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空은 하나이니 眞理가 하나 우리 몸뚱이도 헛것 나툰 것 살림살이 이루어서 사는 듯 ‘듯 속에’ 놀고 있다 몸 밖 아닌 內面에서 진짜를 찾아야 그럼 여러분이 가만히 生覺해 보십시오. 境界인 듯. 그 境界를 認識하면 性稟 따로 없는 거이. 境界라는 건 말이죠. 산하대지인 듯이지 만약 산하대지가 듯이 아니고 진짜라면은 하늘과 땅이 생기기 前부터 계속해서 虛空으로 더불어서 죽 變하지 않아야 하 듯 듯 자가 안 들어가는 거예요. 생겼다가 나중에 없어지는 것이고. 물론 그 自體가 虛空性이고 하니까 산하대지인 듯 아니에요? 우리의 몸뚱이도 난 듯, 늙은 듯, 젊은 듯. 죽는 듯 이거 아니에요? 전부 지금 듯 판에 노는 거예요. 내가 말하는 듯 여러분이 설법 듣는 듯. 이거 아니에요? 이 듯을 참으로만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야단이 나. 야단이 야단 난 듯이지 참은 아니거든. 야단이 영원히 계속은 아니거든. 야단하다가 없어지면 그대로 잊어버려. 딴 생각을 해. 그거 전부 듯 아니에요? 물론 이것도 全部 虛空性이고. 그러면은 경계인 듯 성품인 듯. 경계 역시 허공성. 성품 역시 허공성. 내가 있음으로서 경계도 인정이 되는 거라 말이죠. 또 그 경계의 그 자체로 봐서 전부 허공성이거든. 그래서 헛 거 나툰 것이거든요. 우리의 몸뚱이도 헛거 나툰 거라 말이죠. 그러면 이 놈들이 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왔겠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心性에서 온 것 아니에요? 여러분의 心性에서. 許空으로서인 여러분의 心性에서 말이여. 全性體, 온전 全자. 性稟 性字. 전성체에서 비로소 有情無情이 갈라진 것이거든. 그러나 이 有情物들은 슬기가 있어. 電氣, 저건 슬기가 없어. 그러나 結局은 한 가지여. 우리도 지금 슬기 없는 것 가지고 있거든요. 이 머리털 이거 슬기 없거든요. 손톱이니 살이니 이거 性稟 없으니 슬기 없는 거예요. 다만 이걸 내가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이 몸뚱이를 향해서 有情物이라 할 따름이지 失에 있어서는 이거 슬기 없는 거예요. 性稟 없는 거예요. 性稟이 있어야 비로소 슬기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설법하는 듯 하지만은 말이죠. 그건 듯밖에는 안되고 또 내가 살아 있는 듯 하지만 全部 듯 밖에는 안 되는 겁니다. 事實에 있어서는. 그러니까 結局 우리가 듯 속에 우리가 놀고 있어요. 듯. 그러나 그 듯은 우리말로 듯입니다. 이 듯을 우리가 모를 따름입니다. 이걸 참말로 알아서 여기서 生死決判이 나는 거라. 그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境界와 性稟이 어떻지요? 둘인가 하나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또 우리는 어떠한 마음 씀씀이를 가져야 되겠느냐 말이죠. 그 마음 씀씀이 역시 그것도 虛空性이고 이것도 한 번 가져 보는 듯 하는 거예요. 眞理란 것이 바로 캐고 들어가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습놀이만 하던 우리의 분으로 봐서는 처음에 조금 납득이 안갑니다. 아마 여러분들 이거 처음 들을 겁니다. 본래부터 나오는 분들한테는 이런 얘기합니다. 처음 나온 분들은 처음 들을 겁니다. 全部 듯 아니에요? 우리가 시장에 가는 듯, 밥을 짓는 듯,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듯. 전부 듯 아니에요? 우리가 살림살이를 이루어서 사는 듯. 우리가 살림살이 하는 가정을 이룩하는 것도 듯이요 우리가 어떤 사업을 한다는 것도 듯이고 또 이 듯을 안 해서는 안 되지. 전부 듯이에요. 우리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어떻습니까? 어느 놈이 진짜입니까? 전부 듯이니 말이지. 그러니 전부 듯이니 우리는 진짜 찾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 진짜 찾으려면 어디서 찾아야 되느냐. 이건 두 말할 것 없이 내 자신내면에서 찾아야 되지 내 몸 밖을 향해서 찾을 곳이 없어. 그러하기 때문에 虛空은 하나거든요. 그러니 眞理가 하나 아니에요? 이거 참 妙한 겁니다. 虛空은 하나이니 眞理가 하나에요. 진리가 하나이니 지(자기) 배가 고프면 지가 먹어야 돼. 내가 배가 고픈데 다른 사람까지 배가 고프지는 않아. 내가 배가 부른데 다른 사람까지 배가 부르지는 않거든. 전부 지 개인이라. 또 그리고 가족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를 포함한 가족이지 나를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거든. 그러니 하나 아니에요? 그러니 나중에 갈 때는 지 혼자 가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듯하는 이런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기 때문에 전부다 關聯性이 있지. 事實은 있지. 있는 것 같지만은 그 듯에 지나지 못한 거여. 그러하니 모든 것이, 差別現象으로 일어나는 一切 萬琺 一切 事實이 어느 것이 멀고 가까운 因緣關係에 있어서, 요샛말로 現實이라 합니다. 또 現實이라 해도 맞지. 그와 같이 해서 거기에 주저앉아서 이 야단하지만은 事實에 있어서 全部 듯이에요. 어느 것 듯 아닌 것이 없어요. 그러하니 여러분들 이걸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걸 확답을 해야 비로소 견성을 완전히 하게 됩니다. 확답 못하면 견성 안 됩니다. 좀 시일이 걸립니다. 境界하고 내 性稟하고 둘이 아니라 말이여. 따로 없다. 어째 그러냐. 돌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어째 그 돌하고 나하고 性稟이 한 가지냐. 이거 疑心나지 않습니까? 의심나니까 이걸 하나로 生覺해 보시란 말입니다. 이 工夫는 다른 거 아닙니다. 보통 다른 공부하고는 달라서 어디까지라도 하나의 眞理를 그대로 파헤치는 이것입니다.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의 眞理를 파헤쳐 놓으면 그 까짓 거, 生死니 福이니 뭣이니 전부 그 속에 다 있는 거예요. 이거 별 거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오랫동안 모습놀이/觀念놀이 하던 習性이 있어 놓으니 좀체 이 말이 곧이 안 들립니다. 아마 듯에 있어서는 다소 납득이 갈 겁니다. 生死問題를 解決하는데 있어서는 우리가 알아야 되지 우리가 모르고 어떻게 해결이 될 겁니까? 왜 그러느냐.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살기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아무리 우리가 이 사회에서 굉장한 뭣을 하더라도 나중에 털털 털고 혼자 가는 것 아니에요? 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믿어야 됩니다. 나를 믿어야 됩니다. 내 性稟을 믿어야 됩니다. 天下 없어도 그렇습니다. 절대 날 믿어야 됩니다. 날 믿으라는 건 내 肉身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 性稟을 믿는 겁니다. 물론 내 性稟을 科學的으로 論理的으로 構體的으로 生覺해 보면 墟空으로서의 나이니까 물론 믿겠지요?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自己를 안 믿고 누구를 믿겠습니까? < 저작권자 © 현대불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