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문재인, 두 분만이 희망이었죠” 신귀영 간첩단 사건…국가배상금 모아 1천만원 기부
군사정권 시절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은 전직 외항선원 가족들이 국가 손해배상금 중 1천만 원을 모아 15일 재단에 보내 왔습니다.
신귀영 등 피해자들은 지난 3월 25일 부산고법으로부터 1980년 간첩혐의로 15년형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2009년 8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후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항소심)에서 “피고인 대한민국 정부는 원고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받았습니다.
신귀영씨는 “너무 늦었지만 결실이 나와 눈물이 흘렀다”며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과 특히 1994년 처음 이 사건을 맡아 사비로 일본에 가서 자료수집을 하는 등 헌신한 문재인 변호사께 감사하다”고 전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故 서성칠씨를 대신해 가장이 된 장녀 서성실씨도 “대법원도 기각한 사건을 재심 청구할 기회를 준 건 참여정부에서 제정한 특별법 덕분”이라며 “노무현, 문재인 두 분이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신귀영 간첩단' 조작사건
이른바 ‘신귀영 간첩단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이 비극은 1980년 2월 하순 외항선원이던 신귀영씨 등 일가족이 부산경찰국 대공분실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연행 돼 구속되면서 비롯됐습니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재일 동포에게 돈을 받고 국가기밀을 넘겼다”는 것이었고 당시 경찰들로부터 물고문과 전기고문, 무차별 구타를 당한 끝에 허위로 간첩혐의를 인정했습니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혐의가 적용된 이들은 1981년 6월 대법원에서 신귀영씨와 신씨의 사촌 여동생 남편인 서성칠씨는 징역 15년, 신씨의 당숙 신춘석씨는 징역 10년, 신씨의 친형인 신복영씨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각각 확정됐습니다,
故 서성칠씨는 1990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고 친형인 故 신복영씨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0년 사망하는 등 정권안보를 위한 국가 공권력의 만행으로 부산 기장에서 평화롭게 살던 일가족이 풍비박산된 비극을 겪었습니다.
"억울한 사람들의 길을 열기 위해"
1994년에 만기 출소한 신귀영씨에게 먼저 따스한 손길을 내민 건 천주교인권위원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은 천주교인권위원회는 당시 부산경남지역 시국사건을 전담하다시피 하던 문재인 변호사를 소개했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입니다.
1994년과 1997년 두 차례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하급심에서는 받아들여 졌지만 유죄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급법원에서 잇따라 기각됐습니다.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시 상황은 최근 출간된 <문재인의 운명>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판결문과 대책위가 조사한 자료만 훑어도 조작된 사건임이 분명했다. 그때만 해도 그런 사건에 대해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다"며 "그런 만큼 재심성공 사례를 만들어 내야 다른 억울한 사람들도 길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 사건을 맡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심사유를 다르게 구성해 다시 재심청구를 하기로 했다. 새로운 재심사유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과거 간첩사건 재판 때 간첩 행위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던 증인을 소환했다.
그는 그 증언이 고문에 못이긴 위증이었다고 실토했다. 이를 근거로 2차 재심청구를 한 것이 99년 7월이었다. 이번에도 부산지법은 재심개시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부산고법이 검찰의 항고를 받아들여 재심개시결정을 취소했다."
피해자들은 "너무나 억울했지만 더 이상 소송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당시 심경을 전합니다. 서성실씨는 "그러나 사비를 들여 자료를 수집하는 등 사건에 매달린 문재인 변호사 때문이라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과거사 위원회’의 출범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2005년 국회에서 여야 합의를 거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과거사 위원회)가 발족하면서 국가공권력에 의해 피해를 본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동시에 참여정부 들어 경찰청이 자체 구성한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여러 사건 관련 기록 등을 찾아내 국가권력의 여러 불법성을 확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노 대통령이 보수세력의 강한 반발에도 '과거사위원회' 설립을 추진한 것은 국가가 저지른 불법적 활동에 대해 사과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아픔을 안으려는 조치였습니다.
신귀영씨 일가가 당한 억울한 누명도 문재인 변호사의 의지와 함께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의 성실한 활동 덕에 풀 수 있었습니다. 신귀영씨는 "과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고문을 가한 형사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게 많이 찾아가 설득했다"고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2009년 2월 과거사위원회는 신귀영 일가족 사건이 조작됐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를 근거로 세 번째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그해 8월 법원은 가해 형사의 고문조작 증언과 증거 불충분을 근거로 무죄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자행한 불법 구금과 고문으로 피고인들이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받은 데 대해 만시지탄이지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습니다.
"공권력의 책임은 특별히 무거워"
노무현 대통령은 유독 국민에게 고개를 많이 숙인 지도자입니다. 특히 제주 4.3항쟁과 같은 국가 공권력이 주도해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대한 노 대통령의 엄격한 철학은 한 사과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2005년 11월 경찰의 농민시위 진압과정 중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인권위가 “공권력의 과잉진압이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자 노 대통령은 허준영 경찰청장에 대해 책임을 묻고 기자회견을 열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 사과문은 2008년 촛불시위 때 이명박 정부의 대응과 대비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공권력도 사람이 행사하는 일이라 자칫 감정이나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경찰에게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권력은 매우 특수한 권력입니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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