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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1987 그리고 나] 보안계장은 그가 '비둘기'인지 몰랐다

장백산-1 2018. 1. 6. 15:36

[커버스토리 1987 그리고 나]

보안계장은 그가 '비둘기'인지 몰랐다

박주연 기자 입력 2018.01.06. 07:01 수정 2018.01.06. 08:46


ㆍ‘박종철 고문치사’ 진실 밝힌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 · 교도관 한재동씨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인 안유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오른쪽)과 한재동 전 교도관이 지난 4일 서울 용산구 박종철기념관 5층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과거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이었던 이곳에서 1987년 1월14일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던 도중 숨졌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씨(당시 21세·언어학과 3학년)가 숨졌다. 경찰은 이튿날 “책상을 ‘탁’ 하고 내려치자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쇼크사로 위장하려던 경찰은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자 다시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했다. 정부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법무부·내무부·검찰·청와대 비서실 등이 모여 관계기관 대책회의까지 열며 정권 차원의 조작·은폐를 시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이 드러났고, 6월항쟁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영화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1987년 민주화운동을 다룬다. 지난달 27일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1주일 만인 4일 현재 302만명이 관람했다. 정치인들과 경찰이 단체관람을 할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 수감 중이던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김의성)에게 고문경찰관이 더 있다고 알린 보안계장은 안유씨(74)를 모델로 했다. 이부영의 편지를 몰래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전달한 교도관(유해진)은 한재동씨(71)와 전병용씨를 합쳐놓은 것이다. 실제로는 한씨가 전씨를 통해 이부영의 첫번째 편지를 김정남에게 전달했고, 두번째 편지부터는 한씨가 직접 가져다줬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남영동 옛 대공분실에서 안유씨와 한재동씨를 만났다.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청 인권센터로 변했고 그 안에 박종철기념관이 있다. 안씨와 한씨는 2012년 박종철 열사 25주기 기념식에서 수십년 만에 재회했다고 했다. 그러다 최근 <1987> 시사회에 초대돼 함께 영화를 봤다고 했다. 관람 소감을 묻자 안씨는 “당시 외부의 최루탄가스가 바람을 타고 교도소 안까지 날아오는 날이 많았다”며 “나의 경우 박처원 치안감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 등 픽션이 가미됐지만 그때를 돌아보게 돼 감회가 새로웠다”고 말했다. 안씨는 “당시엔 이부영씨의 비둘기(몰래 교도소 밖으로 검열받지 않은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가 한재동씨인 줄 몰랐다”고 덧붙였다. 한씨 역시 “안유 형님이 이부영 형에게 고문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당시엔 확신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한씨는 “영화 속 장면들은 당시의 아슬아슬함에 비할 바가 못된다”며 “옛 기억이 상기되면서 다시는 저런 시절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전두환 정권의 폭압이 심했던 1986년 한 해 동안 전국 구치소·교도소에 수감된 공안사범만 2800여명이었더군요.

안유 = “당시 영등포교도소는 시국사범 증가로 감방이 모자랄 정도였어요. 처음에 대학생이 들어오면 독거방을 배정했는데, 숫자가 늘면서 일반 재소자와 같은 방에 넣을 수밖에 없었죠. 몰려 있으면 안되니까 대학생들을 2~3방 건너 한 명꼴로 배정했어요. 이들을 감당하기 위해 1986년 서울 및 수도권과 대도시 구치소·교도소마다 ‘공안 및 공안 관련 사범 전담반’이 꾸려졌는데 보안계장이던 제가 영등포교도소에선 전담반장이었습니다.”

“두려웠죠, 하지만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했어요”

진실 알린 교도관 2명의 증언

지난 4일 전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씨(왼쪽)와 전 교도관 한재동씨가 박종철씨가 물고문을 받다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을 둘러보고 있다. 두 사람은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의 진상을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화 <1987>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한재동 = “인천 5·3항쟁 이후 학생운동이 더욱 강력해졌어요.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된 학생들은 집단으로 구호를 외치고 단식하고 출정을 거부하는 일이 많았죠. 군사정권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어요. 시국사범, 양심수들은 죄없이 갇힌 거니까 저항할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에서 교도관들과 마찰도 많았죠. 당시 학생들이나 양심수들은 교도관들을 정권의 시녀라고 했습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을 바깥에 알린 이부영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도 ‘5·3 인천항쟁’의 배후 조종 혐의로 그때 구속돼 영등포교도소에 있었지요?

