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3 ·1절 기획] '신한촌'엔 남 · 북 · 고려인 상징 '세 기둥'만 외로이 서 있었다

장백산-1 2018. 3. 1. 02:51

[3 ·1절 기획] '신한촌'엔 남 · 북 · 고려인 상징 

'세 기둥'만 외로이 서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 글·사진 고희진 기자 입력 2018.02.28. 22:18 수정 2018.02.28. 23:18



[경향신문] 

ㆍ만해 한용운의 ‘독립운동 발자취’- 연해주를 가다

만해로드 탐방단이 찾은 곳은 러시아 일대 독립운동 유적지와 한인촌이다. 세 기둥으로 만들어진 신한촌 기념비, 관리를 맡고 있는 고려인 4세 이베체슬라브,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거주지(위부터).

지난 25일 오후 4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의 아파트 단지 길목 사이로 세 개의 기둥이 보였다. 국외 한민족연구소가 1999년 건립한 신한촌 기념비다. 중앙의 큰 기둥은 인구가 가장 많은 남한, 두 번째로 큰 왼쪽 기둥은 북한, 오른쪽은 고려인을 상징한다. 세 개 기둥 아래 작은 비석들은 세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

외로이 들어선 기념비에서 탐방단을 맞이한 이는 자원봉사자 이베체슬라브(64)다. 고려인 4세인 그는 1999년부터 기념비를 지켜왔다. 잦은 병환으로 몸이 불편한데도 하루에 몇 번씩 기념비를 찾는 손님들을 안내한다. 이날도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나왔다. 이베체슬라브는 기념비도 수난을 겪었다고 전한다. 그는 “처음엔 기념탑만 외로이 서 있어 주변의 아이들이 탑에 낙서를 하는 일도 잦았다”며 “울타리를 세우고 체계적인 관리를 한 것도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후반이다. 기근과 수탈을 피해 조국을 떠나온 이들이 먼저 자리 잡은 곳은 ‘개척리’다. 러시아 정부에 다시 땅을 빼앗긴 한인들은 개척리 북쪽에 터를 잡았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키겠다며 ‘신한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연해주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이곳은 국외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1937년 약 18만명의 한인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지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가며 거쳤던 우수리스크의 라즈돌리노예 기차역을 지난 26일 찾았다. 한국의 간이역 정도 크기의 역사는 황량한 겨울바람을 맞고 있었다. 앞에는 커피를 파는 노점상과 몇몇 주민들이 오가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텅 빈 기찻길을 바라보니 몇십 년 전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황망히 먼 길을 떠나야 했던 고려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연해주 제2의 도시인 우수리스크는 항일 독립운동 근거지였다.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이곳엔 ‘고려인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문화센터 근처엔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기념비도 세워져 있었다. 센터 안에는 마치 놀이터처럼 안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고려인 5세로 보이는 아이들이었다.

센터에서 멀지 않은 곳엔 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의 마지막 거주지가 있다. 황해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최재형은 연해주로 이주해 자수성가했다. 군수업으로 쌓은 막대한 부로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로 한인 사회에서 존경받았다. 그는 1908년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이다. 러시아와 일본 탄압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1920년 4월 일제의 고려인 숙청 때 총살됐다. 당시 신한촌에서만 약 300명이 죽임을 당해 ‘4월 참변’이라 불린다. 마지막 거주지는 ‘최재형의 집’이라는 표지판을 달고 남아 있다.

27일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차로 4시간, 약 250㎞를 달려 ‘지신허’를 찾았다. 크라스키노의 한인 최초 이주마을이다.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정착한 곳이다. 가수 서태지씨가 200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 기념 공연을 하면서 지신허에 비석을 헌정했다.

비석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지신허 마을의 입구였다는 곳에서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신허가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속하면서 군인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방문을 원하는 이는 국경수비대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크라스키노엔 1909년 10월26일 일제 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독립 의지를 기리는 곳도 있다. 1909년 2월7일 안중근과 11명의 동지가 무명지를 자르고 조국 독립을 외쳤던 것을 기념한 것이다. 허허벌판에 놓인 ‘단지동맹비’는 뭉클한 감동을 줬다. 한인 거주지에서도 꽤 먼 거리를 이동해 독립의 뜻을 그리며 손가락을 잘랐을 선조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소식을 들은 한용운은 그를 위해 시를 남긴다. 만해는 자신의 꿈이 좌절된 땅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진 열사들의 마음을 기렸다. 한용운이 연해주를 떠나온 지 100년이 지난 지금, 그 땅에는 한인 후손들이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기리며 살아간다. 러시아 정부는 소수 민족 역사에 관심 없다. 한국 정부도 국외 독립운동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는다. 만해가 꿈꾼 국내외 독립운동의 연계는 어쩌면 지금도 다 그려지지 못한 지도처럼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 글·사진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