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십팔계(十八界)

장백산-1 2011. 7. 21. 22:35


십팔계(十八界):열 여덟 가지의 무리


"현실 속 나의 모든 인식활동"

'십이처'에 덧붙인 여섯가지 의식영역
물질·정신 참모습 보여집착 끊게 하는 담론


우리의 실존적 삶은 폭포수처럼 이어집니다. 우리 의식 역시 연속과 불연속의 지평을 오가며 삶을 열어가지요. 하루 24시간은 나의 삶의 총화입니다.

어제의 나의 삶은 오늘의 나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아울러 오늘의 나의 삶은 내일의 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요.

어젯밤 늦게까지 마신 곡차로 오늘 아침 내 삶은 한동안 취기 때문에 고생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이것을 좀더 넓혀 보면 전생의 나의 삶은 현생의 내 삶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동시에 현생의 내 삶은 내생의 내 삶에 깊은 영향을 주지요.

만일 우리 주위에 부도덕하면서도 잘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그가 지은 선업의 결과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현재의 부도덕으로 인해 내생에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 현생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당장 좋은 쪽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전생에 현재의 불만족스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어떠한 행위를 했겠지요.

하지만 현생의 노력은 내생의 결과를 보다 낫게 한다는 점에서 '고진감래'의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식주관(6근)과 인식대상(6경)과 인식작용(6식)의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이 세 가지(三事)가 만나(和合) 일체법을 형성합니다. 여기서 일체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만나 이루어내는 나의 삶의 총화입니다. 사실 일체는 이미 '십이처'만으로도 다 설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여섯 가지의 인식행위를 덧붙여 일체를 십팔계라고도 합니다.

즉 안근(眼根)으로 사물(色境)을 보는 활동 내지 그 영역인 안식(眼識), 이근(耳根)으로 소리(聲境)를 듣는 활동 내지 그 영역인 이식(耳識), 비근(鼻根)으로 냄새(香境)를 맡는 활동 내지 그 영역인 비식(鼻識),

설근(舌根)으로 맛(味境)을 맛보는 활동 내지 그 영역인 설식(說識), 신근(身根)으로 촉경(觸境)을 부딪치는 활동 내지 그 영역인 촉식(觸識), 의근(意根)으로 대상(法境)을 인식하는 활동 내지 그 영역인 의식(識識)으로 이루어지지요.

십이처에 보태어진 육의식계는 육근과 육경 사이의 활동 내지 인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계'는 경계라기보다는 '무리' 내지 '부류' 혹은 '종류' 내지 '층'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십팔계는 '현현중인 법'과 그것을 중심으로 그에 인연하고 있는 '한 무리의 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십팔계는 열 여덟 가지의 '부류' 혹은 '종류', 또는 '층' 내지 '무리'(類)를 의미하지요.

잡아함경의 '합수성유경'(合手聲喩經)은 십팔계의 속성에 대해 이처럼 설하고 있습니다.

"두 손이 마주쳐 소리를 내는 것과 같이, 안근과 안색을 인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부딪침(觸)이니, 부딪침과 함께 하면 느낌(受)과 지각(想)과 생각(思)이 생긴다.

그러나 이 모든 법은 나가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니, 이것은 덧없는 나요, 항상함도 아니며, 안온도 아니며, 쉽게 변하는 나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손은 감각기관이며 다른 한 손은 감각대상이죠.

그리고 손뼉 소리는 식(識)을 말합니다. 이처럼 내 안근과 안색이 인연하여야 비로소 안식이 생기는 것처럼, 내 의근과 법경이 인연하여 비로소 의식이 생기는 것이죠.

그런데 육근이 실체가 아닌 것처럼 육경도 실체가 아닙니다. 동시에 육식도 실체가 아닙니다.

십팔계설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참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집착을 끊게 합니다.

때문에 이 십팔계설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실체시하고 영원시하는 하근기를 위한 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화법이 대기설법이듯 현실적 인간의 인식활동의 전체가 십팔계라는 점에서 보면 이것을 낮은 교설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겠죠.

왜냐하면 '일체중생 실유불성'의 담론에서 보면 "근기는 끈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국대 고영섭강사]

출처 : 공덕총림 덕림회 법당
글쓴이 : 자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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