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아함경이야기 38 - 불교교리 13 - 삼법인에 대해서 4 - 무아와 공에 대해서

장백산-1 2013. 6. 7. 01:36

아함경 이야기 - 불교교리 13


무아(無我)와 공(空)에 대해서


세계의 종교나 사상사 가운데 무아와 공(空, śūnya)을 설하는 것은 불교뿐일 것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타종교는 나라는 것을 실체시 하고 그것이 영생을 받는다든지 또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는 식으로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어떤 존재도 연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없고(무상), 그것을 그렇다고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고통을 유발하며(苦), 그렇게 무상이고 고이기 때문에 일체 존재는 정신적 물질적인 측면에서 나와 나의 것이라는 관념이 성립할 수 없다(無我)고 한다. 이것이 불교만이 가지는 독특한 입장이며 이러한 사상만이 불교를 불교답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함경》에서 가장 많이 설해진 교설이 무상·고·무아에 관한 것이며, 이 셋은 대부분 함께 사용되고 있다. 즉 일체가 ‘무상이다’, ‘고이다’, ‘무아이다’라는 식으로 3개의 명제가 병렬적으로 서술되거나, 또는 ‘무상이다. 무상인 것은 고이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라고 설해지기고 한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체는 시간과 함께 변화하여 영원한 것이 없는 것이다. ② 그것을 그렇다고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체가 고(dukkha, 苦)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③ 그렇게 일체가 무상이고 고이기 때문에 상주불변(常主不變)하는 아(我, 나)라는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나와 내 것이라는 관념도 성립되지 않는다.


어떤 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의 생각은 허망(虛妄)하기 때문이다. 지나가 버리는 것은 허망(虛妄)한 것이므로..

((《숫타니파타》 757) 


위 경문에서 “모든 것은 허망(無常)하다는 것은 모든 것은 영원하고 고정적인 실체를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즉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했다가 변하고, 소멸하는 것으로 자기 동일성을 유지 할 수 있는 영원불변한 본질 내지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물의 존재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변, 불멸의 영원한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Anicca, 無常)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위빠사나)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오온)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둑카(Dukkha, 苦)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대해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 “비구들이여,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쌓임(五蘊), 즉 色, 受, 想, 行, 識은 모두 고통스러운 것이며, 어느 한 순간에도 만족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오온은 둑카이니라.”


모든 담마에는 자아(안앗따, Anatta, 無我)가 없다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대하여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법구경》 277~289)


다음으로 공(空)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초기경전에서는 대승불교 기본용어가 되어 버린 공에 대해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살펴보면 대승불교의 공의 뜻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용수보살(나가르쥬나)은 초기경전에서 공의 의미를 찾아 대승불교의 핵심교리로 만든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에 대승불교이야기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초기경전에서 나타난 공의 의미를 그 쓰임에 따라 분류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공옥(空屋), 공수(空樹, 공한수하(空閑樹下) 등과 같이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에서 비어 있음을 지칭하는 경우, ② 공삼매(空三昧), 공처정(空處定), 공주(空住)와 같이 선정의 단계로서 사용된 경우, ③ 《第一義空經》 에서와 같이 궁극적인 진리(眞諦, 勝義諦, 第一義諦)를 가리키는 경우, ④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고 보는 공관(空觀)의 의미로서 이다. 그렇지만 어느 경우를 불문하고 공통된 그 근본 취지는 고정적인 실체를 부정하는 데 있다. 즉 원시불교에서 공의 용도는 ④의 경우와 같이 주로 공관(空觀)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다른 세 가지 경우는 이와 같은 공관에 바탕을 두고 부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후에 나가르쥬나(용수)는 ③과 ④의 의미를 더욱 발전시켜 공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하였다. 즉 ③의 의미를 발전시켜 세속제(世俗諦, 俗諦)와 승의제(勝義諦, 眞諦, 第一義諦)라는 ‘이제적(二諦的) 진리관’을 완성하며, ④의 공관을 토대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종합한다.


