사실 원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 보나 저것 보나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부처님을 염불하는 것입니다. 

출처 : 공덕총림 덕림회 법당
글쓴이 : 자양 원글보기
메모 : 청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