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아함경 이야기 37 - 불교교리 12 - 삼법인에 대해서 3 - 제법무아

장백산-1 2013. 6. 7. 01:34

아함경 이야기 - 불교교리 12

삼법인(三法印) 대해서 3 제법무아(諸法無我)

 

무아(無我, anattā)

 

먼저 스리랑카 실론대학의 위제세케라 교수님의 글을 소개한다.

 

무상과 불만족성이라는 두 법인에 대해 이상과 같이 논의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무아(無我)’ 혹은 무실체성(無實體性)’이라는 불교의 기본적 개념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개념은 불교의 모든 기본적 사상 가운데서 가장 말썽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는 것이며, 수많은 주석가나 학자, 비판자들에 의해 구구한 해석이 전개되어 왔다. 서양의 불교학도들에겐 이른바 무아설(無我說)’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창의력과 번쇄한 변증능력을 과시하는 절호의 기회로 이용되어 왔지만,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들 사이에서나 심지어는 동일 저자의 여러 저작 속에서도 첨예한 모순을 노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적 불교권의 여러 학파간에서도 이 개념은 난제 중의 난제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이들 해석자들이 가장 애를 먹게 되는 주된 원인은 자아(attā)’ 라는 낱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결여하고 있는 탓이 아닐까 한다. 사실 저술가들이, 특히 서양의 저술가들이 아따(자아)’에 대하여 별다른 개념정의도 갖추지 않은 채 단지 불교연구에 착수하기 이전에 그들에게 익숙한 유신론적 혹은 범신론적인 철학이나 종교체계로부터 빌어온 영혼이니 에고니 하는 개념만으로 무장한 채 무아설에 대한 논의로 뛰어든다는 것부터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선 그러한 해석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없으며, 다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강조하고자 할뿐이다. , 남방경전에 나오는 자아(attā)’라는 말은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 성행하던 여러 가지 역사적인 개념들을 지시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말은 그러한 특수한 맥락을 검토하는 가운데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삼법인 중 세 번째로 모든 사물(一切法)의 보편적 특성(sabbe dhammā anattā)을 표현하여 안앗따(anattā)’라는 형용사가 사용된 맥락에 한정짓고자 한다.

 

앞의 호에서 모든 형성된 사물과 과정들의 무상성과 그리고 이들로부터 나온 이른바 오취온의 일반적 불만족성을 다루었으며 특히 후자에서는 쾌, 불쾌, 불쾌도 쾌도 아닌 셋으로 나뉘는 감정이나 느낌을 다루었다. 그리고 일반적 불만족성()이라는 두 번째 특성은 무상성이라는 첫 번째 특성으로부터 직접 도출되는 것임을 밝히고자 관련된 경문을 인용하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어떻게 모든 경험의 일반적 불만족성의 필연적 결과로서 삼법인의 세 번째 진리에 대한 자각, 즉 모든 물질적·정신적 상태와 현상의 보편적 특성이 바로 무아임을 깨닫게 되는가를 밝힐 계제가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비구들이여, 물질적 형태()는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어느 것이나 불만족스럽다. 불만족스러운 것은 무엇이건 무아이다. 그리고 무아인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똑같이 정밀한 논리가 개체를 이루는 다른 제 가지 부류, 즉 느낌과 감수(), 인식과 지각(), 심리적 과정과 반사작용(), 마지막으로 개인의 의식자체()에도 차례로 적용된다. 특히 무아의 보편적 특성을 마지막으로 의식에 적용한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이 설명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이룬다. ‘viññāna(의식)’라는 빠알리어가 유정물의 가장 내면적인 심적 경험까지 포함한 것임을 상기한다면, 부처님께서 생각하셨던 무아의 특성이 어떻게 예외를 용납하지 않는 엄정한 구속력을 지닌 개념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부처님 이전이건 이후이건 철학자들이 생각해낸 가장 세련된 자아 혹은 에고라는 개념은 어떤 식으로건 또 어떤 점에서건 자의식, 나는 나이다라는 의식 상태와 관련된 것이었다. 부처님의 경우 이 자의식 또는 나라는 생각조차도 무상성과 불만족성이라는 불가항력적 특성에서 예외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이 특성들에 지배되는 것은 무엇이건 무아이므로, 의식은 환상 혹은 오류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형용사 무아(anattā)'의 중요한 의미이다.

