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법인의 내용은 경전별로 다소의 차이를 보이는데,
그 차이는 바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는 경우이다.
경전상에서는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
더 일반적인 용례로 나온다.
여기에 일체개고를 덧붙여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담마빠다>에서는 일체개고를 넣어
삼법인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어,
필자는 이에 따르고자 한다.
그 이유를 간단히 밝히면,
불교의 출발은 '苦(고통, dukkha)' 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호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현실인식의 결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의
실상을 고통이 가득 찬 세상이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고통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초월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그 결과로서
'열반(nibba-na, 涅槃)' 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지혜 갖고 관할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담마빠다>에서 일체개고는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모든 형성된 것은 고통이다' (일체개고)라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8게송. '테라가타' 제677게송)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에 대해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에 이를 수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고통을 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숫따니빠따> 724게송에서 727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통을 알지 못하고,
또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고통이 남김없이 사라진 것도,
또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숫따니빠따> 제724게송)
그들은 마음의 해탈이 없고,
또 지혜의 해탈이 없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 없다.
그들은 참으로 나고 늙음을 받는다.
(<숫따니빠따> 제725게송)
그러나 고통을 알고,
또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또 고통이 남김없이 멸하는 것을 알고,
또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아는 사람들
(<숫따니빠따> 제726게송)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구현하고,
또 지혜의 해탈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 있다.
그들은 나고 늙음을 받지 않는다.
(<숫따니빠따> 제727게송)
부처님이 고통을 강조하신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추구해야 할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일체개고의 가르침은 사실은
고통에 방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해탈에 방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고통을 보지 못하면
해탈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상의학의 체계를 세운 동무 이제마(1837~1900)는
"낮을 보지 않으면 밤에 대해 알 수 없고......
진실을 보지 못하면 거짓에 대해
알 수 없다." 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이 고통을 강조한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관세음보살
[글 : 이필원 박사 동국대 강사 (감사합니다) / 불교신문 자료 발췌]
'가장 행복한 공부' 無量光明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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