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緣生無生, 본래 일어난 바가 없다'

장백산-1 2014. 9. 28. 00:20

 

 

 

 

 

 

[일요법회 녹취] '緣生無生, 본래 일어난 바가 없다' - 2014. 8. 3 일요법회|영상법문 녹취록

 

 

 

 

 

 

 

네, 반갑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法堂에 와서 앉아 계시고, 또 여러분의 삶이 하루하루 이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事實은

그  ‘삶의 根源에서 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고,

그  어떤 것도 일어난 바가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말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이렇게 表現합니다.

本來 나온 바가 없다, 本來 일어난 바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事實은 한 法도 하나도 일어난 바가 없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事實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죠.

 

왜 그런고 하니, ‘因緣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無生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다.’ 이렇게 表現을 하는데요,

 ‘因과 緣에 依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固定된 實體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로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어릴 적에 뭐 냇가에서 나가서도 그렇고, 또 강가 주변 같은 데서도 아마 그런 것 같고,

모래사장이 이렇게 있단 말이죠. 그 모래사장이 이렇게 있으면 거기 가서 이제 어린애들이 맨날 뛰어놀잖아요.

 

여러분들도 많이 그러셨을 텐데, 그럼 이제 그 모래사장 같은 데,

여러분, 아마 바닷가 백사장 같은 것 생각하면 편할 텐데,

그런 데 가서 보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거기서 뭘 만들지 않습니까?

 

도로도 닦고, 신발을 도로 위에다 자동차인 것처럼 붕~~왔다 갔다도 하고,

또 그 옆에 뭐 빌딩도 만들기도 하고, 또 굴 같은 것을 뚫어서 굴도 만들고, 다리도 만들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것 주워 와가지고 '이것은 다리'라고 하면서 다리도 놓고 그러면서 만든단 말이에요.

 

제가 뭐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신발 가지고 도로를 다 닦아 놓고, 도시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

신발 가지고 마지막으로 붕~~하면서 노는 게 놀이의 어떤 大尾를 장식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生覺해보니까 신발 가지고 만든 자동차 중에 제일 그럴싸한 자동차가 고무신인데,

고무신을 뒷부분을 이렇게 앞으로 쑥 끼워 넣으면 이렇게 딱 돼 있잖아요?

이걸로 붕~~하고 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이게 참 진짜 차 같고, 왠지 모르게 살아 있는 것 같고,

이런 진짜 차인 것처럼 그렇게 가지고 놀던 記憶도 生覺이 나는데요.

그렇게 이제 아이들이 “야, 여기는 내 자리야” 이러면서

자기가 먼저 와가지고 都市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아침부터....

 

도로도 닦고 막 굴도 닦고 하면서,

그러다 보면 딴 친구가 와서 옆에서 옆에다가 자기 도시를 만들어요.

자기가 나름대로 길도 닦고 하면서 한참 만듭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만들고서 이제 자동차로 막~같이 노는 놀이를 하죠.

 

그러다가 내가 막 힘들여서 이렇게 이만큼 山을 만들어 놓고

山 밑으로 굴을 뚫어놨는데 거기로 자동차가 지나가야 하는데,

옆에서 만들던 친구가 잘못해서 갑자기 모래 山이 확 무너뜨리면

막 그냥 화도 내고 싸움도 하고, 그리고 또다시 놀고 이런단 말이죠.

그렇게 하루종일 정말 엄청난 都市를 하나 만들어 버립니다. 어린아이가....

 

그리고 그렇게 재미있게 논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만들고 나도 집으로 이제 딱 갔다가

그 다음날, ‘제발 있어야 되는데, 제발 있어야 되는데’ 하고 그 다음 날 딱 오면 다 무너지고 없단 말이에요.

都市가 다 무너지고 없습니다. 혹은 누가 또 이렇게 발로 차고 이러기도 하고, 신기하니까 해코지한다고

그러기도 하고. 그 事實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 事實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루 종일 친구랑 막 만들죠. 막 만듭니다. 신~나게 아주 멋있게 만드는데,

만들고 나서 이제 집에 돌아갈 때, “야, 저녁 먹으러 집에 가자” 할 때 그때 우리가 다 허물고 갑니다.

 

어차피 來日이면 다 허물어질 것을 다 아니까. 우리가 막 발로 차기도 하고,

막 깨부수기도 하고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서도 또 그 다음날 가면

또 이제 처음부터 하나 새롭게 都市를 또 만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짓고 부수고 이런 놀이를 한단 말이죠.

 

이것을 가만 生覺해 보면

우리가 ‘緣生이 無生이라는 말, 因緣 따라 生겨난 모든 法은 일어난 바가 없다.’는 事實을

比維로써 아주 잘 알게 해줍니다.

 

그 바닷가 모래사장의 立場에서 본다면, 모래사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와가지고

아무리 都市를 만든들, 道路를 막 멋있게 닦든, 4차선을 닦든, 2차선을 닦든,

建物을 막 좋게 만들든, 막 山을 만들든 事實은 아무 相關도 없죠.

