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닷컴ㅣ대담=권경률, 기록·정리=박형남기자] 사실 전부터 그를 만나야겠다고 별러왔다. 시골 이장에서 출발해 군수, 장관을 거쳐 민선 5기 경남도지사까지…. 경력만 놓고 보면 인간극장이 따로 없다. 하지만 그의 삶은 상투적인 성공신화를 거부한다. 오직 높은 자리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쉬운 길을 놔두고 부러 험난한 길만 걸었기에 오늘날 그의 입지가 더욱 빛나는 지도 모르겠다.
‘리틀 노무현’ 김두관…. 지난 24일 그를 만나러 창원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절실함’을 만나고 싶었다. 번번이 넘어졌어도 이내 툭툭 털고 일어난 그다. 얼마나 이기고 싶었으면 야당 꼬리표까지 뗐다. ‘무소속’으로 굳게 닫힌 경상도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절심함이다. 절실하니까 이뤄지는 거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절실하게 만들었을까.
경남도청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구제역 청정지대’였던 경상남도에서 처음으로 구제역 의심 신고가 들어왔고 막 사실로 확인될 찰나였다. 그래서인지 현장을 돌고 들어온 김 지사는 조금 초췌해보였다. 어쩔 수 없다. 기자가 분위기 메이커 노릇을 하는 수밖에.
- 한 인사가 이런 평을 하더군요. 김두관은 맨발로 걷는 시골 흙길 같은 사람이라고. 구두 신고 걷는 콘크리트 보도와는 다르다고.
“제가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 그게 아니라 촌스럽다는 이야기 아닌가요? (웃음)
“촌놈이니까.(웃음) 시골에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농사를 2년 지었어요. 그러다가 삼수해서 전문대 갔다가 부산 동아대로 편입했죠. 그런데 대학 때도 형이 농사를 지으니깐 주말만 되면 고향가고 싶고…. 남들처럼 토, 일요일에 여대생하고 데이트할 시간도 없었어요. 현장 주민들과 함께 커온 거죠. 그러다보니 주민들과는 격의가 없지만 높은 사람들 만나면 막 어색하고 그랬어요. 그 왜 불교 신자가 기독교 목사님 만나면 서먹서먹한 느낌 들잖아요. 그런 것처럼 한국사회 주류 어른들 만나면 서먹서먹했죠. 이제는 주류나 비주류나 위아래 없이 다 편하게 만나요. 능글능글해진 거지.”
- 해탈하셨네요. 이야기 듣다보니 고향 남해를 참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군대를 제외하고는 젊은 시절 대부분을 고향에서 보냈어요.
“제가 지금 54살인데 거의 44년을 고향에서 살았어요. 대학, 군대, 참여정부 3년 정도만 객지생활 한 거니까. 지독한 촌놈이죠. 저 같은 촌놈 드물 겁니다.”
자꾸만 ‘촌놈’이란다. 입버릇처럼….
- 그 ‘촌놈’ 분이 도지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나요? 어린 시절엔 무슨 꿈을 꾸셨어요? 소박했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 때까지 꿈은 스포츠해설가였어요. 배구 해설가 중 오관영씨라고 유명한 분이 계셨어요. 그 어른이 여자배구 해설을 하면 너무 감칠맛이 났습니다. 나도 저런 거 해봤으면 좋겠다, 싶었죠. 좀 더 커서는 행정,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고. 대학졸업하고 고향 돌아간 이유도…. 나중에 국회의원 해볼까 했는데 결국 한 번도 못했네.(웃음)”
- 험한 길로만 가니까. (웃음) 체격이 단단하시잖아요. 운동선수 쪽은 혹시…. 듣기로는 씨름선수로 날렸다던데.
“제가 운동신경이 있는 편이에요. 중학교 때 유도도 하고 축구, 배구도 좋아했어요. 씨름은 정식 선수는 아니었지만 군내 대회에서 단체전, 개인전 2위에 올랐죠. 군대에서도 씨름 잘 해서 휴가를 세 번 나왔고. 9박 10일짜리. 그 때는 체급별 대회도 없었어요. 나보다 덩치 큰 씨름선수와도 붙고 그랬죠.”
