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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장백산-1 2020. 3. 16. 15:26

마음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  법상스님



불법(佛法 : 붓다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 하면, '본래의 성품을 밝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은 무시(無始) 이래로 단 한 번도 어두웠던 적이 없고, 사라진 적도 

없으며, 언제나 영원하게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을 바탕으로 해서 본성 위에서 삶이 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다만 온갖 분별 망상 번뇌 생각들로 인해서, 즉 분별 망상 번뇌 생각들이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의 진실을 보지 못한 채,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을 바탕으로해서 나타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겉모습(相)인 이름(名)과 모양(色)만을 따르기 때문에 

늘 지금 이 순간 여기 자리에 있는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을 보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예로부터 선(禪)에서는 늘 지금 이 순간 여기 자리, 텅~빈 바탕자리,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

성품(自然性品), 마음이라는 방편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을 거울에 비유하곤 한다.


거울은 모든 것을 분별차별 차등 없이 있은 그대로 비추어 낸다. 거울 앞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좋은 거나 나쁜 거나,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상관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비추어 낼 뿐이다. 그 때 

사람들은 그 거울 속에 있는 온갖 좋고 나쁜 대상들이 진짜인 줄 알고 좋으면 애착해서 가지려고 하고,

싫으면 미워해 밀쳐내려 버리려고 하면서, 온갖 시비분별과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거울 속

에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나 인 줄 알고, 거울 속에 비친 세상이 진짜 세상인 줄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을 본다 함은 거울 속에 비친 가짜들, 그림자들

을 보고서 거울 속에 비친 그 그림자가 진짜인 줄 알아 그 그림자에 집착해서 그 그림자를  따라가는 것

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비춰내는 거울이라는 본 바탕을 바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늘 지금 

이 순간 여기 자리에 있는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을 보는 것이다.


아무리 좋고 나쁜 것들, 천차만별로 분별되고 차별된 모든 모습들이 거울 속에 비치더라도 거울 그 자체

는 거울 속에 비친 천차만별의 모습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어떰 변화나 움집임이 없이 그대로이다. 

거울 그 자체는 그저 비추어 낼 뿐 아무런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도 하지 않고, 거울에 비친 대상들을 

대상으로 그 어떤 괴로움도 일으키지 않는다.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이 바로 거울과 같다. 우리들의 본래 마음,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 또한 지금 여기 있는 이 모습 그대로 완전한 성품이다.


부처(佛), 깨달음, 도(道), 진리(眞理), 법(法), 선(禪), 마음(心), 본래면목,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을 따로 얻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 한 순간도 빠짐 없이 우리가 늘 부처(佛), 깨달음, 도(道), 진리(眞理), 법

(法), 선(禪), 마음(心), 본래면목,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을 쓰며 살고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을 판단하지 않는다면,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코와 혀로 

느껴지는 모든 맛과 냄새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몸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촉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다면,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을 따라가지만 않는다면, 그 모든 것들, 현상들, 존재들이 다만 마음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일 뿐 진짜가, 실체가 아님을 안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모든 대상이 있는 그대로 부처(佛), 깨달음, 도(道), 진리(眞理), 법(法), 선(禪), 

마음(心), 본래면목,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 아님이 없고 진실 아님이 없다.


겉모습이나 이름, 모양을 따라가지 말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부처(佛), 깨달음, 도(道), 진리(眞

理), 법(法), 선(禪), 마음(心), 본래면목,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이라는 거울을 

바탕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생각이나 분별로 마음거울을 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식되

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처(佛), 깨달음, 도(道), 진리(眞理), 법(法), 선(禪), 마음(心), 본래면목, 본성(本

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이라는 마음거울을 볼 수 있는가? '오직 모를 뿐'이다. 안다고 

하면 어긋난다. 마음거울은 지식으로 생각으로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선사 스님들께서는 부처(佛), 깨달음, 도(道), 진리(眞理), 법(法), 선(禪), 마음(心), 본래면목, 

본성(本性, 본래의 성품), 즉 자연성품(自然性品)이라는 마음거울을 머리로 헤아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사용했다.


도(道)라는 마음거울이 무엇입니까 라는 물음에, 마른 똥막대기라거나, 뜰 앞의 잣나무라거나, 손가락을 

들어 보이거나, 알 수 없는 선문답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같은 방편(方便), 수단이 바로 머리로 생각으로

헤아리고 판단 분별해서 알려고 하는 그 모든 습관적인 방식을 탁 그치고, 도무지 어찌할 수 없어서 앞뒤

로 꽉 막히는 은산철벽과도 같은, 오직 모를 뿐인,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공부를 드러내기 위함

이다.


간화선의 화두란 바로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여기에서 나오는 의심이다. 도무지 의문을 풀 방법은 

없고, 생각이나 의식을 조작해서도 안 된다면, 그러나 답은 찾아야 한다면,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그저 꽉 막힐 뿐이고, 답답하고 갑갑할 뿐이며, 오직 모를 뿐이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고,

알고자 하는 그러나 그 무엇도 할 수 없어 꼼짝달싹 못하는 문 없는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다 보면

활짝 열린다는 것이 바로 간화선의 방편(方便)인 것이다.


내 눈 앞에, 목전(目前),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에 등장하는 내 인생, 내 삶의 모든 

스토리며, 등장인물들이며, 그 모든 성취, 성공,  실패들 그 모든 것은 거울 속에 비친 실체가 업는 헛된 

허망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메아리일 뿐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두고 지켜봐야 할  부분은 거울 속에 비친 실체가 없는 헛된 허망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메아리 같은 가짜 들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그 모든 것이 일어난 곳을 되돌아 비추어

(회광반조), 마음거울 그 자체, 눈앞, 목전, 텅~빈 바탕 자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를 보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