 

그렇게 막 만들어놔도 저녁 때 되면 어차피 한방에 허물어질 것이고,

그렇게 모래사장 입장에서는 어차피 ‘不增不減’입니다. 거기 있는 모래 그대로 있고,

그런데 모래가 잠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헤집어졌을 뿐이지

實際  뭐가 만들어진 바도 없고, 무너진 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人間들이  봤을 때는 分明히 있단 말입니다.

이 아이들의 視線으로 봤을 때도 만들어논 것이 있어요.

내가 道路를 닦아놨는데, 또 都市를 만들어놨는데 그게 實際 있는 것처럼 生覺한단 말이죠.

만들어논 것들에게 意味 賦與를 하기 때문에, 實體化하기 때문에. 그리고 옆에 친구가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서

 ‘야, 넌 나보다 못 만들었구나.'  '네가 만든 도로보다 내 도로가 더 좋다.'

'네가 만든 굴뚝보다 내가 만든 굴뚝이 더 좋다.’  이렇게 이제 分別心을 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와 나를 分別하다 보니까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가 나오게 되고,

또 더 좋은지 안 좋은지도 나오게 되고, 이렇게 分別해서 우리는 認識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다 意味 賦與를 하기 때문에 친구가 옆에 와서 이걸 무너뜨리면 마음이 괴로워가지고

막 싸우기도 하고, 주먹으로 한 대 때리기도 하죠. 만들어논 이게 뭐라고...

 

모래사장 立場에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데,

우리가, 어른들이 봤을 때는 아무 일도 아닌데,

어린애들이 봤을 때는 이거 심각한 일인 거죠.

그러니까 이걸 무너뜨렸다고 막 가서 때리기도 하고 이런단 말이에요.

그런 行動은 왜 그러냐 하면 本來부터 이 都市가 實體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것을 만드는 동안은 實體化하면서 만들기 때문에, 意味 賦與를 하고 만들기 때문에

그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에 내가 意味 賦與를, 分別心으로 因해서

認識, 意識을 가지고 意味 賦與를 하니까 만들어논 그것에 意味가 賦與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옆에 친구가 무너뜨리면 이게 막 괴롭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는 意識을 가지고 分別함으로써 이 世上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實際 있는 거다 없는 거다' 이렇게 分別하면서 살지만

그러나 本來 텅~빈 바탕에서 본다면, 모래사장이라는 본바탕에서 본다면

어떤 일 하나도 일어난 바가 없는 거죠.

 

본바탕에서 볼 때는 뭐 만들어진 게 어디가 있고, 무너진 게 어디 있겠습니까?

본바탕에서는 무엇이 만들어진들 무너진들 그게 무슨 相關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들도 저녁때 돼서는 이런 事實을 다 알고 부수어버리는 거죠.

 

우리 사람들이 한 生을 열심히 살면서 그 한 生이 實體인 줄 알고서 人生을 살고,

돈도 벌고, 아파트도 사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하면서 목숨 걸고 살지만

죽을 때가 딱 되면 깨닫잖아요. ‘아, 이거 虛妄한 짓을 했구나  지금까지...

이렇게 죽고 말건데 내가 虛妄한 짓을 했구나.’ 하고 깨닫듯이

아이들도 낮에는 막 그냥 이게 진짜인 것처럼 生覺돼서 친구와 싸우면서 모래놀이를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저녁 때는 그냥 이게 虛妄한 줄 알고 다 헤집어놓고 집으로 간단 말이죠.

 

이 모래성을 쌓는 이 놀이와 우리 人生이 똑같이 닮았단 말입니다.

이 모래성은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죠, 그냥 모래인 뿐인데,

그냥 모래일 뿐인데 어린애들이 創意的인 生覺을 가지고 마음을 내서

이러한 집도 짓고, 이러한 도로도 만들어 낸단 말이에요.

그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은 本來 집이 있고, 本來 차가 있는 게 아니고

이 어린애들의 마음에서 생겨난 生覺일 뿐입니다.

 

이것이 '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에서 ‘내가 이것을 만들어야겠다.’하고 生覺하니까 만들어진 거죠.

또 이 마음을 가지고 만들어낸 겁니다.

이 世上 全部가 다 바깥에 어떤 實體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내가 實體를 만들겠다.’하고 生覺하니까 만들어진 것이고,

만들어진 것에 내가 意味 賦與를 하니까 거기에 意味 賦與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근데 그 意味 賦與를 하기 위해서는 因緣和合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因緣和合을...

因緣和合을 위해 모래를 가져와야 하고, 너무 건조하면 물도 좀 뿌려가며 만들어야 하고,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또는 도로를 만들다 그냥 잘 안 만들어지면

나뭇가지 같은 것도 가져와서 이렇게 밀면 바로 도로가 돼 버리죠.