안유 = “이부영씨가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가 서울구치소에 투옥된 1974~75년쯤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만났어요. 이부영씨와 군대생활을 같이한 제 고교 동창이 구치소 관구 주임이었던 제게 그를 부탁했죠. 자주 대화하며 친분을 쌓다 헤어졌는데 1986년 영등포교도소에 이부영씨가 들어오면서 재회했습니다. 당시 그에게 집단구호, 단식 등으로 저항하는 학생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이부영씨는 재소자 대표, 전 교도소 대표로 협상을 했고, 학생들은 그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했어요. 주로 법무부가 금지한 책을 반입해달라는 내용이었고, 전 당국 몰래 눈감아줬죠.”

한재동 = “1976년쯤 부영이 형을 서울구치소에서 만났어요. 형이 출소한 후에도 자주 만나 같이 데모하러 다녔죠. 독재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당시 저는 거의 모든 시국사범들과 알고 지냈어요. 부영이 형이 영등포교도소에 들어온 후엔 매일 오후 5시 형을 찾아가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다 퇴근했어요. 당시 제게 배정된 업무공간이 오후 5시에 일을 마치는 수형자 작업실이었는데, 퇴근시간은 6시니까 1시간이 비잖아요.”

박종철이 쇼크사가 아닌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 들통난 후 경찰은 1월19일 치안본부 대공수사3부 5과 2계 조한경과 강진규가 고문치사 가해자라고 발표했다. 이후 불과 5일 만인 24일 검찰 수사팀은 이를 인정하는 1차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이 둘을 구속 기소했다. 안씨는 “20일 새벽 2시쯤 영등포경찰서에 봉고차가 도착했는데 내린 사람이 다섯이었다”며 “경찰은 이들이 대공 담당이어서 얼굴이 알려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똑같은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다섯명의 경찰을 봉고차에 태우는 촌극을 벌인 것”이라고 말했다.

- 당시 취재 인파도 많이 몰렸죠.

안유 = “그랬지요. 전 고문경찰 둘을 어디에 수감할지 고민했어요. 양심수들이 있는 사동에 같이 넣으면 큰일날 테니까 이부영씨가 있는 사동에 넣었어요. 이부영씨도 학생들과 섞이면 결과적으로 그에게 안 좋을 것 같아 당시는 사용하지 않던 여자 사동에 배정했거든요. 그곳 창살을 통해 이부영씨가 조한경과 강진규에게 ‘당신들도 독재의 희생자들’이라며 ‘박종철을 위해 함께 명복을 빌자’고 했다고 해요.”

한재동 = “박종철 고문에 둘만 가담했다는 검경 발표가 가짜라는 걸 저는 처음부터 알았어요. 서울구치소에 근무할 때부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경찰이나 안기부, 보안사 등에 끌려가 고문당한 걸 목격했으니까요. 동료 교도관도 개 패듯 폭행당하고 돌아온 것을 봤고요. 가담자가 더 있을 거라고 짐작했죠. 가해 경찰들이 영등포교도소로 온 후 동료 교도관들을 통해 진상을 파악해보려 했는데 쉽지 않았어요. 조한경은 매일 성경을 크게 읽고 찬송가를 불렀고 강진규는 흐느껴 울기만 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경찰은 교도소 측에 조한경, 강진규를 조용한 공간에서 계속 특별접견(가림막을 사이에 둔 접견이 아닌, 별도 장소에서 편하게 대화하는 접견)해야겠다는 것과 자신들의 면회를 교도관이 참관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안씨는 법무부에 보고한 후 규정을 들어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중견간부가 입회할 것과 내용을 일절 기록하지 말 것을 타협안으로 제시했다. 교도소 측은 간부 침실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놓고 경찰에 접견실로 제공했다. 2월19일 대공5과장 등 6명이 가해 경찰관들을 면회했다. 이 자리에서 안씨는 놀라운 얘기를 들었다.

