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세계는 6근과 6경의
상호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감각기관으로 외부 대상과의 접촉으로,
외부 대상은 감각기관을 통과할 때
비로소 각각의 존재가 성립하기 때문에
눈이 눈을 보게 된다면 눈에는 보는 능력과
보이는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더 이상 '눈' 일 수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6근과 6경을 대입한 결과
'나' 의 부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 이다.
12처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에 입각하여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세부적으로 분류한 것이라면,
우리들은 눈으로 색과 형상을 알아차리고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 의 작용이 있다.
이 마음의 작용이란 6경을 6근으로 받아들인 것,
즉 감각과 지각의 내용을 알아차리는 주도자이며
6근과 6경이 접촉한 여섯 가지 인식을 말한다.
눈을 통해 색(色)과 형상이 들어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귀로 들어온 소리로 알아차리는 이식(耳識),
코를 통해 냄새가 들어오면 알아차리는 비식(鼻識),
혀를 통해 맛으로 알아차리는 설식(舌識),
몸을 통해 접촉해서 알아차리는 신식(身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의식(意識)이라는
6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6근, 6경과 마찬가지로 6식 또한
인간의 감각작용에 의한 의식작용의 구조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18계(界)라는
'일체' 의 요소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섯 개의 창문' 은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
여섯 개의 창문이 있는 방에
한 마리의 원숭이를 넣어 두면
원숭이는 한시도 가만히 않는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숨고,
다른 창문에 얼굴을 내밀거나 또 같은
창문으로 얼굴을 내미는 동작을 되풀이한다.
여섯 개의 창문은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을,
한 마리의 원숭이는 각각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마음의 작용에 비유한 것이다.
창 밖에 쌓인 흰 눈을 보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지만,
뽀드득 뽀드득 눈길을 달리며
차가운 눈을 뭉치는
생각을 하는 '마음' 의 작용이다.
우리는 6개의 창을 가진 방은 인간의 몸이고,
창 문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원숭이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인
인간을 나타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를 여섯 가지 마음의 작용을
복합적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주체
혹은 객체로서의 '자아(나)' 를
연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생각했다면 자아는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6근의 지각기관인 '마음' 과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인 '법' 을
이미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을 비롯한 12처, 18계의 이론은
'자아' 는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제시 된 것이다.
자아가 눈을 비롯한 육근에 있지도 않고,
외부 대상도 아니며,
6가지 인식의 한 부분에도 속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6근의 '마음' 과 12처의 '법',
8계의 '의식' 각각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따르지 않으면
이 물음은 끝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관세음보살
[글 : 양경인 불광교육원 연구원 / 불교신문 자료 발췌 (감사합니다)]
'가장 행복한 공부' 無量光明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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