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한민족의 뿌리와 역사 [조화경=천부경,교화경=삼일신고, 치화경=참전계경]

장백산-1 2009. 4. 22. 22:18

韓民族 뿌리와 思想
번호 5135 글쓴이 한민족 뿌리와 사상 조회 788 등록일 2009-4-13 16:37 누리153 톡톡0
1922년 조선총독부 교육 시책
 
"먼저 조선사람들이 自身의 일(事), 歷史, 傳統을 모르게 하라.

 

그럼으로써 民族魂, 民族文化를 喪失하게 하고, 그들의 祖上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 내,

그것을 과장하여 朝鮮人 後孫에게 가르쳐라.

 

朝鮮人 靑少年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輕視하고 滅視하는 感情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氣風으로 만들게 하라.

 

그러면 朝鮮人 靑少年들이 自國의 모든 人物과 사적(史蹟)에 對하여

否定的인 知識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失望과 虛無感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日本의 史籍, 日本의 文化, 日本의 위대한 人物들을 所介하면

동화(同化)의 效果가 至大할 것이다.

 

이것이 帝國日本이 朝鮮人을 '반(半)日本人'으로 만드는 要訣인 것이다."

 
"'단군신화'란 단어는 총독부가 1938년 만든 거짓 말"

 

  고증자료 찾아 알래스카까지…'2200년 역사' 기록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 중 우리가 제대로 알고 있는 민족사는 얼마나 될까. 학교 교육 혜택을 받는 대개의 국민들은 삼국시대부터 현대사까지 2000여년의 역사만을 배우게 된다.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전 단군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 흔히 신화 수준으로 폄하되는 당시의 역사가 그저 구전해 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면 우리의 뿌리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檀君은 實存 人物이었다’는 책을 펴낸 송호수 박사(75)는 우리의 국조인 단군은 실존 인물이었고, 47대 2200년간 한반도와 일본, 산동반도 양자강 위까지 세력을 펼쳤다고 주장한다. 송 박사는 이 책에서“‘단군신화’라는 단어는 총독부가 1938년부터 만들어 7년(1938∼1945) 밖에 못써먹고 패전하고 말았다. 총독부 이전에는 우리 5천년사에 단군신화라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총독부 사학파 잔당들은 일본이 검정한 단군신화는 믿고 , 우리가 검증한 단군역사는 안 믿는다”고 지적한다.
 
40여년간 단군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는 송 박사가 처음 檀君을 工夫하기 시작한 것은 강단에서 동양철학을 강의했을 때라고 한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韓國에 哲學이 없다는 것을 理解할 수 없었다는 것. 그는 이때부터 단군의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산중에서 길을 잃거나 영양실조로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단군고증을 위해 中國 印度 알래스카 등을 방문했고, 결국 40년의 각고 끝에 檀君의 2200년 歷史를 한권의 책으로 묶어 世上에 내놓게 됐다.
 
“이 책은 安浩相 박사 등 민족사학파의 엄정한 검증을 거쳤으며 중국 정사 후한서 등 여러 고서를 토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세계 일류 역사에 하나의 역사가 2000년 이상 이어진 것은 유일합니다. 세계 통치사의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송 박사는 책을 통해서도 쓰고 있지만, 한글이 檀君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등 놀라운 주장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단고기 단기고사 홍사 규원사화 동국역대 등에 한글 38자가 고스란히 등장하는데, 세종 때 28글자로 축소해 훈민정음이라 했으며 지금 쓰이는 글자는 이중에서는 4자를 제외하고 24자만 사용하고 있다는 것.

 

또 송화강가에 기계를 만드는 공청(工廳)을 설치해 각종 배와 기계를 만들었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이 때 나라 안에 현상을 걸어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했다는 것이다. 상을 받은 발명품들로는 양우계(量雨計) 구석편(驅石鞭) 목류마(木流馬) 측우기(測雨機) 측풍계(測風計) 자명종(自鳴鐘) 등 총 26종에 이른다. 이처럼 檀君朝鮮은 영토확장과 더불어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다는 주장이다.
 