그렇게도 하고 하면서 온갖 生覺을 가지고 道具를 가지고 이것들을 만든단 말이에요.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生覺으로 因緣으로 만들어진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實體化하면 意味 賦與를 하고,

重要度를 賦與하고 實體化하면 그게 심각한 일이 돼버립니다.

 

여러분들 生覺에는 지금 이 比維가 좀 우습게 들릴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놀이니까.

‘아이들 놀이 가지고 그게 뭐 대단하겠습니까?’ 생각하실지도 모르는데,

어른들한테도 이게 심각해지기도 하죠.

 

요즘에 뭐 저 해운대나 바닷가 백사장에 가면 한여름에 뭘 합니까?

백사장에서 작가들이 와가가지고 모래 가지고 온갖 作品들을 만들죠.

무슨 위대한 사람들 얼굴도 만들고, 무슨 물고기도 만들고, 또는 부처님 상도 만들고,

부처님 얼굴도 여법하게 만들고 하면서 모래사장에다가 각 선수들이 일 년 내내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일 년 내내 집에서 막 뭘 할까 구상하고, 고심하고 하다가 여름에 한 번 딱 열리는 그 큰 대회,

이 대회도 우리나라에서 1등 하는 사람은 예를 들어 저 세계대회도 나갈 수도 있고 이러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 대회가 점점 더 커지다 보면 막 상금을 수백만 원, 수천만 원, 막 수억 원을 걸면서

이런 대회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이런 대회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그냥 이 모래사장에서 정말 전 세계에서 유능한 작가들이 모여가지고 1년, 2년 갈고닦은

실력을 가지고 막 솜씨를 부려서 성모마리아도 만들고, 관세음보살님도 만들고, 온갖 것을 만든단 말이에요.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그렇게 만들고 있는데 여러분이 가가지고 발로 툭 차거나 거기 넘어졌다면 그분 기분이

어떨까요?  마감시간 지금 한 10분도 안 남았는데, 꼬마가 와가지고 작품을 망쳐버렸다.

그러면 기분이 어떨까요? 이건 정말로 심각한 일이죠.

내가 1년, 2년 몇 년을 갈고닦아가지고 이 대회 나오느라 고생고생을 해가지고 만들었는데 이것을 무너뜨린다?

이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될 겁니다.

 

이때 이 사람이 만드는 그 모래사장의 모래성은, 그 모래로 만든 作品은 흡사 4년 동안 혹은 8년 동안

고생고생을 해가지고 온갖 노력을 다해가지고  올림픽에 나가는 올림픽 선수들처럼,

김연아 선수가 그렇게 어릴 때부터 고생고생을 해가지고 연습하고 연습해서 피겨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 어쩌면 김연아는 피겨에 목숨을 걸고 그냥 그걸 연습한 거지만,

이 作家들은 이거 한 번 나가가지고 償 받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 작가들에게는 모래성에 김연아가 금메달 따는 것 못지않은 重要度가, 意味가 賦與된단 말이죠.

월드컵에서 4강이 아니고 8강이 아니라 우승하는 것 못지않은 意味 賦與가 이 作家에겐 더 될 수 있단 말이죠.

 

뭐 이것뿐 아니라 모든 작품 활동 하는 게 마찬가지겠죠.

작품 활동한다고 만들어놔도 그게 대단한 작품이라고 해서 막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지만,

모래성은 하루면 무너지겠지만, 작품이라고 만든 건 일이백 년 가면 무너진다는,

시간이 조금 길다는 것밖에 없지 사실은 다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렇게 따진다면 여기 이렇게 63빌딩을 짓느니, 제 2롯데월드를 짓느니,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짓느니 하는 그런 것도

불과 뭐 몇백 년 간다 뿐이지 그 또한 모래성을 짓는 것과 똑같은 얘기죠.

 

그래서 그 모래성을 만드는 그 作家의 立場에서 봤을 때는 모래성에 엄청난 意味 賦與가 되겠죠.

엄청난 의미 부여가 되니까 그것이 무너지게 되면 큰일 나는 겁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걸 잘하게 되면 상금도 엄청나게 받는 겁니다.

 

그러면 그 모래성에 意味 賦與가 된 사람에게는 그게 심각하지만, 이걸 한참 만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하지만,

저 옆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게 중요한 것이겠어요?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죠.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왜 저런 짓을 하고 있지? 하룻밤이면 끝나는 것을.’ 그런 生覺을 한단 말이죠.

 

 

 

 

事實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든 瞬間瞬間이

우리가 삶에 목숨 걸고 있는 돈이며, 명예며, 권력이며, 지위며, 좋은 집이며,

좋은 차며, 이런 모든 것들이 事實은 이렇게 '모래성'과 같다는 말입니다.

 

因緣 따라서 잠시 잠깐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그것에 내 마음이 意味 賦與를 했을 뿐이지

내가 의미 부여를 하니까, 내 마음을 가지고 의미 부여를 하니까 그게 중요해진 것뿐이지

그래서 내 마음이 거기에 執着하는 것뿐이지

거기에 의미 부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뭐 저한테 무슨 오백만 원짜리 가방을 갖다 선물을 해주면

제가 그게 뭔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게 스님들한테 뭔 意味가 있겠어요?

