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장용창 님의 글
1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사람은 육체, 마음(생각, 에고), 하느님,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중에 “나는 하느님이다” 라는 것만 永遠한 眞理이고 나머지 셋은 모두 거짓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두고 저 세 가지 거짓에 속고 삽니다.
그래서 “이 몸이 나야, 이 생각이 나야, 또는 나는 누구의 누구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거짓말에서 벗어나 “나는 하느님이야” 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말하는 것, 그게 깨달음입니다.
간단하죠?
2. 깨달음의 수단: 불편한 감정에 대한 연구
불편한 감정들을 공부하는 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슬퍼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불편한 감정이 생길 때마다 “아싸! 신난다”라고 외치면 됩니다.
깨달음을 얻을 수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감정의 근원은 “하느님인 나”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에고(생각,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속성이 永遠不滅, 全知全能, 기쁨인 데 반해,
에고의 영원한 속성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자기자신만 보호, 두려움, 뭐 이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에고라는 이 귀여운 친구가 활동을 할 때마다 우리는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불편한 감정이 생길 땐, 그냥 “어 또 이 에고라는 친구가 발작하는구만”이라고 말하면서 느긋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으면 됩니다. 단, 행동은 다릅니다. 우리는 행동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고의
명령을 따를지 하느님의명령을 따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은 에고의 발작을
그냥 구경만 하고, 행동할 때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3. 첫번째 착각(錯覺)---몸
위에서 세 가지 착각을 말씀 드렸는데, 인도에선 이런 착각을 아비댜(Avidya)라고 부릅니다.
비디야(Vidya)는
지식, 지혜라는 뜻인데, 여기에 부정형 접두어 A를 붙여서 Avidya가 되면 무지, 착각, 환상이라는 뜻이
됩니다.
요가에서는 인간 고통의 첫번째 원인이 바로 착각(avidya)이라고 하는데,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과 똑같은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임을 잊어버리고, 몸, 생각, 혹은 관계가 나라고 착각할 때 바로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인가요? 키가 작아서, 뚱뚱해서, 못 생겨서 괴로우신가요?
정말로? 몸은 고통의 원인이아닙니다.
고통의 원인은 “나는 키가 커야 해, 나는 예뻐야 해, 나는 날씬해야 해”라는 生覺이고, 이 생각은 바로
에고의 발작입니다. 심지어 “나는 건강해야 해”라는 생각도 에고의 발작이라서, 이런 생각도 고통을
줍니다.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 마치 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서 했던 말처럼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뚱뚱하지만 오케이, 못생겨도 괜찮아”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뚱뚱하지만 왜 괜찮을까요? 이 몸은 우리(하느님)가 입고 있는 옷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해 드디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신발을 벗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습니다.
남들이 신발 벗은 저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지만,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좋은 신발을 신든, 나쁜 신발을
신든,혹은 신발을 벗은 경우에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건강하건 말건,
키가 크건 말건, 나라는 사람의 본질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몸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4. 두번째 착각(錯覺)---생각(에고)
두번째 착각은 나의 생각을 나라고 믿는 것입니다. 두번째 착각은 세 가지 착각의 근원입니다.
착각은 에고의 속성이고, 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에고가 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에고는 지 맘대로입니다. 어제는 하늘이 파랗다고 생각하다가 오늘은 하늘이 희뿌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한번 일관되게 진실된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우리의 생각을 에고에게만 맡겨 버릴 때, 우리는 언제나, 사실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믿고 싶은 것을
믿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믿는 것이 사실과 달라질 때 바로 고통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바로 에고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이 에고의 발작임을 이해하는 순간, 즉, 깨달음을 얻는 순간, 고통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요가에선 생각을 원숭이에 비유합니다. 그것도 엉덩이에 불붙은 원숭이에 비유합니다. 이 놈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시로 날뛰기 때문입니다. 이 놈을 조용히 만드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가능한 것은,
그냥 이 놈이 노는 꼴을 구경하는 것입니다. 단, 이 놈 시키는 대로 따라 하지 마시고,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말이죠. 요가에서 하느님의 속성을 의식(awareness)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원숭이(생각)을 구경(의식)하는 존재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5. 깨달음은 단계적인가?
그런데 저런 단계적인 수련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파탄잘리는 성욕을
탐하지 말라는 계율을 기초단계로 제시했는데, 요가 수련 20년을 한 사람이 갑자기 어떤 여자를 보고
성욕이 생긴 것을 보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끼면서 20년 수행 말짱 도루묵이라고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고와 하느님의 동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착각입니다.
에고와 하느님은 이 몸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함께 지냅니다. 그러므로 에고의 속성인
욕망의 발작이 죽을 때까지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임을 알고, 에고를 구경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에고가 완전히 소멸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혼동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은 에고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도 에고는 생물학적인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함께 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단계적인가요? 저는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말이 이 현상을 잘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오, 즉, 깨달음은 갑자기 나타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점수, 점차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는 깨달음은 어느날 갑자기 여러분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그 즉시 완벽한 평화가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 후로도 에고가 활동할 때마다 감정이 느껴질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활동하는 에고를 구경하면서 자신을 더욱 더 잘 이해하는 것,
자신은 지금 날뛰는 생각이라는 에고가 아니라, 그 생각을 구경하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
그게 깨달음입니다.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주 괜찮은 명상 연습방법과 명상 음악 (0) | 2011.12.28 |
---|---|
冥想의 原理 !!! (0) | 2011.12.28 |
참나 (0) | 2011.12.26 |
[스크랩] 제20강 최한기와 니체 (0) | 2011.12.26 |
[스크랩] 제19강 기(氣)와 과학 (0) | 2011.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