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 정주영의 돼지몰이론 - 빈대론
동아일보 입력2014.12.24 03:04
2015년은 한국 기업사(史)에서 큰 의미가 있는 해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소 판 돈을 들고 야반도주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 한국 최고의
기업가로 성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이자 역사이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은 세계 5위의
자동차그룹도, 세계 최대의 조선그룹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한국이 전 세계에 자랑하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 대부분이 불모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천광암 산업부장
내년 경제가 어려울 것이라는 잿빛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건설과 조선업종의 대기업들은 분기당 수천억 원에서
최고 2조 원에 이르는 부실을 털어내느라 여념이 없다. 화학과 유화업종은 중국 특수(特需)가 꺼지면서 구조적
불황으로 빠져들 조짐을 보인다. 투자와 소비 어느 것 하나 온기가 도는 곳이 없다. 이처럼 어려운 때이기에
좌절과 포기를 몰랐던 정 회장의 일생은 종전보다 훨씬 더 값진 교훈을 던진다.
1996년 스웨덴의 경제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정 회장을 추천한 적이 있다. '대학교는커녕
중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사람에게 노벨경제학상이 웬 말이냐'고 웃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정 회장의 '돼지몰이론'과 '빈대론'은 지금의 한국 경제에 어떤 고급 경제이론보다도 훌륭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 회장은 '固定觀念'과 '적당히 주의'를 무엇보다 싫어했다.
그가 유조선을 가라앉히는 기막힌 아이디어로 서산 천수만 물막이 공사를 성공시키고 미포만 갯벌 사진 한 장으로 그리스에서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한 것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 "고정관념이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이 역(逆)發想을 강조한 정 회장의 '돼지몰이론'이다. 돼지를 우리에서 내몰 때는 앞에서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꼬리를 잡아당겨야 한다는 것이다.
돼지몰이론은 시장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경비 절감에만 매달리는 기업들도 귀담아들어야겠지만,
그보다는 정치권이나 정부가 더 뼈아프게 새겨야 할 이야기다. 세금을 많이 걷기 위해 법인세를 올리자거나,
기업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내부유보금에 과세를 하는 등의 발상이 모두 앞에서 돼지 귀를 잡아당기는 행동이다.
다음으로, 정 회장이 '적당히 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평소 강조했던 것은 '빈대론'이다. 빈대론은 정 회장이 인천 부두에서 막노동을 할 때 직접 겪었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정 회장은 잠을 자는 동안 빈대에게 물어뜯기지 않기 위해 갖은 꾀를 낸 끝에, 밥상 다리 네 개를 물이 담긴 큰 그릇 4개에 담그고 밥상 위에서 잠을 잤다. 빈대 입장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해자(垓字)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빈대의 공격이 재개됐다. 빈대들은 밥상 다리를 기어오를 수
없게 되자,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서 사람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고공침투'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정 회장은 빈대론을 이야기 할 때마다 이렇게 덧붙였다.
"찾지 않으니까 길이 없는 것이다. 빈대처럼 必死的인 努力을 안 하니까 방법이 안 보이는 것이다."
우리 기업들도 더이상 "투자할 곳이 없다", "미래의 먹거리가 안 보인다"고 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자문(自問)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해보기는 했어? 빈대만큼이라도…."
천광암 산업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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