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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불멸과 轉生의 이유

장백산-1 2013. 5. 20. 13:07

 

 

 

영혼불멸과 전생(轉生) 의 이유 / 일붕 서경보 큰스님|영원한 나를 찾아서
유당 | 등급변경 | 조회 0 |추천 0 |2013.05.20. 11:18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v0h/2763 

 

 

 

靈魂不滅과 전생(轉生) 의 理由  / 일붕 서경보 큰스님

 

 불교에는 영혼불멸로서 업인(業因)에 依해 三界六途에 轉生 한다는

說이 있는데 과연 靈魂이 不滅하고, 轉生하는 理由는 무엇일까?

불교에서는 이것을 단상(斷常)의 이견(二見)이라고 한다.

 

所謂  단견(斷見)이란 身體가 滅할 때 靈魂도 따라서 滅하는 것이라고 固執하는것이고,

상견(常見)이란 身體가 滅하여도 靈魂만은 滅하지 않고 靈魂은 常住不變하여

人間의 靈魂은 언제나 人間으로,

畜生의 靈魂은 언제나 畜生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人間의 靈魂이란 身體의 勢力이라고 하지만

勢力이라는 것은 感覺과 思想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힘(勢力)에는 물력(物力)과 심력(心力)의 두가지 있어

그 感覺과 思想을 갖는 것은 心力에 속하는 것이지만,

物質論者는 物力 만을 알고,

物力 以外에 心力이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身體가 滅하면 그 心力도 함께 滅한다는 것이다.

 

그 身體는 地水火風과 같은 4元素가 集合한 것으로서

그 物體인 身體가 離散함과 同時에 그 勢力이 離散함은 當然한 理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物質論者는 物質의 集合 離散을 論하지만는

그 集合은 어떤 原因에 依해  離散은 어떤 結果에 依함을 알지 못한다.

모르는 까닭에

自然히 遇然이라고 한다면 原因 結果를 論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原因의 原因  結果의 結果는 어떤 것이나고  따질 때에는 自然히 遇然이라고 피할 뿐이다.

이것은 本來부터 過去, 未來를 說하지 않는 까닭에 對答이 窮하게 되는 것이다.

 

因果의 原則이 그렇다면,卽  身體의 勢力으로써 靈魂이라고하는 說은 형이하(形而下)의 理論으로서,

형이상(形而上)의 靈魂의 問題를 解釋할 수 없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또 形態는 혼(魂)의 質로서, 魂은 形態의 용(用)이다. 

形態가 滅하여 魂이 남을 理致가 없다고 운운하는 說도 亦是  物質論으로서

도저히 靈魂의 問題를 解釋할 수가 없는 것이다.

靈魂 輪廻의 說을 깨는 比喩로서 五穀草木의 씨앗이 變하지 않는 理致로써

靈魂의 常住不變을 豫證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論理다.

 

그 오곡초목 같은 것은 무정(無情)으로서 인류조수(人類鳥獸) 같은 것은 유정(有情)한 것이다.

無情은 無知無知 하기 때문에 그 씨앗은 變할 수 없으나

有情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有情인 靈魂이 輪廻해서 千態萬相의 形態를 갖게 되는것은

그 정(情)에  선악업(善惡業) 등이 있기 때문이다.

善惡業의 差別에 依해서 輪廻轉生 하는 것은 有情에만 限한 것으로서

非情인 草木에는 이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同人物로 보는 것은 不當하다.

 

有情界 中에는 상선벌악(賞善罰惡)의 規則이 있지만,非情界 中에는그런 일이 없다.

이 賞善罰惡의 權柄을 잡고 있는 것은 神이 아니며, 부처도 아니고, 自業自得의 因果에 있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이 되고, 오직 人間에 있는 業에 優劣이 있으므로

빈부귀천지우불초(貧富貴賤智愚不肖)의 차별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람이 죽어서 짐승으로 태어나고

혹은 살생의 업에 따라서 반인반축(半人半畜)으로 태어나고,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짐승이 되는 일이 흔히 있음은 무슨까닭일까?

 

이것은 理論보다 證據로서 다룰 것이 못된다.

또 혹은 인면수심,인면아심, 인면지옥심,인면수라심,인면천상심,인면보살심,인면불심 인 것이다.

마음이 가는데에 따라 形態를 變함은, 먼 未來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들 人間社會에서 實際로 그 現狀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靈魂不滅한 것으로서'등을 운운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불교 本來의 정사량(正思量)이 아니다.

참다운 佛子는 能히 이 理論이 맞지 않음을 알지마는

과문소견(寡聞小見)의 무리는 모두 斷常의 二見에 떨어져서

오래동안  佛祖의 혜명(慧命)을 잃었다.

 

斷常의 二見은 意圖의 소집(所執)으로서 佛道가 取할 수 없는 곳이다.

과연 세간의 불자들은 대부분 모두 外道의 사견(邪見)에 떨어졌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참으로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佛祖의 정사(正邪)는 무엇인가?

 

佛祖의 正見은 단상유무(斷常有無)의 二見에 빠지지 않는 데에 있다.

靈魂과 肉體는 滅하지만 靈魂은 滅하지 않는다고 執着함은

몸에 斷見을 일으켜서 마음에 상견(常見)을 일으키므로

斷常의 二見 이라고 한다.

靈魂이라는 單語는 불교에서는 쓰지 않는다.

만약 불교에서 적당한 單語를 말하라면

심식(心識)또는 신식(神識),혹은 영식(靈識)이라고 할 수 있다 .

卽 感覺 思想을 갖는 心想이지만

지금은 便宜上  亦是  靈魂이라는 單語를 빌어서 論하고자 한다.

 

여기서 佛祖의 正見에 對해서 말하건데, 佛祖는 언제나 말하기를

신심일여(身心一如). 성상불이(性相不二)라 함으로

몸은 滅해도 마음은 滅하지 않고, 마음은 不滅해도 몸은 滅한다고 한다.

 

不生에 生을 나타내고 불멸에 멸(滅)을 나타내기 때문에

상주(常住)를 論할 때에는 萬法이 모두 常住하며,

무상(無常)을 論할 때에는 萬法이 모두 無常한 것이다.

 

生이 一時的인 자리라면  멸(滅)도 또한 一時的인 자리이다.

그러므로 滅도 必境生이 아니며, 生에서 滅로 變하고 滅에서 生으로 變하며 ,

生滅이 끈임없이 相續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斷見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또 業因에 依해서 三界六途에 轉生함은 바로 佛祖의 說 이다.

그 業因은 신구의 (身口意) 3者에 依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받을 때에도 역시 身口意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自業自得 이라고 한다

 

그런데 혹은 몸과 마음은 함께 滅하지만 業力은 滅하지 않고

第2의 몸과 마음을 받는다는 사람도 있으나

業力은 몸과 마음을 떠나서 獨立하는 것이 아니다 .

 

業力은 반드시 몸과 마음에 附帶하는 것이다 . 그래서

業力은 능의(能依)이고  몸과 마음은 소의(所依)이다.

능소일체불리(能所一切不離)하기 때문에

三世의 因果善惡의 業報가 있음을 證明 하는 것이다 .

 

 

<불교명저)(서음미디어 발행) 제9권 

 "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발췌

*무진장-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