단군역사에 젖어살고 있는 송 박사는 한국철학서의 시초가 될만한 것이 이 책이라며 과감하게 자평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사료들만으론 단군고조선사 회복엔 부족합니다. 단군역사에 관한 숨겨진 사료들은 혹독한 탈취, 소각, 말살 등의 일제 총독부 만행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일본 패전 후 6·25 전쟁까지 지하에 묻혀 있다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들입니다. 각 나라마다 전통적인 철학이 있듯이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哲學을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송 박사는 특정 종교인들의 단군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져야 우리의 전통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단군이 우리의 국조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단군상이 집단 우상숭배를 위해 세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얼을 회복하고 선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조 단군을 부정하는 국적불명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의 후손인지 되묻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는 통일이라는 민족적 성업은 빼앗기고 잃어버린 단군 역사와 단군 정신을 회복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한민족의 뿌리와 사상[송호수 교수] 
 
일본 학자 오향청언 (吾鄕淸彦) 씨가 쓴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漢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韓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하다" 고 말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대충 어느 정도 변조가 되었는가를 피부로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한사군(漢四郡) 문제만 보더라도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평양에, 그것도 세 군데나 되는 평양 중에서 대동강의 평양만 있었다 하고 또 위만 (衛滿) 이 조선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그것 은 일본 사람들이 "보아라. 너희 조선족은 역사의 시초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항상 피지배 민족이었지 언제 독립 국가였느냐" 고 하면서 우리나라를 영원히 자기 네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당위론을 제시하는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檀君 以前에 환웅천황 (桓雄天皇) 의 歷史 時代가 18대 1565 년 동안 있었고 또 그 以前에 환인천제 (桓因天帝) 時代가 7대 3301 년이 있어서, 금년까지 9183 년이라는 사실이 '삼성기 '(三聖紀) 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三聖記' 의 문헌사적 고증이 문제가 되겠습 니다. 이 책을 쓴 안함로 (安含老)는 서기 600 년경 新羅 時代 사람인데 삼국유사가 나온 것 이 1200~1400 년경이니까, 그보다 훨씬 더 먼저 기록된 것이고 이러한 '三聖記'의 기록을 그 대로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연조는 9 천 년이 넘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9 천 년이란 역사를 어떻게 입증하느냐, 그러한 문헌 하나만 가지고 이것을 어떻게 외국학자들이 수긍할 수 있도록 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이것이 合理化될 수 있는 外國 學者들 의 論文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몇년 전에 日本에 와서 발표한 소련의 여류 民族學者 R.S.M 자리가시노바 씨는 "한동 〈 舊石器 時代에 人類가 살았고 新石器 時代 初에 이미 獨者的인 高度의 文化를 가지고 있었 다" 고 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초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 1만 2천 년 전입니다. 그러므로 이 때 이미 우리 東夷族들은 주변 국가들이 따라오지 못하는 수준 높은 독자적인 문화를 가 지고 있었다는 事實을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는 공산국가의 학자가 발표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있죠. 역시 공산국가인 中國의 有名한 古考學者 당란이, 1977.7. 14 자 중공 '光明日報' 를 통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山東 반도 지역에서 남한 넓이 만한 광대한 지역에 이르 는 대문구 문명권 (大汶口文明圈) 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발굴하니까 文字가 나오고 그 곳을 統治한 소호씨 (少昊氏) 란 통치자 이름까지 나왔으며, 이것을 방사선 탄소 측정을 해 보니 까 지금으로부터 5785 년 전 것" 이라고 합니다. 5785 년 전이라고 하면 檀君 建國보다 약 1500 년 前의 일입니다. 그 당시 이미 산동 반도에는 문자를 사용한 고도의 문명 국가가 있 었는데, 그 통치자인 소호금천씨 (少昊金天氏) 가 東夷族이라는 事實이 中國 古傳에 기록되 어 있습니다.
 