안유 = “경찰들이 거의 매일 면회를 왔어요. 2월19일 면회온 사람들이 ‘너희 둘이 다 짊어지고 가라. 그럼 빨리 재판받게 해서 가석방이든 사면이든 빨리 석방되도록 하겠다. 대공조직을 위해 너희 둘이 끝까지 책임지라’고 했어요. 조한경은 실제 물고문했다는 동료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반발했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잊을까 봐 얼른 업무일지에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반금곤의 오기), 경장 이정오(이정호의 오기)라고 고문경찰 3명의 이름을 들리는 대로 적었죠. 그들은 대화에 빠져 있어 제가 적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어요.”

안씨는 며칠을 고민한 후 이부영을 사무실로 불렀다. 커피를 내주고 “큰일났다.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 형이 언젠가 출소할 테니 기록으로 남기라”며 보고 들은 내용을 전했다. 하지만 안씨는 “당시 분노를 느껴 고민 끝에 이부영씨에게 전했지만 그게 곧바로 바깥세상에 알려질 줄은 몰랐다”며 “다음날인가, 이부영씨가 내게 박종철 관련 모든 업무일지와 자신과 면담한 기록까지 다 없애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소름이 돋았다”고 회고했다. 정권을 뒤엎을 정보라고 판단한 이부영은 그 내용을 그날 바로 편지에 써서 다음날 한재동씨를 통해 외부로 내보냈다. 정권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했다는 내용이 편지에 담겼다.

- 비둘기 노릇은 위험한 일인데 어떻게 이뤄졌나요.

한재동 = “여느 때처럼 오후 5시 부영이 형을 만나러 갔는데 부영이 형이 ‘재동아,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필기구를 가져오라’고 해요. 직감적으로 박종철 고문경찰들 얘기인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서 재생갱지를 찢어 제 볼펜과 함께 건넸죠. 부영이 형이 내일 오라고 하더군요. 이튿날 가서 늘 그랬듯이 감방 창문의 쇠창살을 손으로 잡고 대화를 나누는 중에 형이 제 소매 속에 몇번 접은 편지를 스윽 밀어넣었어요. 그래야 지키고 있는 교도관이 눈치채지 못하거든요. 형은 저의 동료 교도관이었던 전병용한테 편지를 줘서 김정남에게 전달하도록 하게 하라고 말했어요. 전 편지가 교도소 정문을 나설 때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다섯 손가락으로 소매 끝을 부여잡고 퇴근했죠.”

그즈음 교도관을 그만둔 전병용은 당시 경찰에 쫓기는 신세였다. 김정남의 요청으로 이부영, 장기표 등을 숨겨줬다가 장기표가 검거되는 바람에 범인 은닉 혐의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한씨는 전병용과 경찰의 눈을 피해 몰래 자주 만났다. 편지는 전병용을 거쳐 3월15일에야 김정남에게 전달됐다. 역시 수배 중이던 김정남이 연락하지 않으면 전병용도 그를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병용은 편지 전달 이틀 후인 3월17일 경찰에 붙잡혔다. 김정남이 받은 편지는 2월23일자 외에 추가로 3월1일자로 작성된 것도 있었다. 2월27일 담당검사인 안상수가 두 고문경찰의 요청으로 찾아와 가혹행위 가담자가 3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 ‘어느 쪽이 유리한지 잘 알아서 판단하라’고 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87년 1월14일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씨가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드러난 후 경찰은 사건을 축소·조작·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특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밑에서 두번째)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폭로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맨 아래)는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발각됐을 때 닥칠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감이 없었습니까.

한재동 =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큰 두려움은 없었어요. 박정희 때부터 민주화를 위해 독재자를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죠. 자질구레한 감정에 흔들려선 안되잖아요. 이전부터 정치범들의 비밀편지를 수없이 전달하기도 했고요.”

안유 = “저는 달랐어요. 역추적이 들어오면 간첩 누명이 씌워져 남영동에 끌려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려웠습니다. 솔직히 가족에게도 말 못한 채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죠. 내가 어떻게 되면 우리 남은 가족은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까, 걱정했습니다.”

- 검문검색이 삼엄하던 시절인데, 편지를 전달하러 가실 때 미행 등 별다른 일은 없었나요.

