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자리 / 혜민스님
유당2016.05.28. 09:08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v0h/6067
작년에 어느 큰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 어느 비구니 스님께서 친견하는 큰스님을 앞에 두고는 “큰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즉 그 비구니 스님은 큰스님께 깨달음의 자리,
즉 부처자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禪問答 삼아 여쭈어 본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答으로 큰스님께서
는 주장자로 바닥을 한번 쿵하고 때리셨는데, 선문답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答이 저런가
그랬을 것이다.
우리 佛子들은 조석으로 예불을 할때 佛像을 향해서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佛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부처像(佛像)은 단지 부처자리를 밖으로 나타낸 象徵일 뿐이지 그 비구니 스님께서 궁금해 하신 깨달음의
자리 즉, 부처자리가 단지 겉으로 드러난 상징적인 佛像에만 局限 된 것은 아니라는 事實을 금방 알것이다.
그러기에 金剛經에서도 상相으로써 부처(佛, 如來)를 보려고 하면 부처를 볼수 없다고 그랬고, 善知識이신
큰 스님을 앞에 두고도 큰 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수행자들이 그토록 到達하고 싶은 깨달음의 자리, 부처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事實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토록 到達하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부처의 자리에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단 한번도 떠나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수행자가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목표 삼아 열심히
수행 하더라도 종국에 가서 깨닫는 것은 우리는 본래부터 이미 벌써 부처의 자리, 깨달음의 자리에 도달
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부처의 자리, 깨달음의 자리, 그 자리에서 이 세상을 보면 세상 도처가 다
부처 자리고 깨달음의 자리이며, 이 세상 모든 일이 다 부처가 하는 佛事, 佛供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 주면 친절하지 않다. 간절히 窮極, 부처자리, 깨달음의 자리를 묻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어떻게 항상 지금 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고, 이미 원하던 종착지에 벌써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래도 듣는 사람은 너무도 불친
철하게 느낄뿐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處處에 두루 존재하는 부처 자리를 어떻게 알수 있는지 부족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한번 해 보도록 하겠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는 가장 쉬운 말로 하면 “앎”이다. 예를 들어 깨닫기 위해 조용히 앉아 참선을
한다고 해 보자. 보통 가만히 앉아서 생각이 올라 왔을 때 위빠사나를 한다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을 바로 알아채거나, 數息觀을 한다면 다시 숨의 숫자를 세거나, 화두를 들고 있었
다면 생각을따라가지 말고 화두로 마음을 돌리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생각이 막 떠올랐을때 우리 안에
무언가가 “아! 지금 막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러면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아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인가? 아니면 생각 이전의 뭔가 다른 놈이
알아채는 것인가?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 무엇이 생각
이 올라온 것을 알아채나?
흔희 생각이 올라온 것을 알아채는 놈이 또 다른 생각이다라고 錯覺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번 더 자세히
살펴봐라. 우리는 무언가가 있거나 없어졌을 때 항상 생각을 통해야지만 아는가? 예를 들어 배가 고플
때 생각으로 “아! 지금 배 고프다”라고 굳이 생각을 내지 않아도, 언어화 하지 않아도 배 고프다는 사실
을 즉시 알수 있지 않는가? 똑같은 이유에서 생각이 올라왔을 때 꼭 “지금 생각이 올라왔다”라고 언어화,
생각화하지 않아도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무언가가 바로 알지 않는가? 혹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
으면 자세히 한번 들여다 보면 알수 있다. 생각이 떠 올랐을때 “지금 생각이 떠 올랐구나” 라는 생각 없
이도, 언어의 작용이 없이도 즉시 무언가가 바로 고요한 가운데서 지금 생각이 올라온 것을 그냥 안다.
여기까지 확인이 되었다면 그 아는 자리를 좀 더 자세히 들어다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아는 자리 그
곳이 바로 우리가 찾는 부처 자리, 깨달음의 자리, 根本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번 자세히 들여다
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 그 아는 “놈”은 어떤 특별하게 定해진 모양이나 형태가
있던가? 언어를 쓰지 않고도,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도 바로 아 지금 생각이 일어났구나 하고 아는 그
자리, 아는 그 “놈”을 자세히 들여다 봐라. 대개 우리는 생각을 그냥 따라가는데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그 자리, 그 놈을 봐라. 앎이 일어난 그 자리를 봐라. 그 아는 “놈”이 어떤
일정한 모양이 있는가? 형태가 있는가? 자세히 한번 봐 봐라.
그 다음으로 그 앎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에 위치를 하는지 찾아봐라. 그 아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 봐라.
물론 처음엔 흔희 잘 살펴보지도 않고 내 몸안, 머리 속에 있다고 말 할것이다. 왜냐면 내 몸을 항상 나라
고 여겨오던 無始以來의 버릇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하는데 그런데 한번 다시 봐라.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
는구나 하고 아는 앎이 몸안에 있는가? 아니면 구름에 가 있는가? 그 앎이 정말로 몸안에 있다면 구름이
몸안에 위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않그런가? 내 눈앞의 벽을 봐라. 그 벽이 눈앞에 있음을 아는 앎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내 몸안에서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 앎이 내 몸 밖 벽에서 일어나는가? 아주 자세
히 들여다 봐라. 그리고 나서 또 물어라. 앎의 基準에서만 봤을 때 내 몸 안과 내 몸 밖이 따로따로 분리
되어 있는가? 내 어깨가 결린 것을 아는 앎이나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아는 앎이 하등의 차이가 있는가?
마지막으로 그 앎이 더럽혀 질 수 있는지, 물들 수 있는지 한번 봐라. 예를 들어 단풍 나무를 보고 나서
이어서 핸드폰을 봤다고 해 보자. 단풍 나무가 있음을 아는 앎이 핸드폰을 봤을 때 핸드폰이 있음을 아는
앎의 작용을 물들일 수 있는가? 물들일 수 있다면 핸드폰을 봤을 때 그전에 봤던 단풍나무의 모습이 핸드
폰 모습위에 중첩이 되어서 눈앞에서 어른 거려야 한다. 그런데 實際는 단풍나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아주 깨끗이 사라지고, 핸드폰이 있다는 앎만 딱 있다. 즉 이 앎은 虛空 모양을 한 거울과도 같아서 虛空
과도 같은 거울 앞에 있는 대상이 사물로 일어난 대상이든 생각으로 일어난 대상이든 느낌으로 일어난
대상이든 일어났다는 그 대상들을 그냥 비추어 바로 알뿐, 그 대상들이 거울 자체, 앎 자체를 물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앎은 그 대상들이 마음 거울앞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앎 자체는本來 淸淨한 것이고, 또한 이 세상이 생기기 이전부터, 내가 이 몸받기 이전부터 지금 여기 처럼
존재해온 것이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경험하고 싶은가? 지금 이 글을 읽고 그 뜻을 아는 그 자리가 바로 수행자가
그토록 찾던 자리이다. 이 자리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수십년간 고행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는지,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注意를 안으로 회광반조해서, 아는 자리의 모양이 따로 있는지,
그리고 어디에 앎이 위치하는지 자세히 살피고 또 살펴봐라. 앎 자체의 성품을 깨달을 때 그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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