'고사변'(古史辯)만 보더라도, 이 책은 우리가 쓴 책이 아니고 中國에서 나온 책입니다. 백 화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면 "少昊氏는 동이계야 (東夷系也), 동이지인 (東夷之人) 이 라" 고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태호 복희씨 (太호伏犧氏), 여와씨 (女蝸氏), 少昊金天氏가 

全部 東夷族이라는 것을, 중국 사람 자기네 손에 의해 밝힌 겁니다.

 

또 며칠 전에 朝鮮日報에 한번 나온 적이 있죠. 요령성에서 5 천년 전의 여신묘가 발굴됐는데 이 묘는 무덤이 아니라 사당입니다. 그리고 궁터도 발굴했다는데 이것들은 앞서 말한 당란이 발표한 유적보다 700 년이나 더 以後의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가지 事實을 놓고 볼 때, '三聖記'의 기록이 객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면, 더 이상 무슨 반증이 필요하겠습니까?

 
少昊가 다스린 나라의 서울은 요동 반도에 있고, 산동 반도까지 다시 말해서 발해만 안쪽의 그 광활한 지역을 檀君 以前에 벌써 統治하였다는 기록도 있는데, 5 천년 前의 거대한 宮터 가 발굴되었다면 이는 부족 시대 미개 사회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죠. 강력한 정치 세 력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중국 역사를 말하는 사람 들이 주(周)나라 이전은 다 신화 시대로 몰아붙였지만 은허에서 갑골문이 발굴된 이래, 또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볼 때 요(堯), 순(舜), 하(夏), 은(殷) 등의 歷史를 認定하 지 않을 수 없고,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를 신화적 인물에서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立場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事實들은 이미 '시전'(詩傳)' 서전'(書傳) '맹자'(孟子)를 보면 다 나와 있습 니다. 그 가운데 정문으로 적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문헌을 볼 때에는 상당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識者愚患이라고, 조금 안다는 학자들이 그 시대의 변천과 상황에 따라 그 리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을 신화니 비과학적이니 하면서 호도 한다는 것은 대단히 危險한 일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로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고고학자들이 역사 를 보는 시야는 걸핏하면 청동기를 가지고 자(尺)질을 하는데, 즉 청동기 개시 년도에 따라 한 국가의 역사 시대가 결정된다는 얘기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우리 나라 청동기 시대의 상한을 3 천년밖에 안보고 있죠. 그러니까 3 천년 以前에는 國家라는 게 있을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한강 이남에서 우리 학자들이 발굴해 낸 유물들이 3 천년 이상 소급 을 못하니까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檀君 朝鮮의 根據地는 도대체 어딥니까? 백두산 아래 아사달입니다. 阿斯達은 그럼 어디냐? 바로 지금의 하얼빈인데, 그 地域을

발굴하 고 있는 북한의 학자나 소련 학자들이 발표하는 내용을 한번 들어봅시다.

 
지난 78 년 8.14 자 北韓 '중앙통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우리 조선족이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2 천 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 千年 前이다. 그때 농가의 유적도 발굴했 고 농기구와 오곡 씨앗까지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蘇聯 학계는, 세계에서 가 장 활발히 韓國學을 연구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발간한 유 엠 푸진이 쓴 '古朝鮮' 이란 冊을 보면 "조선족은 4 천년 前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다. 단군왕검이 있던 유적지도 발굴했고

檀君朝鮮 時代 中央 行政機關의 유적지도 발굴했다" 고 했습니다.