 

아니면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무슨 뭐 몇억짜리 자동차를 갖다 준들

그걸 뭐 굴리지도 못하고, 기름도 한 방울 없다면 뭐 별 意味가 없을 겁니다.

 

 

내 마음 속에서 중요하다고 生覺하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중요하게 生覺하지 않거든요.

내 生覺 스스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일 뿐이지.

 

예를 들어 똑같은 고3 수험생 부모님인데,

어떻게 意味 賦與를 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重要하다고 生覺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공부를 못했으니까 너라도 분명히 서울대 가야 한다.’고 執着에 執着을 거듭하는 부모님에게는

그 아이의 성적 하나가 정말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일 수 있단 말이에요.

 

어떤 고3 수험생 아이가 저한테 메일로 상담을 요청해왔어요.

뭐였느냐 하면, 어머니하고 단둘이 산다는 거죠.

어머니하고 사는데 동생도 있다고 했나?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삶의 意味를 잃고

아주 오랫동안 그 방황을 하셨었다는 거예요. 방황하다가 '내가 이 방황에 딱 종지부를 찍고

내가 熱心히 살아야겠다.' 마음을 먹고 熱心히 살기 始作해서 좋았는데,

그 어머니가 熱心히 사는 原動力이 된 게 아들인 자신의 工夫라는 겁니다.

 

'내가 남편이 없어도 이놈 내가 공부시켜야 하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돈 벌어야지.'

그래서 이 어머님은 돈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막 뭐든지 하면서 아주 그냥 새벽까지 일해가면서

이 아이를 공부시키고, 또 이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되지 않게 하려면

엄마가 엄마들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지만 쉽게 말해 놀아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엄마가 실제로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뭐 아주 힘든 온갖 궂은일들을 다 하지만

친구 부모님들 만날 때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을 탁 하고, 당신 아들 기죽을까봐 명품으로 치장하고 딱 만나고,

또 아들한테 사줄 때, 또는 학원도 보내고 이럴 때는 분명히 어머님이 그  財政能力이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막 비싸다는 학원, 잘한다는 과외 선생님 붙여가지고

딴 친구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무조건 같이 하게 하려고 氣를 쓰고 그걸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아이의 고민은 뭐였냐 하면,

어머니가 너무 내 성적에 대한 執着이 심하다 보니까

이제는 本人이 보기에 어머니가 定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보이고, 그것이 고스란히 내 무게감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내가 정말 죽고 싶은 心情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공부 성적이 나쁘면 엄마는 어머님의 모든 삶의 意味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그 어머님은 내가 만약에 없었다면, 내가 공부를 할 이유가 없다면 어머님은 아마 바로 自殺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이렇게 온갖 수고로움을 하고 이렇게 하시는데,

그렇다고 어머님께서 나에게 執着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말 죽을 것 같이 괴롭다.” 그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그것은 그 어머님 스스로 만들어 낸 그 工夫에다가 내 人生의 意味를 工夫에다 賦與해 버린 겁니다. 子息에다가....

 

내 人生의 意味를 나 自身에게 賦與해서 나만 괴롭히면 되지,

왜 이 意味 賦與를 子息에게 해가지고 子息까지 괴롭히느냐 말이죠.

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거야 나 스스로 깨야 되는 工夫니까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이 어머님 같은 일을 지금 벌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심각하게 느끼는 모든 것이 事實 남들이 봤을 때는 하나도 심각한 게 아니에요.

 

스님들이 정말 ‘깨달음을 얻어야 되겠다.’ 하고 정말 치열하게 精進을 하는 게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나 타 종교나 이런 사람들이 봤을 때는 웃기는 일이죠.

앉아가지고 뭐하는 짓인가 싶고, 뭐 때문에 저렇게 하는가 싶고,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事實은 내가 이 世上에서 심각하다, 중요하다고 生覺한 모든 것이

事實은 단지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그렇게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내 마음이 執錯을 하는 것일 뿐인겁니다.

 

因緣 따라서 만들어질 때 내가 수고를 하니까, 努力을 하니까, 노력이 막 介入이 되니까,

노력을 한 것에 따라서 잘 만들어지고, 노력을 안 하면 잘 안 만들어지고 그러니까

努力을 熱心히 하면 할수록 그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幻影인 줄도 모르고,

本來 일어난 게 없는건지를 모르고 거기에 점점 執着하게 되는 겁니다.

점점 價値 賦與 意味 賦與를 하게 되는 거예요.

本來 있지도 않은 價値를 意味를 있는 것처럼 매겨 놓는 겁니다.

 

아까 그 어린아이가 내가 만든 이 모래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生覺해서

옆에 친구가 무너뜨리면 막 화를 내고 싸움을 하듯이

그게 뭐라고, 모래 하나가 뭐라고 그걸 가지고 싸워요. 그 절친한 친구 끼리가.......