중부 의 여섯의 여섯 경(六六經, 148) 에 이 개념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나온다.

 

만일 혹자가 눈(보는 작용)을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눈이 생하고 멸하는 것은 경험적으로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의 생멸이 확실한 이상 눈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자아가 생멸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므로 눈을 자아로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눈은 무아임이 증명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혹자가 형상(색 또는 보여 지는 대상)을 자아라고 한다면 그것 도한 똑같은 이유로 옳지 않다. 그러므로 눈과 그 눈이 인지한 형상 모두가 무아이다. 똑같은 논리가 시각적 의식(眼識)에도 (만일 이것을 자아라고 여긴다면) 적용되며, 다시 시각적 접촉(眼觸)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 그 대상인 형색,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이 모두 무아이다. 그것은 또한 이상의 넷으로부터 일어나는느낌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 그 대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 그 결과적 느낌, 이 다섯 가지가 모두 무아이다. 그것은 또한 마지막으로 이상의 다섯과 연결된(본능적) 욕망(tañhā)에도 적용된다. 그러므로 눈과 그 대상, 시각적 의식, 시각적 접촉 그로 인한 느낌 그리고 마지막으로 욕망, 이 여섯 가지 모두가 무아이다.

그리고 눈, 또는 안근(眼根)에 적용된 것이 똑같이 다른 다섯 감관 [마지막 것은 감각기관으로서의 마음(mano, )이다]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마음이 자아라고 말해도 그 또한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마음(), 혹은 그 대상(dhamma, ), 의식(意識), 심적 접촉(意觸), 느낌, 이 모든 것과 연결된 욕망이 자아라고 하는 주장도 허용될 수 없다. 그들 모두는 무아이다. 이 무아인 것들을 놓고 이것이 나의 것이다’ ‘나는 이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영구적 개체성, 혹은 인격체의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구적 인격체라는 견해를 지멸(止滅)시키는 길은 보기, 듣기, 냄새 맡기, 맛보기, 몸으로 접촉하기, 생각하기 그리고 그들에 부수되는 현상을 나의 것으로 간주함을 멈추는 일이다.

이어서 부처님은 자아 혹은 영구적 인격체(sakkāya, 有身)라는 견해의 윤리적 의미를 논의하신다.

 

눈과 시각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시각적 의식이 일어나며, 이 셋 모두의 만남이 접촉이다. 그 접촉으로부터 느낌이 일어나며, 그것엔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덤덤한 느낌이 있다. 사람은 즐거운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그것을 반기고, 환호하고 움켜잡으며 열정적 경향(집착)을 일으킨다. 또 불유쾌한 느낌을 경험할 때는 괴로워하고, 불행을 느끼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비통해하며, 혐오감을 일으킨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을 경험할 때에는 그 느낌의 발생, 소멸, 쾌적, 위험, 가져올 결과 등에 대해 참다운 인과적 이해를 갖지 못하여, 그로 인해 일종의 무지적 경향이 생겨난다. 따라서 먼저 쾌락적 감정의 열정적 경향을 버리지 않고선, 또 불쾌한 감정의 혐오적 경향을 버리지 않고선, 중립적 감정의 무지적 경향을 피하지 않고선, 무지를 버리지 않고선, 그래서 고가 일어나는 것을 발생과정에서 중단시키지 않고서는 고()를 지금 여기서 종식시키는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시각에 대하여 타당한 것이 나머지 다섯 감각에 대해서도 똑같이 타당하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완전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개체(名色)의 전 발생과정을 관()함으로써 자아 혹은 영속적인 인격체의 개념을 분석하고 나아가서 이 그릇된 오류를 발생시키는 원천인 경험 전체를 그 구성부분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말고 세밀하게 분석토록 제자들에게 훈계하신다.