 
이렇듯 국내의 여러 문헌뿐만 아니라 국외의 학자들이 연구하고 발굴해서 우리의 역사

上限 을, 그리고 단군 조선의 건국 사실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해 주는데도, 우리가 여기

앉아서 휴전선 이북을 못 가본다고 해서, 가서 발굴을 못해 보았다고 해서, 우리의 청동기가 3 천년 이상 소급할 수 없다고 우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民族思想의 原形 홍익인간(弘益人間) - 우리가 일찍이 南北 5 萬里 東西 2 萬里라고 하는 광활한 지역을, 桓雄天皇 時代가 1565 년 동안 檀君朝鮮 時代가 2096 년 동안 지속되면서 통치했다는 歷史的인 事實은 예사로이 生覺할 問題가 아닙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桓雄天皇 時代까지는 그만두고라도, 檀君朝鮮 時代만 해도 2096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하는 것은 東西洋 歷史를 통틀어서, 아니 人類 歷史가 생긴 이래 한 個의 王祖가 2 千年간 지속된 그러한 歷史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국경을 같이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를 살펴봅시다. 夏 銀 周는 東夷族이니까 말할 필 요도 없고, 그 以後로 300 년 以上 持續한 왕조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같은 시대의 중국 역대 왕조는 300 년도 채 못 가 전부 亡해 버렸는데,

같은 시대의 우리나라는 2 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간직한 채 그 넓은 지역을 어떻게 통치할 수 있었느냐. 解答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偉大한 哲學이 있었기 때문에 可能했던 겁니다.

 

偉大 한 哲學,

 

그 哲學은 바로 홍익인간 (弘益人間) 입니다.

 
우리나라 敎育法 第 1條에 弘益人間의 理念으로 敎育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 고등학 교 교사들을 대상으로한 지방 강연에서, 대한민국 교육법 제 1조가 뭐냐 고 하니까 대답하 는 사람이 없어요. 서글픈 일입니다. 3~40 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교육 이념이 무엇인지,

弘益人間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왔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쯤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 까? 弘益人間이라는 용어는 三國遺史에 最初로 등장합니다. 桓因이 桓雄을 불러 놓고 삼위산과 태백산 그 일대가 弘益人間할 수 있는 곳이니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 천명과 통치자의 신표로 천부삼인 (天符三印)을 주어서 보냈다고 '삼국유사' 첫머리에 나옵 니다. 이렇듯 弘益人間이란 용어의 出處는 桓因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그런데 요사이 툭하면 단군을 팔고 다니는 사람들이 단군의 홍익인간을 떠들어대지만, 實은 桓因으로부터 弘益人間이 나와서 桓雄 이후 檀君이 계승하고 오늘날 大韓民國이 이를 그대 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법 제 1조가 홍익인간입니다.

 

法 얘기가 나왔으니 우리나라 憲法 前文을 살펴볼까요? 第一 먼저 "유구한 민족사 빛나는 문화 그리고..." 로 시작은 잘했 는데 맨 끝이 좋지 않아요. 1980 년이 뭡니까? 이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1980 년밖에 안되었다는 얘깁니다. 자유중국 헌법에도 서기를 쓰지 않고 중화민국 75 년이라고 쓰며 기 독교 목사인 유태인도 연하장을 보내는데 서기를 쓰지 않고 이스라엘 년도 5700 년 이렇게 쓰는데 우리 나라는 왜, 국통이 없습니까? 1980 년이 왜 들어갑니까?
 
또 한가지, "3 1 운동의 숭고한 독립 정신을 계승하고..." 해 놓았는데 기미년의 선언서를 보 면 년도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조선건국 4252 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조선은 바로 단군조선이지 딴 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헌법 전문 맨 끝에는 1980 년이니, 앞뒤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얘기죠.
 
그렇다면 構體的으로, 사람을 크게 이롭게 할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조화경 (造化經), 교화경 (敎化經), 치화경 (治化經),

이 삼화개천경 (三化思想開天經) 이 바로 弘益人間의 構體的인 內用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造化經을 '천부경' (天符經), 敎化經을 '삼일신고' (三一神誥) 라 하며

治化經을 '참전계경' (參佺戒經) 이라고 하는데 이 3大 經書가 그 基本입니다.

