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제7말라식 알면 ‘나’라는 것이 가짜 환영임을 알아

장백산-1 2024. 7. 2. 21:49

32. 나(我)에 관한 단상-1

 

제7말라식 알면 ‘나’라는 것이 가짜 환영임을 알아

‘원형의 그림’ 그리는 자에게 집착하는 식이 제7말나식
제8아뢰야식 작용을 보면서 자기의 내적인 자아라고 여겨
나에 미혹한 4종 번뇌와 함께 항상 제8아뢰야식 따라다녀

범부에게 아뢰야식을 말해주면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게 된다.
 
 

나는 그때그때 관심사에 따라 샛길로 빠지거나 단계를 건너뛰면서 저 심층의 마음(제8아뢰야식)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왔다. 이전 글들을 쭉 훑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저 ‘성유식론’의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하다. 아뢰야식의 인식 대상과 인식 작용, 그에 수반되는 정신 작용 등을 대략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아뢰야식에만 고유한 것도 있고 모든 종류의 인식에 공통되는 것도 있다. 아뢰야식에 잠재된 종자, 그리고 그 식이 현현해 내는 몸·세계는 그 식만의 고유한 인식 대상이다. 반면, ‘알아차린다’고 하는 인식의 삼분 구조(見分·相分·自證分) 및 그에 반드시 수반되는 다섯 가지 정신 작용은 모든 식(識)에 공통된다. 지금까지 내가 다룬 내용은 극히 일부이고, 저 ‘성유식론’에는 각각의 주제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세한 분석과 논증이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모두 알 필요는 없다. 심층의 무의식을 통째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륵의 후예들도 마지막엔 ‘아뢰야식의 작용과 대상은 극히 미세하고 광대해서 불가지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니 우리도 어디쯤에서 잠정적 결론을 내린 후 다음 주제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나는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담긴 어떤 문구로 지난번 글을 끝냈는데, 그 문구가 이전과 이후의 주제를 이어주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뢰야식에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불확실하게 판독해 나가는 원형의 그림이 있다.” 여기서 ‘원형의 그림’이란 이전 글들에서 반복해서 말했던 것, 즉 아뢰야식에 현현되는 몸과 세계(자연계)를 가리킨다. 미륵의 후예들이 편의상 그 둘을 나눈 이유는, 아뢰야식은 자기의 살아 움직이는 몸을 기점으로 안팎의 차이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안팎의 오진(內外五塵: 몸과 자연계를 이루는 色·聲·香·味·觸)’ 혹은 ‘십유색처(十有色處: 안팎의 오진을 열 가지로 나눈 것)’ 등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은 다채롭고 풍요로운 색·소리·향기·맛·촉감 등으로 채워진 안팎의 물리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것을 ‘원형의 그림’이라 칭했는가.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미륵의 후예들에 따르면, 물리적 세계를 직접 인식하는 감각들조차도 감각 가능한 자기만의 형상을 그려내어 인식한다고 한다. 만약 누군가 ‘아뢰야식에 현현된 몸과 세계’라는 말을 접하고서, 가령 낯익은 신체의 형상을 떠올렸거나, 혹은 초목과 새소리가 어우러진 공원의 풍경이나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도심의 풍경 등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아뢰야식의 그림이 아니라 그의 감각과 의식이 거칠게 판독해 낸 그림일 것이다. 그러니까 원형의 그림이란 감각 가능한 형상으로 변형되기 이전의 감각적 원형 같은 것이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제부터 저 아뢰야식의 원형의 그림을 불확실하게 판독해 가는 그 밖의 식들에 대해 사색해 볼 것이다. 앞의 문구에서 저 원형의 그림을 판독하는 여섯 종류 식(다섯 종류 감각과 제6의식)만 언급했지만, 그 외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나’라는 뿌리 깊은 관념을 만들어 내는 식이다. 미륵의 후예들은 그것을 ‘말나(末那, manas)’ 혹은 ‘의(意)’라고 불렀고, 현장 문하의 학자들은 그것을 제7식으로 공식화하였다. 그런데 이 말나식은 아뢰야식이 그린 원형의 그림보다는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영적인 작용을 보면서 항상 ‘나’라고 오판한다고 한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서 아뢰야식을 판독하는 자는 말나식이 아닐까. ‘성유식론’에서도 아뢰야식에 이어서 말나식을 다루었다. 그래서 저 여섯 종류 식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먼저 이 말나식에 대해 사색해 보려 한다. 이번 글은 그 사색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우선 ‘성유식론’의 정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말나식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항상(恒) 곰곰이(審) 헤아린다(思量)’는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끊기거나 대충 분별하거나 하지 않고, 저 말나식이 항상 곰곰이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은 하나밖에 없다. 즉 아뢰야식. 그러니까 아뢰야식이 항상 끊임없이 이어지며 몸과 세계를 변현해 내기 때문에 말나식도 저 심층의 마음을 항상 곰곰이 헤아리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뢰야식의 알아차리는 (변현해내는) 작용(見分)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자기의 내적인 나(我)’라고 헤아린다. 이 말나식은 특별히 네 가지 번뇌를 항상 달고 다닌다. 아치(我癡)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그 차례대로, 무아(無我)인 줄 모르는 어리석음, 나라는 것이 있다고 보는 집착,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자만심, 나에 대한 뿌리 깊은 탐애를 뜻한다. 이러한 번뇌에 휩싸여 있는 말나식도 아뢰야식만큼이나 희미하기(無記) 때문에 악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마치 철이 자석에 달라붙듯, 아뢰야식이 생하는 곳을 따라서 그 식도 함께 묶인다. 그래서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할 때면 그것은 항상 나의 그림자를 본다. ‘산이 보인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산을 본다’고 하거나, 혹은 자기가 뭔가 터득한 것 같아 내심 우쭐해지는 것이다.

저 ‘성유식론’에서는 말나식이 이론적으로 요청되는 몇 가지 이유를 분석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좀 더 은밀한 속사정이 있는 듯하다. 아뢰야식의 교설을 주창했던 미륵의 후예들은 항상 어떤 우려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해심밀경’의 한 게송에 나타나 있다. “나는 범부나 어리석은 이에게는 (아뢰야식을) 설해주지 않으니, 그들이 분별하면서 ‘나’라고 집착할지도 모른다.” 미륵의 후예라면, 당연히 어째서 아뢰야식에 대해 ‘나’라는 관념을 일으키는지를 설명하려 할 것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라는 것도 하나의 가짜 환영임을 일깨워 주려 할 것이다.

나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불교에 입문한 사람이라면, ‘드디어 나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날이 오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그림자를 생각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는 저 말나식이 애상적으로 느껴진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동안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언제나 내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곤 하였다. 몇 편의 글은 내 마음에도 들었고, 그것이 나의 존재를 고양시키는 것 같아 살짝 우쭐해지기도 하였다. 높은 도력을 지닌 보살도 미세한 번뇌를 남겨 그 힘으로 열반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니 나 또한 당분간 그러한 ‘나’로 하여금 그냥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지 않을까. 물론 나의 글과 사색은 진정 나의 것이 아니라 유식학 전통의 산물이고, 그 또한 단지 언어의 산물임을 안다. 그렇기에 나의 자만심도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나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면, 허무해하는 나보다는 약간 우쭐해진 내가 그 뿌리 깊은 아집의 정체를 추적하려 할 것이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35호 / 2024년 7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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