 

어린아들의 그 싸움과 성인 어르신들 두 분께서 진급의 경쟁자라고 서로 험담하면서

그 절친하던 사람이 진급의 경쟁자라고 서로 싸우는 것과 사실은 뭐가 그렇게 큰 差異가 있습니까?

어린애 어른이 서로 意味 賦與를 하는 것이 다른 것일 뿐이지.

‘이게 중요하다, 저게 심각하다’ 하고 의미 부여하는 것이 다를 뿐인 것이죠.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因緣 따라 만들어진 固定된 實體가 없는 空한 것일 뿐이고,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모든 것은 事實은 일어난 바가 없는 空生인 겁니다.

 

'불'이 일어날 때 우리가 성냥을 가지고 불이 딱 키면 불이 만들어지죠.

본래 '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이란 것은 본래 없는데,

성냥을 딱 켜줌으로써 불이라는 것이 딱 만들어진단 말이에요.

因緣 따라서 만들어졌을 뿐이에요.

 

그런데 계속해서 因緣을 供給해 주지 않아서, 因緣이 假合되지 않으면 이 불은 금방 꺼집니다.

성냥개비 하나만 이렇게 있으면 좀 있다 성냥개비가 다 타면 불이 꺼지죠.

근데 또 그것도 또 성냥개비를 이렇게 거꾸로 들고 있으면 그 뒤에 나무를 마저 태울 수 있으니까 활활 타는데,

성냥을 이렇게 바로 딱 들고 있으면, 성냥을 이렇게 하느냐(거꾸로 드느냐), 이렇게 하느냐(바로 드느냐)에 따라서

불이 좀 더 오래갈 것이냐, 좀 있다 꺼질 것이냐가 또 결정이 된단 말이에요.

요 작은 因緣에 따라서도 불의 生死의 장단이 결정이 됩니다.

 

근데 또 불을 딱 켜놓고 나서 여기(불)다 옆에 종이를 갖다 대거나 화장지를 갖다 대거나

이렇게 因緣을 자꾸 넣어주면 어때요? 불은 좀 더 활활 타죠.

거기다가 또 뭐 종이 같은 거, 신문지 같은 걸 잔뜩 넣고  거기에 나무 같은 걸 올려놓으면

그렇게 因緣을 자꾸 넣어주면 불은 더 오랫동안 타는 겁니다.

 

그 불이 꺼질 만하면 또 나무를 공급해주고, 나무를 공급해주고....

불을 가만 놔둬 버리면 因緣이 다 하니까,  因緣 따라 모이고 因緣 따라 흩어지니까

因緣 따라서 모인 것들이 각자 제 역할을 다하고 흩어지는 것뿐이죠. 불이 꺼지죠.

근데 이걸 계속해서 연료를 공급해 주면, 因緣假合을 계속 해 주면 불이 꺼지지 않고 지속되는 겁니다.

 

옛날에 원시인들은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했겠어요?

이처럼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도  우리가 因緣을 계속해서 供給해 줘야지만

그게 生成될 수 있는 어떤 生命力을 갖는 것이지,

아무리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도 우리가 因緣을 계속 供給해 주지 않고그대로 내버려두면,

因緣을 계속해서 假合해 주지 않으면, 加해주지 않으면 만들어진 것은 消滅되어 버립니다.

다른 걸로 變하거나 흩어져 버리죠.

 

이처럼 이 世上 모든 것은 그렇게 다 因緣 따라 만들어졌다 因緣 따라 없어지는 것들인데

우리가 因緣을 계속 供給해줌으로써 그것들을 붙잡아 놓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因緣을 계속 供給해줘서 그것들을 붙잡아 놓고서 이게 진짜 있는 것처럼,

언제까지고 천년만년 이어질 것인 것처럼 우리가 錯覺하고 있을 뿐입니다.

 

事實은 우리가 돈 버는 것도 마찬가지죠.

돈이라는 게 固定된 實體가 있어서 나에게 언제까지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돈을 버는 일(인연)을 계속해서 供給해줌으로써,

계속 因緣을 맺어줌으로써 돈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이지,

그 일을 열심히 안하면, 돈을 벌다 말고도 일을 딱 그만둬 버리면,

내일부터 내가 회사 딱 안 가버리면 당장 다음 달부터 월급이 안 들어올 거 아니겠습니까?

 

돈이나 名譽나 權力이나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因緣을 계속해서 供給해주니까 그 돈 명예 권력 등이 나한테 實體인 것처럼 있는 것일 뿐이지

因緣 供給을 딱 멈추면 그것들은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한 번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因緣을 계속 供給해 주니까 그 높은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해서 아름다운 외모가 계속 供給되는 게 아니다.

외모는 時間이 갈수록 變할 수밖에 없죠. 늙고, 병들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근데 거기다가도 이제 因緣을 막 過度하게 供給해주면 조금씩 좋아질 수는 있어요.

