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수도 은행원도 백정도 각각의 환경에 맞는 새로운 화두가 필요하다 이것을 ‘새말귀’라 명명 만약 운전수가 자동차를 잘 운전하겠다는 생각만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새말귀’ 일 할 때 열심히 일하고 참선할 때 다 놓아야
또 이전과도 달라야 돼. 예를 들어서 화두도 스님네들이 가지고 있지 보통 사람들이 가지면 안 된다 말이여. 그건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돼. 이거 맞지 않습니까?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돼. 운전수가 화두 가지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안돼. 안 된다면 운전수는 말이지 중생 아닌가? 은행에 다니는 사람 화두 가지면 되겠습니까?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은 수판 놔야 되거든. 그러면 그 사람들은 말이지 중생 아닌가? 그 사람들은 인생문제 해결하지 말라는 법 있나요? 이러하기 때문에 화두는 불변의 이치인데, 가져야 되지만, 그 중생 근기에 따라서 중생들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이 方便이 새로 서야 됩니다. 나 이걸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말귀가 나온 겁니다. 새말귀라. 새 신(新)자. 신화두(新話頭)라 그 말입니다. 화두라 하는 것은 말귀입니다. 처음에 내가 새말귀라고 하니까, 화두라고 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내 한국에 인연을 받았습니다. 인연을 받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말을 갖다 써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말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새말귀라고 하면 통합니다. 운전수도 은행에 다니는 사람도 소를 잡는 사람도 말을 잡는 사람도 장사를 하는 사람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선지식의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전 화두 좋습니다. 스님네들로서는 가장 적당합니다. 왜 그러느냐. 화두는 변소에 가서도 화두를 놓는 법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스님네들은 만족해. 그걸 거부할 필요가 없어. 좋아. 그러나 신도들은 가질 수가 없어. 그런데 이걸 갖다 구태의연하게 신도들을 스님네들 취급을 하고 있다 말입니다. 그거 됩니까? 택도 없습니다. 그건 어딘가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겁니다. 성불이라는 말마디는 하나이지만 우리가 성불하는 길은, 거기에 올라가는 길은 천 가닥 만 가닥 되는 겁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결국 이런 얘기가 나왔는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운전수는 운전수로서의 화두가 있어야 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의 화두가 있어야 된다는 이건 명확한 일입니다. 그러면 새말귀란 뭣이냐? 이겁니다. 아까 말한 거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虛空性이라 말이지. 나무도 虛空性 산도 虛空性 물도 虛空性, 밉다 곱다 이것도 虛空性, 심지어 내 몸뚱어리 이것도 虛空性, 이러한 바탕을 알아야 됩니다. 이 바탕을 알기는 조금 시일이 걸리지만 알기가 수월합니다. 다시 말하면 絶對性 자리를 알아야 돼. 絶對性 자리. 그러니까 몸은 相對性이다. 몸은 相對性인데 이건 自體性이 없다. 내가 이걸 가져도 손은 이걸 가진 줄 모릅니다. 내가 알지. 내가 안다면 내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거 아닙니다. 손에 自體性이 없거든. 이걸 確實히 알아버려야 돼. 우리가 어디 걸어다녀. 어디 걸어가. 발에 自體性이 없는 거예요. 발은 모르는 거예요. 발 뿐 아니라 몸뚱이 自體는 모르는 거예요. 아는 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가 아는 겁니다. 그러하니까 이러한 道理를 내가 알아. 이 道理를 알고 손을 움직거립니다. “손을 움직거려서 뭘 걷어잡는다, 눈으로 뭣을 본다, 귀로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 내 性稟 자리, 내 法身 자리, 이 자리가 그리 하는 거다” 요걸 알아야 됩니다. 이걸 알면 이 화두가 곧 잡혀. 그러기 때문에 운전수도 돼. 왜 그러냐면 운전수는 핸들을 잡고 있지만 핸들 잡은 손은 이거 無情物이다 아무 自體性이 없다.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이 자리가 이 내 손을 시켜서 핸들을 쥐고 있다, 운전수가 이걸 알아야 되거든요. 그럼 “나는 注意해서 運轉을 하겠다 하면, 요 손발을 가지고서 注意해서 운전을 하겠다 하면,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그 자리가 注意해서 운전을 하겠다.” 그리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손이나 발로 기계를 밟고 손으로 핸들을 가졌다 말이죠. 그러나 손이나 발은 몰라. 다만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내 性稟이 이 손으로 하여금 기계를 돌려. 그러니까 나는 기계를 잘 돌리겠다. 어찌하겠다. 이 生覺만 놓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話頭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거 내가 만들어 놓은 화두에요. 요걸 새말귀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 아침에 집을 나갈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 내가 自體性이 없는, 우리의 몸은 無情物이거든요, 自體性이 없는 몸뚱이를 끄집고 나가서 오늘 일 잘 하겠다 이런 生覺으로 나가. 또 일 다 마치면 自體性이 없는 이 몸뚱이를 끌고 나는 집에 들어간다. 結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요게 중심이 되는 거라. 그래서 앉아. 참선을 해. 그러면 나중에 이거 다 놔야 됩니다. 다 놓아야 되지만 우선 처음에는 나는 非明非暗,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닌 이 자리를 나는 보리라. 왜 그러느냐. 환해. 이것도 본래 밝은 것이 아니여. 또 어두우면 캄캄해. 이거도 본래 어두운 것이 아니여. 비명, 밝은 것도 아니고 비암,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밝은 것이 보여. 밝은 것도 아니고 어두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보여. 그런데 이 말이 조금 이해하기가 곤란하지. <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