 

이상의 서술에서 무상, , 무아의 세 개념, 즉 삼법인이 불교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밑받침하는 세 주춧돌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삼법인의 타당성을 확신하게 되면 이는 곧 불법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되며, 따라서 이 확신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는 어중간한 타협점이 있을 수 없다. 불교도를 자칭하는 사람이며, 누구나 주관적·객관적 양면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 세계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해 깊이 숙고해보는 것이 마땅하며, 또 세존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그러한 확신으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적 원리를 우리 자신과 사회생활에 적용하여, 마침내 이 세 가지 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열반의 영원한 희열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위제세케라 교수님의 글은 초보 불자들이 이해하기에 좀 난해해 보인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고, 인간들의 의식이 낮았던 시기에 부처님이 이 무상, , 무아를 설명하려 할 때 참으로 난처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좀 더 쉽게 접근해 보자. 이 우주가 375억 년 전에 빅뱅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이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우주에 살아가는 우리 생명체는 변화 할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으면 자랄 수 없고, 생각이란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물리, 화학적 변화들이다. 우리 정신현상도 끊임없이 변하는 뉴런(뇌신경)들의 변화로 인해 느낌, 지각, 의지, 의식 등의 마음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諸行無常)

다음으로 무상한 것은 물질 쪽으로 보면 불안정하고 인간의 내면으로 보아서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원래 그렇다.(一切皆苦)

나의 것이라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의 현상과 우리 육체, 그리고 정신현상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諸法無我)

부처님이 이야기 하는 이 나(, attā)라는 개념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개념과 차이가 있다. 이는 당시 인도 바라문들이 생각한 영원한 자아(빠알리어 attā, 산스크리트어 atman)을 말한다. 당시 바라문들은 전변설(轉變說, 창조신인 브라흐만이 자신을 변화시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설)을 믿고 신의 성품이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아트만이라고 하고 중국에서 아()로 번역했다. 이 아트만이 브라흐만(梵天)과 동일하다(梵我一如)는 사상으로 발전하고 이 아트만을 찾아 합일하려는 수행인 요가수행을 인간 최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학파에서는 이 아트만이 물질적인 업에 의해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이 업을 떨쳐내면 본질적인 아트만이 그 빛을 찾고 신의 나라에서 영생하게 된다고 생각하고 고행을 강조했다. 이처럼 아트만을 찾아 신과 합일하여 영생하려는 것이 인도 바라문사상의 요점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출가하여 이들이 말하는 요가수행을 다 해 보았고, 또한 고행도 6년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영원한 자아인 아트만은 없었다. 그래서 심기일전하여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신다. 너희들이 말하는 아트만은 없다(無我)라고.

다른 예로 보면 안근(眼根, 눈과 시신경)은 물질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한다. 또한 안근의 대상이 색경(色境, 시각대상)도 물질이므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 안근과 색경이 접촉하면 그 가운데에 안식(眼識, 본다는 인식의 마음)이 생긴다. 변화하는 두 조건을 통해 형성된 보는 마음도 결국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곳에서도 영원한 자아를 상정할 수 없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 이다.(18계도 동일하다)

부처님은 변화하는 나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진화론으로 보면 인간은 진화하면서 생존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필요에 의해 자아라는 관념이 만들어졌다. 인간의 뇌는 기억을 통해 자기 영속성을 지속시키는 시스템으로 발전했고 그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기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진화의 한 예이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나 치매 등으로 인해 자아라는 관념을 만들어 주는 뉴런이 손상을 입으면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한다. 또한 술, 마약, 정신착란으로 인해 잠깐씩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간단한 예로부터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다만 임시적인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 허망한 자아를 위해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고 심지어는 살인하고, 사기치고, 패악을 저지르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은 연기로 이루어져 다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허망한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은 더욱더 혼탁해 지는 것이다. 역사를 보라. 모든 것이 다 이 아상(我相)의 역사가 아닌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공()은 곧 사랑이다. 우리 몸의 각 세포가 자신이 살려면 몸의 모든 시스템에 협조해 공생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들도 지구를 한 몸이라고 생각하고 각자가 하나의 세포처럼 서로 이해, 배려, 용서, 감사, 연민, 소통, 평등하게 보는 무한자비(無限慈悲),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만 살려고 하다 결국 전체가 죽어 버리는 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옥련암
글쓴이 : 산빛노을(원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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