成形手術하면 좀 늙어 보이는 게 조금 더 젊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걸 막 기를 쓰고 바꾸려고 하고.

 

제가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TV 채널을 돌리다가 아니라 사실 제가 그걸 한 번 찾아봤는데,

페이스북을 하다 보니까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이런 TV 채널이 있다고 써 놓은 게 있는데,

위에 사진을 쫙 올려놨는데 보니까요, 통통하기도 하시고 뭐 외모적으로 이렇게 아주 좀 안 좋았던 분이

무슨 성형수술도 하고  무슨 뭐 다이어트 하는 무슨 뭐 지방흡입도 하고 뭐 온갖 것들을 해가지고

갑자기 美人으로 거듭나는데,  이게 뭐 몇천만 원 이래가지고 이런 프로가 있던데 참 虛妄한 프로대요.^^

緣生은 無生이라는 眞實을 모르니까 거기에 목을 매고, 그런 걸 보는 사람들이 그게 이제 진짜인 걸로,

實體인 걸로 執着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人爲的으로 만들어진 것, 그렇게 해서 급속도로 만들어진 것은

더 빨리 무너질 수밖에 없죠. 빨리 만들어진 것은 빨리 무너집니다.

 

이처럼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은 因緣을 供給해주지 않음과 同時에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돼요. 사실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그 높은 자리가 천년만년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이 높은 자리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은 이제 그 일을 딱 그만두고 집에 가 있는데도

본인이 그 자리의 그 대접을 받아야 될 것 같고, 그 대우를 받아야 될 것 같고,

왜? 그 대우를 받는 게 나의 實體라고 여기니까.  그러나 그런 實體는 없습니다.

 

집, 자동차, 아파트, 컴퓨터, TV 이런 物質的인 모든 것들, 이런 것들도

因緣을 계속 供給해주지 않으면 어때요?  중단하는 즉시 무너집니다.

 

컴퓨터도 쌩쌩한 것 같아도 안 쓰고 가만 놔두면 나중엔 아예 켜지지도 않죠.

자동차나 아파트나 건물이나 이런 모든 것도 그냥 내버려 둬버리면

어느 순간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사람이 살만한 집도 한 며칠 안가다 가보세요.

 

저 대학교 다닐 때, 방학 때 한 두 달을 비워놨다가 집에 들어갔더니 이게 사람 사는 집이 아니고,

‘도대체 아무도 들어와서 건든 적이 없는데 어째 이렇게 집이라는 게 이렇게 허망해져 있나.’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습한 곳이라서 막 엄~청 막 습기가 엄청나고 막 그러기도 했었고,

그러니까 쓰지 않으면, 因緣을 계속 供給해주지 않으면 무너지는 겁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저 숲은 우리가 因緣을 供給해주지 않아도 계속 천년만년 유지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인연을 계속 공급해주지 않아도 유지되는 것이지 그 숲이 自體的으로 저 혼자 유지되는 게 아니죠.

太陽만 없어도 숲의 수명은 그리 길게 가지 못합니다.

 

인간이 만약에 이 지구를 막 오염시켜가지고 지구가 훼손되고,

중국이 그러잖습니까? 사막이 자꾸 늘어나지 않습니까.

땅 자체가 그만큼 양분이 있는 땅이니까 거기 숲이 자라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

이렇게 사막화가 진행되면 숲이었던 곳이 사막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因緣이 계속 供給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虛妄해지는 거죠.

 

 ‘그럼 그 太陽은, 太陽은 인연을 공급해줘야지만 된다고 하니까

그럼 태양이라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 태양도 언제나 계속되는 게 아니죠.

보니까 별이나 태양 같은 것도 核融合反應을 계속 일으켜서

핵융합반응의 원료인 水素를 다 쓰게 되면 消滅될 수밖에 없다고 그래요.

태양도 50억 년 정도 핵융합이 일어났고, 앞으로 50억 년이 지나면

수소 핵융합반응이 끝나서 태양도 이제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처럼 因緣이 계속 供給이 안 되면, 因緣이 供給이 안 되면

이 宇宙와 그 우주 속의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나 持續되는 것은 없는 겁니다.

 

물 같은 것도 보면 언제나 이렇게 지속되는 게 뭔가 있는 것 같지만,

因緣 따라 비가 됐다가, 눈이 됐다가, 우박이 됐다가, 서리가 됐다가, 이슬이 됐다가, 구름이 됐다가,

수증기가 됐다가, 사람의 피도 되고, 땀도 되고, 바다도 되고, 계곡물도 되고, 나무의 수액도 되고,

因緣 따라 계속해서 바뀌면서 變化할 뿐이죠.

 

因緣 따라 變化하는 것을 ‘諸行無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無常하게 變할 뿐인 겁니다. 그렇다고 完全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냥 變化해갈 뿐인 것이지. 不增不減입니다. 그래서...

더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없이 끊임없이 變化할 뿐인 겁니다.