한재동 = “중요한 걸 지니고 있으니까 항상 뒤를 나름대로 살피며 다녔어요. 예감이 안 좋은 날엔 일부러 골목을 돌면서 살피기도 하고, 버스와 택시, 지하철도 자주 갈아탔죠. 그러나 별일은 없었어요.”

- 영화에서 보안계장의 역할이 미화돼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안유 = “전 의인이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저를 가리켜 ‘전두환의 주구, 사냥개’라고 했어요. 학생 수형자들은 제 얼굴에 짬밥을 뿌리기도 했죠. 그때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당시엔 수형자들이 고성 등 문제를 일으키면 포승과 수갑을 채우고 입을 막는 방성구를 씌웠어요. 그게 규정이었습니다.”

- 안상수 등 수사검사들은 2월27일, 3월4일, 3월27일 고문경찰을 면담했지만 이들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며 본격적인 수사 착수를 미뤘습니다. 당시 면담 자리에 교도관이 입회했나요.

안유 = “규정상 입회하는 게 맞고, 그날 제가 입회를 했는데 안상수 검사가 ‘수사할 땐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가 조·강에게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는 얘기는 추측건대 이부영씨가 같은 사동에 있는 조·강으로부터 밤에 전해들은 게 아닌가 싶어요.”

한재동 = “박종철 사건은 최환 검사가 은폐 시도에 맞서 부검을 밀어붙여 물꼬를 텄고, 안상수 검사는 덮으려 한 건데 안상수 검사가 덕을 본 것 같아요.”

그사이 경찰들은 조한경과 강진규를 계속 찾아와 회유했다. 금품 회유도 있었다.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은 고문경찰의 부인들을 불러 각 300만원을, 강민창의 뒤를 이어 2월 말 치안본부장이 된 이영창이 각 1000만원을 줬고, 동료 경찰들이 4379만6000원을 모금해 줬다. 박처원 치안감(대공수사단장)은 고문경찰 명의로 된 5000만원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에 2계좌씩 가입한 후 조·강에게 보여주며 “장래 문제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있으라”고 회유했다. 안씨는 “1억원이 들어 있는 통장으로 회유하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권의 조직적 은폐 기도는 그해 5월18일 세상에 폭로됐다. 이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5·18 특별미사 2부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이부영이 보낸 편지를 토대로 김정남이 작성한 것이었다.

파장은 엄청났다. 2월 말 이미 진상을 파악하고도 본격 수사에 미온적이었던 검찰은 뒤늦게 5월20일 2차 수사팀을 꾸리고 5월29일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를 구속 기소했다. 은폐 조작에 관여한 박처원, 유정방 등 경찰 간부들도 구속됐다. 국무총리 노신영과 정권 2인자였던 안기부장 장세동도 물러났다. 치안본부장과 내무부 장관은 경찰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초기인 2월에 이미 퇴진했다.

전국에는 거리로 뛰쳐나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부르짖는 ‘독재 타도’ ‘호헌 철폐’ 구호가 물결쳤다. 6월9일 교문 앞에서 전경과 맞서다 전경이 쏜 최루탄 파편에 머리를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의 죽음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이 심지가 돼 활활 타올랐던 6월항쟁은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권교체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 어떻게 받아들이셨습니까.

한재동 = “개인적으로 많이 속상하고 허망했어요. 조금만 더 밀어붙여 전두환을 끌어내리든가 그 패거리들이 못 나오도록 약속을 받아냈어야 하는데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기쁨에 도취돼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으니까요. 내가 이러려고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닌데, 싶었습니다.”

안유 = “오판한 거죠. 김대중씨나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될 줄 알았는데 분열되는 바람에…. 어쨌든 박종철, 이한열의 희생이 민주화의 초석이 된 거예요. 그들의 희생이 헛되게 해선 안돼요.”

- 촛불집회로 2017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됐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와 관련한 검찰 수사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 차원의 비리는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한재동 = “정권에 충성하는 것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은 다릅니다. 고문경찰이나 군인 등 많은 공무원들이 흔히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할 때 국가를 위해서였다고 말하죠. 실제로는 자기들의 권력이나 부를 위해서였고, 국가가 아닌 정권에 대한 충성이었으면서도요. 정권이 아닌 국가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국민이 깨어나 양심적 행동을 하는 만큼 정권도 바르게 가는 거니까요.”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