부처님 당시까지만 하여도 인도 철학의 주된 흐름은 궁극적인 실재로서 아뜨만(ātman, 영원한 자아)과 같은 실체를 인정하여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였다. 이른바 전변설(轉變說)과 같은 이론은 세계의 변화의 기저에 영원한 고정적인 실체를 상정함으로써 나타난 이론이다. 전변설은 이 우주의 유일실재신인 브라만(梵, Brahman)이 자신을 변화시켜 이 우주를 탄생시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인 아트만 속에도 영원한 실재인 신성(神性)이 들어 있다는 설이다.


부처님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고서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말미암아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설로서 세계의 원리를 설명하였다. 세속법으로서는 엄연히 존재하지만(세속제) 최고의 진실의 입장(승의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러한 가르침이 바로 ‘제일의공(第一義空)’으로서 최고의 가르침이다. 


무화과 나무 숲에서는 꽃을 찾아도 얻을 수 없듯이, 모든 생존 중에서 영원한 것을 보지 않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이. 

(《숫타니파타》 5)


위 경문에서 ‘영원한 것’이란 본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실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생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활방식, 생존의 존재방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생존에 ‘영원한 것이 없다’라는 것은 그것이 바로 공(空)이라는 것이다. 즉 영원한 실체에 대한 부정은 곧 이 세상을 공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경전에서는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무아요, 공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세간은 공이다.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떤 점에서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난다여,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것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한다.

세존이시여,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것이 공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아난다여, 눈(眼根)이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것은 공한 것이다. 제색(諸色, 色境)이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것은 공한 것이다. 안식(眼識)이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것은 공한 것이다. 안촉(眼觸)이 나 혹은 나의 것이라는 것은 공한 것이다. … 이, 비, 설, 신, 의가 … 의촉(意觸)을 인연해 생하는 즐겁고, 고통스럽고, 즐겁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는 것을 받는 것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공한 것이다. 아난다여, 나 혹은 나의 것이란 공한 것이기 때문에 “세간은 공이다”라고 말한다. (《상응부경전》 4)


부처님은 세간이 공하다는 것은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 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 혹은 나의 것이 공하다는 것은 6근·6경·6식·6촉·6수의 하나하나가 다 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는 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 혹은 나의 것이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세간이 공하다는 것은 고정 불변한 영원한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는 것이다.

다시 설명해 보면 주관인 6근(뇌와 그 기관)은 항상 변하는 것이다. 또한 객관세계인 6경도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6근과 6경이 만나 6식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때문에 인식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변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아요 공인 것이다.  


계를 구족한 비구들은 오취온(五取蘊 , 五蘊, 나)을 무상으로서, 고(苦)로서, 병으로서, 옹(옹癰, 악창)으로서, 척산(刺箭 화살이 박힌 듯)으로서, 고통으로서, 질병으로서, 적으로서, 파멸로서, 공(空)으로서, 무아(無我)로서 여실(如實)히 생각하여야 한다. (《상응부경전》 3)


여기서 오온(五蘊, 나)은 부정되어야 할 존재로서, 가장 비판적인 용어로서 서술되고 있다. 즉 오온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하여 실재에 대하여 그 무엇을 말할지라도 그것은 언어일 따름이며, 언어 관습의 표현일 뿐이다. 언어가 실재가 아니듯이 언어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 역시 실재하지 않는 공이다. 모든 존재는 단지 이름뿐이며 실재하지 않는 언설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를 공이요 불가득(不可得)이며 환과 같고 꿈과 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진실의 눈을 뜰 때 일체의 집착을 떠난 대자유의 행복한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부처님을 가르치고 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생각 바꾸어 진실에 눈을 뜨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해 해 보면 무아의 근거가 고이고, 고의 근거가 무상이며, 무상의 근거가 연기이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연기=무상, 고, 무아 = 공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이 공식이 불교 모든 교리의 기본적인 공식이 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즉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에 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집착심이 원인이다. 부처님은 이 이기심을 극복하지 않는 한 자신의 행복도 이 지구의 행복도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개인적 이기심, 집단적 이기심, 사회적 이기심, 국가적 이기심, 생태적 이기심들이 난무해 지구는 엄청난 재앙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하루 빨리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기심을 극복하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아름다운 마음인 사랑, 자비, 연민, 관용, 용서, 평등, 평화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출처 : 옥련암
글쓴이 : 산빛노을(원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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