이게 因緣法의 어떤 實體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몸에다가 밥을 주니까,

먹을 것을 주니까(인연 공급) 몸이 살아 있는 거고,

숨을 쉬어주니까(인연 공급) 몸이 살아 있는 거지.

 

그러니까 因緣을 계속해서 供給해줘야지만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은 유지가 되는 거지,

因緣을 딱 끊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딱 끝나버리는 것이 삶의 實體다.

 

아까 제가 모래성, 백사장을 얘기했는데, 그 백사장에서 만들었지만,

그리고 거기에 意味 賦與를 잠깐 했지만  어느 瞬間 그게 다 허물어지듯이

우리가 삶에서 意味를 賦與했던 그 모든 것들은 다 因緣 따라 만들어진 것들이고,

다만 意識 마음 生覺, 알음알이, 認識, 分別識을 가지고 分別心, 煩惱 妄想을 가지고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것들에게 意味를 賦與를 했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 와서 意味 賦與가 된 것일 뿐이지, 事實은 아무 일도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무엇하나 만들어진 것도 없고, 무너진 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내가 갑자기 成功을 해도 成功한 것이 아니고, 失敗해도 失敗한 것이 아니고,

病이 나도 病이 난 게 아니고, 내가 잘살아도 잘사는 것도 아니고,

잘살았다고 해서 거기에 막 實體的으로 할 게 아니란 말이죠.

 

백사장에서 모래로 만든 것 가지고, 자동차 가지고 놀이는 할지언정 집에 갈 때는 다 허물고 가듯이

언제든지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것들은 모두 허물어질 것이라는 眞實을 알고 살아야 된다는 말이죠.

다만 우리가 모든 것에 意味를 賦與만 하지 않으면 그것은 固定된 實體的인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詩를 보니까,

아주 아름다운 詩인데, 시 평론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를 해놨대요.

 

“事物의 本質을 추구하는 모습이고, 存在 意味를 照明하고 또 正體를 밝히려는 意圖를 가진 詩다.

哲學的이고 存在本質  認識이라는 觀念的이고 形而上學的인 作品이다.” 이렇게 막 풀어놨더라고요.

單純한 얘기를 뭐 이렇게 온갖 말로 풀어놓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 마음이 意味를 賦與를 하지 않으면 그 꽃은 아무 意味가 없는 거죠.

내 마음이 意味를 賦與를 했으니까 그 꽃이 나에게 와서 꽃으로 意味 賦與가 되는 것이죠.

 

子息이 나에게 와서 子息이라는 꽃(意味/이름)로 피어난 거죠.

그러나 前生의 子息은 내 옆집에 있는데, 내가 탁 한 消息을 해서 宿明通이 열려서

옆집 사는 말똥이가 ‘아, 내 前生의 내 아들이었구나.’ 하고 딱 깨닫게 되면서,

말똥이게 意味를 賦與하게 되면 ‘아, 너도 내 子息이구나.’ 또 이렇게 意味 賦與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詩가 진행이 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意味가 되고 싶다.

 

아름다운 어떤 詩죠. 아름다운 眞理의 모습을 이렇게 담아놨습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고,

누군가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어떤 意味가 되고 싶단 말이에요.

 

또 무언가를 잊혀지지 않은 오래 持續되는 意味로 만들고 싶어 한단 말이죠.

이렇게 아름답게 詩로 表現했지만  事實은 이렇게 意味를 賦與하는 것,

이렇게 實體를 賦與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내가 남에게 意味가 되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이 事實은 本來 일어나지 않은 것 가지고 일어났다고 虛妄하게 錯覺해서 執着하는 것이고,

虛妄하게 뭔가가 ‘진짜 있다’ 라고 錯覺해서,  내가 意味(이름) 賦與해서 불러주기 前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意味 賦與해서 불러주고 나서 '꽃'이라는 意味가 된 어떤 그런 것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로 불러주느냐, 뭐로 이름을 하느냐 그것일 뿐이지

그 本質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事實 우리가 그 어디 어느 것에 執着할 게 있겠습니까?

이 世上, 이 宇宙에 나타나 있는 내가 森羅萬相에 執着하고 있고,

그 모든 것들에 우리가 執着하고 人生을 살아오고 있지만,

그 무엇이 진짜라고 해서 執着하겠어요.

 

이 世上 모든 것이 因緣만 供給해주지 않으면 언제 消滅될지 모르는 것들인데,

이 몸뚱이조차 空氣라는 因緣을 딱 한 십분, 이십분만 供給을 딱 끊어버려도

우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몸이 이렇게 堅固한 것 같이 막 平生 우리 몸을 애지중지하고 살지만,

제가 저 설악산에 갔다가, 아침부터 갔다가 저녁 세 네시 됐을 때,

아침부터 물을 안 먹고 한 여름에 걷다가 세 네시 됐을 때 쓰러져가지고 죽을 뻔 했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깨달은 事實이 그것이거든요. 아, 이렇게 견고하다고, 이렇게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람은 어지간히 짓눌러도 사람은 일어나고 깨어나고 전쟁터에서도 살아오고,

아무리 ‘정글의 법칙’ 같은 데서 보듯이 아프리카에 떨어뜨려놔도 살 텐데,

虛妄하게 물 하나 供給해주지 않았다고 이렇게 하루 만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겠구나.