우리나라 1 萬年 歷史의 뿌리가 곧 이 3 大 經典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存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이 三大 經典에서 世界 모든 思想이,또한 中國에서 말하는 所謂

儒敎思想  道敎思想이 派生되어 나갔습니다.

 
構體的으로 反證을 提示할까요? '孟子'에 나오는 儒敎의 5倫은 아무리 儒敎에서 썼다고 해 도, 미국에서 국어로 쓰는 영어가 미어가 아닌 영어이듯, 그 出處는 東夷族입니다.

 

말씀드리죠. 순(舜)임금이 글(契)을 불러 가지고 사도(司徒:문교장관)를 命하고 人間에게

倫理를 가 르치라고 해서 契이 만든 게 바로 5倫입니다. 契은 東夷族이입니다. 그리고 舜임금도 '맹자' 에 보면 "저풍 (諸馮) 에서 태어나 부하 (負夏) 땅에 옮겨 살다가 明祖에서 죽었는데 그는 東夷族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五倫을 선포한 글(契) 이나 五倫을 선포케 命令한 임금 舜 역시 東夷族입니다. 따라서 말할 것도 없이 三綱五倫의 出處는 東夷 文化입니다.

 
孔子는 어떤가요. 孔子는 東夷族의 血統으로 殷나라 王族인 송미자 (宋微子)의 後孫인데, 현재 홍콩 대학의 임혜상 교수나 대만 대학의 서량지 교수도 "殷나라는 東夷族이다" 하였고 ' 고사변' 에도 같은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또 孔子 自身도 '論語' 에서 말하기를 "술이부작" (術而不作) 이라 하여 "나는 堯와 舜의 思想을 繼承해서 書述했을 뿐이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고 밝혔고 中國의 古傳 '초사' 를 보면 "황제 (黃帝)는 백민 (白民) 에서 태어나고... 그는 東夷族에 屬한 사람이다" 라고 하였으니 黃帝의 5世孫인 堯임금이 東夷族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이족인 요와 순임금의 사상은 동이 사상이고, 이를 계승한 역시 東夷係인 공자의 유교가, 우리의 弘益人間 思想에서 派生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습 니까?
 
道敎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자 (老子)가 皇帝의 思想을 이어 받았다고 해서 황노지교 (黃老之敎) 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東夷族인 皇帝의 思想, 卽 東夷 思想을 이어받은 것이 老子의 道敎이고 보면, 비록 중국 대륙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안 다소 變質되어

高句麗 時代 때 逆收入되어 들어왔다고 해도 亦是 그 뿌리는 우리의 弘益人間 思想입니다.

 
그렇다면 佛敎 思想은 또 어떤가 살펴보기로 하죠. 釋家 以前에 우리나라의 전불시대 (前佛時代)에 對해서는 아도화상의 비문과 '삼국유사' 그리고 지공선사 (指空禪師) 의 천보산 희 암사 중수문에 다 나와 있습니다. 釋迦 自身도 '大放光佛華嚴經' 보살 주척품에서 말하기 를, "海東 金剛山에 법기 (法起) 라는 보살이 있어서 1200 대중을 거느리고 法을 說하고 있 는데 그 佛法이 거기에 예로부터 있었다 (從昔己來)" 고 證言하고 있으니, 이는 釋迦 出現 以前에 우리 나라에 이미 前佛時代 卽 가섭불 (迦葉佛)時代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 겠습니까? 迦葉佛이 앉아 法을 說한 연좌석 (宴坐石)이 新羅의 月星 동편 용궁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記錄이 '옥룡집' (玉龍集) 과 '자장전' (慈藏傳) 에 있습니다.
 
基督敎 思想에 對해서는, 먼저 이 말씀부터 드려야 되겠습니다. 4700年 前에 나온

'황제내경소문' (黃帝內經素問) 편을 보면 東夷族이 살고 있는 이 지역 卽 "東方은

이 地球가 形成될 때 最初로 文化가 發生한 곳 (東方之域天地之所始生也)" 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누가 뭐라 고 해도 地球上 文化의 最初 原産地는 東夷族이 살고 있는 東方地域이라는 거죠.

