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명 선생님에게 올리는 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요즘 선생님을 생각하면 죄스러운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습니다.
저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시나리오 작가로,
존경받는 원로 작가로 노후를 편히 지내셨을 분이 제가 대통령만 되지 않았어도
최소한 후배 언론인들에 의해 부도덕한 이권 개입 의심자로 매도되는 일은 없었을 분이...
일흔을 내다보는 연세에 당하고 계실 선생님의 고초를 생각하면 저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겠지요.
“이제 대통령이 되셨으니 나의 고생 같은 작은 일은 무시하고 더 큰 일에 신경을 쓰시라. 나에게도 죄가 있지 않으냐. 인간 노무현을 좋아한 죄.”
하지만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 노무현을 좋아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좋아하셨고 언론인으로서는 ‘진실이 진실로 전달되는 나라’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 마음이셨기 때문에 저희와 첫 인연이었던 88년 KBS 노조 강연에서
저의 포부 하나만 보시고 ‘조건 없이 당신을 돕겠다.’라는 편지를 보내셨던 것입니다.
저와 꿈을 함께 했기 때문에
방송국이라는 좋은 직장을 버리시고 자원봉사라는 고생길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선생님?
93년인가 제가 비서들을 통하여 후원회장이란 자리는 돈을 알고 사업을 아는 사람이 적당한 자리라고 했을 때 선생님은 ‘내 평생 글만 알아서 구멍가개 하나 운영해 보질 못했다. 돈도 모르고 수완도 없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마음이 있다. 후원회장은 성심(誠心)으로 하는 자리다. 라고 말씀하시며 끝까지 추원회장 자리를 내 놓지 않으셨습니다.
당시 민주당 출입기자들에게 조차 ‘저로부터 돈 한 푼 받은 적도 없고 저에게 돈 한 푼도 모아 준 적이 없는 이상한 후원회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그런 선생님께서 제가 대통령이 된 후 갑자기 이권 개입 및 부동산 투기 의혹 의심자로 매도되고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선생님?
사무실에 돈이 없어 비서들이 기죽어 있을 때마다 저희들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 ‘나 용인에 조상에게 물려받은 금싸라기 같은 땅 있어. 그것만 팔리면 우리 돈 걱정 안 하고 정치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는 선생님의 용인 땅은 돈하고는 거리가 먼 땅이라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땅을 담보로 한 은행 빚으로 근근이 가계를 꾸리고 계신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용인 땅이 최근에 용인지역 개발의 여파로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매력적인 땅이 되고 그래서 맺게 된 계약서 몇 장 때문에 선생님이 갑자기 언론에 ‘대통령을 등에 업은 이권 개입 의혹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나라당 출신의 용인시장과 경기도 지사가 허가권을 쥐고 있는 곳에서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던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이고 ‘진실이 진실로 전달되는 나라입니까?
선생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겠지요.
‘내가 겪은 고초는 내가 충분히 견딜 수 있으니 참여정부의 성공을 위해 언론과 긴장관계를 푸는 것이 어떻겠소.’
선생님!
선생님의 마음은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지만
그 문제에 관한 한 원로 작가이신 선생님께서도
이 나라의 언론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크게 한번 보십시오.
옛날 정권과 언론의 관계는 정권에 의한 탄압, 언론에 의한 정권 길들이기 아니면 밀원의 관계였습니다.
이렇게 한 편의 의한 굴복 아니면 밀월이라는 관계는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느 것도 적절한 관계가 아닙니다.
언론과의 관계측면에서 저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건강한 긴장관계입니다. 건전한 라이벌 관계입니다.
언론은 언론의 자리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대통령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관계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대는 과감히 협조하지만 서로 야합하여 나라와 국민을 소외시키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건강한 긴장관계를 위해 저는 노력할 것입니다.
옛날 대통령들이 가지려 했던 언론에 대한 음성적이고 초법적인 권한은 가지려 하지도 않고 쓰려 하지도 않겠습니다.
그것은 역사를 되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정당한 권한과 독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반론권과 오보 대응권을 가지고 언론문화 발전에 일조하겠습니다.
원칙이 필요할 때는 원칙으로 하겠습니다. 참고 기다려야 할 때는 인내로서 하겠습니다.
가장 힘든 그러나 가장 바람직한 관계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일부언론의 잘못된 보도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아니면 말고’ 식의 의혹 제기로 대통령의 주변을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굴복시키려 하는 방법입니다.
과거 정권에도 있었고 최근 저와 관련해서 있습니다.
최근의 사례로 보면 처음에는 저의 친형인 건평 씨에 대해서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대단한 범법 사실이 있는 것처럼 의혹을 제기하다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지금은 기사가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은 선생님입니다.
저는 6월2일 기자 회견에서 대통령 주변에 범법 사실이 있으면 그 누구라도 처벌하겠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한 의혹제기는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으니 중단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의혹제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저도 이러한 의혹 제기의 대상은 선생님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마지막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부당한 권력에 제가 굴복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없을 것이기 대문입니다.
선생님.
법 이전에 상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왕왕 대통령 주변에 인물이 범법 행위를 해도 대통령 주변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는 나쁜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그 누구라도 법을 어기면 법에 따라 처벌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랄한 범행을 저지르고 검찰에 체포된 사람도 피의자 신분일 때는 언론에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권입니다.
그런데 저의 주변의 사람들은 단순한 의혹으로도 언론에 실명이 거론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의혹이 거짓으로 판명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이미 명예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습니다.
단지 대통령 주변이라는 이유로 인권이 너무나 쉽게 침해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든지 감수할 수 있다고 하시겠지만 저로서는 대통령 이전에 한 인간으로 너무나 죄송한 일입니다.
선생님.
저는 이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당한 의혹 제기에 의해 사람들이 형벌을 받는 일이 없는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신문을 펼치면 대통령으로부터 일반 국민까지
‘내가 이것만 고치면 2만 불 시대가 곧 오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아침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과 뉴스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너희들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지 않니?" 라고 물을 수 있는 저녁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 땅에는 오직 투철한 사명감으로 현실적인 어려움과 싸우고 있는 많은 양심적인 기자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속에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기사를 쓰는지 누구를 위해서 기사를 쓰는지가 명확하고 또 그 이유가 정당한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그런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 저는 언론이 칭찬해 주고 싶도록 국정을 잘 수행하겠습니다.
언론에서 소모적인 비판의 빌미가 되는 일이 없도록 저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저의 주위를 철저히 단속하겠습니다.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언론 문화를 위해 꼭 필요한 건강한 긴장 관계를 끝까지 유지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저로 인해 생긴 선생님의 피해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2003년 6월 5일 새벽
대한민국 새 대통령 노 무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