堅固한 實體가 있는게 아니구나. 因緣 따라 만들어진 夢 幻 泡 影과 같을 뿐이지.'

 

因緣만 딱 끊어버리면 우리는 언제든지 이 몸뚱이도 금방 허물어질 수 있고,

아무리 대그룹의 會長이고 社長이라 연봉을 수천억, 수백억, 수조억을 벌고,

밑에 회사 사원들을 몇천명을 거느리면 뭐합니까?

이 世上 모든 것은 因緣生 因緣滅로 無生인데... 

 

갑자기 앞만 보고 일만 보고 달려가다가 갑자기 病이 나서 죽을 病에 딱 걸리게 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게 意味가 없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죽는 마당에 뭔 意味가 있겠어요.

갑자기 모든 것이 意味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 죽는다고 生覺한다면, 갑자기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保障이 없죠.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내가 生覺지도 않게 남의 車가 와서 나를 쳐서 죽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렇게 生覺하면 지금 우리가 죽지 않고 이렇게, 富者가 되지 않았을지언정,

子息이 좋은 大學 가지 못했을지언정, 마누라가 바가지를 좀 긁을지언정,

돈을 그렇게 많이 벌지 못할지언정, 지금 이대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本來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진짜라고 지금까지 錯覺해 온 것일 뿐이고,

'모래성을 좀 더 잘 지었느냐 못 지었느냐, 더 크게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이런 分別心가지고 지금까지

막 싸우고 했을 뿐이지, 實際는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고, 實際는 모든 게 因緣生일 뿐이기 때문에,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因緣生일 뿐이기 때문에  因緣을 계속 供給해주지 않으면 무너지는 虛妄한 存在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事實을 確實하게 안다면 사는 것이 하루하루가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디에 過度하게 執着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을 分明히 알 수밖에 없는거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목숨 걸고 왔던, 그렇게 重要하다고 生覺해왔던, 그렇게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生覺해왔던 그 모든 것들이 다 虛~妄한 錯覺일 뿐이구나.

 

내가 원수라고 生覺했던 그 사람도 事實은 일어난 바가 없는 겁니다.

목숨 걸고 여겨왔던, 정말 世上에서 重要하다고 여겨왔던 그 모든 것들이

그 사람에게로 와서 어떤 意味가 되고 싶지만, 더 많은 意味를 살면서 찾고 싶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 모든 意味들이 事實은 虛妄한 錯覺 幻想인 것이죠.

이 世上 모든 것들 모든 意味들이 本質에서 본다면 虛妄한 꿈을 꾸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딱 깨달음을 얻으신 그런 분들을 보면 ‘뭘 해도 괜찮다, 안 해도 괜찮다.’ 그렇게 아는 거죠.

그렇게 막 크게 戀戀하지 않죠. 삶은 다 살지만, 살 것은 다 살지만 그 하나하나에 연연해하지 않고

瞬間瞬間만 最善을 다해서 살 뿐이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여 執着하지 않으면서 액티브하게 사는 거죠.

그 瞬間 그 자리에서 그냥~~~.

 

그 瞬間瞬間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거기에 모든 힘을 賦與하면서.

未來라는 것은 없으니까, 힘을 蓄積해 놓을 必要가 없으니까

只今 할 수 있는 뭣이든 백프로 마음으로 하는 거죠  언제나....

그러면서도 하나하나에 意味 賦與를 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그걸 最善을 다할 뿐이지.

 

意味 賦與를 하고서 그 일을 하면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고, 칭찬 안 해주면 괴롭고,

내가 잘했는데, 너를 위해 도왔는데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 안 해주면 괴롭고.

근데 아무런 意味 賦與 없이 그냥 하면 괴로울 것도 없죠.

 

그래서 여러분 앞에 登場하는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因緣 따라서 만들어진 虛妄한 것이고,

‘진짜 있다’고 生覺하는 그 모든 것들은 事實은 있는 게 아니고 일어나지 않은 겁니다.

본래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無生’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본래 한 法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우리 삶에는 일너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한 7,8년 전엔가 제 방에 이렇게 ‘아무 것도 없다. 아무 일도 없다.’ 그렇게 딱 써 붙여놓고 살았었어요.

힘든 일 있으면, 뭐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딱 들어오면 ‘아무 일도 없다. 아무 것도 없다.’ 그렇게 써 있는 것을

보고서,  ‘그렇지! 아무 일도 없지!’  아무 일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속에 虛妄하게 錯覺으로 만들어 놓은 意識의 造作物인 꿈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같은

그 모든 것들을 이제 가볍게 내려놓고, 가볍게 가볍게 自由롭게 人生을 살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목탁소리 법상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