 
基督敎의 한 單面만 말씀드리자면 法律學者인 東京 大學의 나까다 (中田薰) 敎授가 '古典法 에 根據한 문화동원론고 (文化東源論考)' 에서 말하기를, 모세의 5經의 出處를 調査해보니까 함무라비 法典 속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나까다 교수는, 모세하고 함무라비 사이에 500 년 의 연조가 있지만 모세의 5경은 함무라비 법전을 계승한 것이고, 이는 또 수메르法에서 나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수메르의 歷史 始初가 지금으로부터 5500 年 前인데, 남은 과제는 수메르族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問製입니다.
 
英國學者 크래머 (Kraemer, 1897-) 와 日本의 우에노 (上野景福) 교수가 발표한 것을 綜合 해 보면, "수메르族은 메소포타미아에서 自生한 民族이 切對 아니고 東方에서 移動해 왔다. 그것도 文字를 가지고 왔는데 바로 太호복희가 쓰던 팔괘부호 (八卦符號) 와 흡사한 文字를 가지고 5500 년 前에 西쪽으로 옮겨 왔다" 는 것입니다. 복희와, 수메르에서 최초로 우르 (Ur)국을 건설한 왕조나 최초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에 문화국을 건설한 엔릴 (Enril) 영웅 이나 거의 같은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5500 년 前에 복희文化를 가지고 東夷族이 西쪽으로 갔다는 얘기가 됩니다. 무엇이 그것을 立證하는가? 수메르 말이 우리 말하고 같은 것이 많이 있다는 게 最近 美國에서 硏究가 돼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메르라는 말 자체가, 곧 '소머리' 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송화강을 우수하, 음만 그대로 따면 속말수라고 부릅니다. 소머리江이다 이거죠.
 
뿐만 아니라 '三一神誥 '신훈(神訓)에 나오는 "신(神)은 재무상일위 (在無上一位) 하사 유대 덕대혜대력 (有大德大慧大力) 하사 생천(生天) 하시며 주무수세계 (主無數世界) 하시고..." 하는 것이 바로 完璧한 基督敎의 一神思想 그대로입니다.

 

또 '參佺戒經' 總論에 보면 "여화神 이 흙으로 사람 形像을 만들고 魂을 불어 넣어 7日 만에 이루어 마쳤다. (女禍鍊造成而注之魂七日而成)" 하는 것은 基督敎 創世記 2장 7절하고 꼭 같습니다. 여호와와 여와, 야희와 여희등은 音도 같고 行跡도 같습니다. 이러한 內容들이나 수두 제단에 治外法圈 地帶가 있다는 내용, 그리고 冬至에 羊을 잡아 붉은 피를 문설주에 바른다는 舊約의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冬至에 붉은 팥죽을 끓여 문설주에 바르고 하는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한 風俗들이 여기서 건너가 傳해 내려온 거죠.
 
西洋 思想을 綜合하면 헬레니즘헤브라이즘, 卽 人本主義神本主義  둘인데 소급해

올라 가면 이 두 가지 思想이, 수메르 文化에서 나왔다는 結論이 내려집니다. 이러한 神本과 人本 思想은 우리의 神人思想이 둘로 나뉘어진 것이지요. 이렇듯 地球上 모든 思想의

뿌리가 東方에서 始作되었기 때문에 "빛은 東方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世界的으로 보아서 9 千年이 되는 歷史 民族이 어디 있습니까. 西洋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수메르族이 5500 年 밖에 안됐는데... 이런 歷史가 없죠.

 
第 4氷河期 以前의 歷史야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몇億年 前의. 유물이 지금 발굴된다고 해도 그건 지금 우리 人類하고는 關聯지을 수 없습니다. 第 4氷河期가 이 地球를 휩쓸고 간 에 살아 남았던 우리의 아담과 이브 설화는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最初에 천하(天河)의 東西에 있다가 칠월 칠석날 만나 가지고 五色 人種을 낳았다" 는 것이고, 이것이 '신사기'의 기록을 보면 366 甲子에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한 甲子가 60 年이니까 卽 21960 년 에 

第 4氷河期가 물러가고 第一 生命力이 强한 한 男性과 女人, 나반이와 아만이 즉 나반이와 아만이가 인류의 시초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이러한 版圖에서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東方 地域은 天地之所始生也라" 우리 동방 동이족이 살고 있는 땅은 이 지구가 형성될 때 최초의 문화가 발생 된 곳이다. 하는 점이 여실히 실증이 된다 하겠습니다. 또 '황제내경' 소문편에 보면 "鍼術도 亦是 東方으로

부터 전해 왔다 (鍼石亦從東方 來)" 라고 했듯이 韓醫學이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새 한의학의 한자를 "漢"에서 " 韓"으로 바꿨다고 하는데 當然히 그래야 합니다. 진작 바꿨어야 했어요.

 
漢文이라는 글자도 마찬가지에요. 자꾸 이렇게 한문(漢文)이라고 쓰니까 중국 글이라고 생각 하는데, 중국이 漢나라 라는 국호를 정할 때 이 한문이 있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지, 없었다 면 어떻게 漢나라 라는 국호가 생깁니까? 그러니까 漢나라가 있기 前에, 이미 이 글자 韓文 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글이라는 사람하고 창 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는데 둘 다 東夷族이지 않습니까?. 東夷族이 만들었으면 동이족 글 이지 왜 중국 글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地球上 모든 思想의 源泉은 弘益人間 思想입니다.

그 弘益人間 思想의 內容은 '天符經' '三一神誥' '參佺戒經' 입니다.

다시 말하면 造化經, 敎化經, 治化經이 이 原理 속에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루마니아 사람 天主敎 神夫인 게오르규 (Gheorghiu 1916~) 가

"弘益人間이란 檀君의 統治 理念은 이 地球上에서 가장 强力한 法律이며 가장 完全한 法律" 이라고 지난 1986 년 4월 18 일자 프랑스의 유력한 주간지 '라프레스 프랑세스' 지를 통해 발표한 겁니다.

神夫 옷을 입고 聖堂에서 밥을 먹는 사람이 왜 모세의 10 戒가 最高라고 말하지 않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또 그는 우리나라에 왔다 가면서 "韓國 民族이 낳은 弘益人間 思想은 未來 21 世記의 太平洋 時代를 主導할 世界의 指導 思想이다" 고 力說했습니다. 그 以上 얼마나  어떤 評價를 내리겠습니까?

 
우리는 燈下不明이라고, 지금 주걱 들고 주걱을 찾고 있습니다. 칸트, 헤겔을 찾고

獨逸哲學 어쩌니 하고 아까운 時間만 다 虛費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보배는 왜 하나 도 개발 못하고 있느냐 이겁니다. 西洋 사람들이 먼저 눈을 뜨고 "미래의 세계를 지배할 보배, 최고의 이념이 여기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弘益人間 思想이다" 고 하는데 우리 自身은 그걸 모르고 外國 思想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彷徨하고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러다가 자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까!

 
"地球上에 있는 모든 思想들은 實로 弘益人間 思想 속에 內在해 있는 것이지,

결코 弘益人 間 思想하고 對立된 思想이 아니다. 가령 構體的으로 例를 들자면

儒敎나 佛敎  基督敎라는 것은 弘益人間 思想과 對立的인 存在가 아니고,

弘益人間 思想의 內在的인 思想이다" 하는 것을 거듭 强調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는, 우리나라의 歷史的인 狀況이 대단히 如意치 않고 또 다른 나라 와 달리 적어도 2 천년 동안 外來 勢力에 밀려 우리의 歷史를 바로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 다고 하는 事實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記錄에 담겨져 있는 우리 民族 思想史的인 內容이 너무나 엄청나게 誤導되어 있었다는 事實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中國的인 事大主義 史觀 에 依해서 우리의 歷史가 많이 바뀌었고, 그 以後에는 日本 사람들의 植民地 敎育 政策에 依해 우리의 歷史가 엄청나게 變造되었으며, 光復 以後 에는 西區 文化의 洪水에 밀려서 바른 史觀을 잡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만, 분통스 러운 것은 이 問題가 언제 바로 잡혀질지 期約이 없다는 점입니다.


1998년 5월 初等學校 敎師 한분이 政府를 相對로 所訟을 걸었습니다. 더 以上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칠 수 없다는 理由였습니다. 檀君은 分明 實存人物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는 마치 虛構의 人物처럼 記述되어 있는데, 이것을 올바로 고쳐달라는 것이 그 분의 要求였습니다.

檀君에 對한 問題로 所訟이 걸린 것은 이번이 벌써 두 번째입니다. 光復直後에도 이와 비슷 한 일이 있었는데, 우리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지도 않던 단군기사를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 는 것이 그 때의 이유였습니다. 어찌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生覺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이것은 淸算하지 못한 우리의 아픈 過去와 關聯이 있습니다. 日제末期에 日本은 우리社會 全般에 걸쳐서 民族抹殺政策을 폈습니다. 이는 歷史에 있어서도 例外가 아니어서, 이때 推進 된 것이 바로 '朝鮮史 編纂事業'이라는 것입니다. 世界 歷史上 유래가 없는 '他民族에 依한 歷史 書述'이라는 부끄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우리民族을 아예 없애 버리려했던 그들이 얼마나

客觀的으로 우리의 역사를 서술했을까요? 이 事業의 性格이 어떠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1922년 朝鮮總督府에서 發行한 敎育 施策을 살펴볼 必要가 있습니다.


"먼저 朝鮮사람들이 自身의 일, 歷史, 傳統을 모르게 하라. 그럼으로써 民族魂, 民族文化를 喪失하게 하고, 그들의 祖上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 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後孫에게 가르쳐라. 朝鮮人 靑少年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輕視하고 蔑視하는 感情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氣風으로 만들게 하라.

그러면 朝鮮人 靑少年들이 自國의 모든 人物과 사적(史蹟)에 對하여 否定的인 知識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失望과 虛無感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日本의 史跡, 日本의 文化, 日本의 위대한 人物들을 所介하면 동화(同化)의 效果가 至大할 것이다. 이것이 帝國 日本이 朝鮮人을 '반(半)日本人'으로 만드는 要訣인 것이다."


이런 意圖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朝鮮史 35券이며, 이것이 植民史學의 實體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光復後 마땅히 廢棄되어야 했을 이 冊이 우리 史學界를 支配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사 편찬사업에 참여했던 이병도씨는 史學界의 巨頭로 써 굴림하게 되었고, 서울大學敎에서 第子까지 길러내게 되었다는 事實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의 제자분들이 우리史學界에서 主導權을 잡고 至大한 影響力을 發揮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悲觀的일 수 밖에 없느냐 하면, 現在 우리나라 각 대학의 강단에 서있는 史學科 敎授들의 大多數가 日帝下에 만들어졌던 植民史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또 그 밑에 서 배운 사람들의 絶對 多數가 各 中高等學敎에서 그러한 史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렇게 우리의 歷史的인 狀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라도 알고 계신 분들이,

과연 우리 國民들 가운데 얼마나 될까 하는 것도 生覺해 볼 問題죠.


하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史學界의 風土속에서도 眞情한 우리歷史를 찾고자 努力하는 분들이 계셨다는 事實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분들의 努力에 힘입에 조금씩 우리歷史의 참모습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밝혀지고 있는 우리歷史의 참모습을

좀 더 많은 분들이 아셔야 한다고 生覺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