- 주특기가 왼배지기와 잡치기였다고요?
“배지기는 씨름선수 기본이죠. 잡치기도 잘했고. 참, 안다리도.”
- 공부는 어떠셨나요? 장학퀴즈 나가서 차석 하셨으면 공부도 꽤 했을 것 같은데.
“중학교 때 400명 중 40~50등 정도.”
- 집안이 가난하셨잖아요? 아무래도 공부에 투자하기 어렵지 않았나요?
“중학교 시절 보충수업비 안 낸 사람 호명하면 단골로 불려나갔죠.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우리 담임이 음악선생님이었는데 어느 날 보충수업비 안 낸 놈들 다 나와, 그러는 거예요. 저도 모르게 나갔죠. 그런데 보충수업비 안 낸 사람은 다섯 명인데 여섯 명이 나온 거라. 알고 보니 제가 간만에 할아버지 졸라서 보충수업비 500원을 냈거든. 머리를 긁적긁적 하며 제자리로 돌아갔죠. 하도 불려나가다 보니깐 자동으로 그만…. 선생님이 저를 보고 그러시더라고요. 달밤에 요강 들고 체조하니?”
- 보충수업비도 못 내고 그러면 어린 마음에 놀리는 친구들도 있었을 테고. 혹시 자존심 상해서 싸운 적은 없나요? 운동신경이 있어서 싸움도 잘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엔 다 가난했죠. 하지만 가난을 의식하지는 않았어요. 가난이 뼈아프거나 구구절절해서, 가난을 극복하고 말겠다는 그런 생각이 제게는 없었습니다. 극복해야 될 이유가 없었죠.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했지만 마음은 안 그랬어요. 그러니 싸울 일이 없었죠.”
- 부모님 영향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시죠.”
- 어머님 가르침이 있었다면?
- 어머님이 고생 많으셨죠.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몸으로 6남매를 키웠죠. 아들 다섯에 딸 하나.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맞아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고생은 어머니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다섯째인데 대학은 저와 막내 동생만 다녔습니다. 위로 형님 세 분에 누님 한 분이 있는데요. 큰 형님은 고등학교, 둘째 형은 초등학교, 셋째 형은 중학교만 졸업했습니다. 올해 70인 누님도 초등학교만 졸업했고….”
듣다보니 그에게서 남해의 기운이 느껴진다. 남해라는 곳, 포근하다. 가본 사람은 다들 알 테지만.
- 농사짓다가 전문대에 들어갔습니다. 대학시절은 어땠나요? 사회에 관심이 있었나요?
“관심 많았죠. 제가 나이로는 77학번입니다. 2년간 농사짓다가 가서 79학번이 됐죠. 1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고, 2학년 때는 광주민중항쟁이 뒤이었습니다. 그 당시 전국대학이 다 격렬하게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어요. 전문대학도 당연히 하죠. 조금 속도가 느렸을 뿐이지만. 그런데 데모를 주동해도 정보기관이 주목을 하지 않아요. 경북 영주에 있는 시골 전문대학(경북전문대)이니깐 그냥 넘어간 거죠. 피라미들이라고.”
- 그러다가 동아대에 편입했고요.
“81년에 부산 동아대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분위기상 언더로 활동했어요. 그러다가 군대에 갔고 서울민통련 활동을 거쳐 복학하니 굉장한 겁니다. 87년 6월 항쟁. 맨날 후배들이 주동하는 데모에 동원돼서 돌 던지고 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대학 다니는 동안 지적호기심은 많았지만 아카데믹한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사회과학서적을 많이 봤죠.
이영희 선생님의 ‘전환시대 논리’, ‘8억 인과의 대화’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웃기는 얘기지만 그 당시엔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같은 책도 금서에 해당됐습니다. 막 숨어서 보고 그랬죠. 지금 대전시장인 염홍철씨가 쓴 ‘제3세계와 종속이론’도 그 시절엔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겨야 했어요.”
- 대학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사회운동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나요?
“군 제대하고 졸업하기 전에 1년간 서울민통련에 있었죠. 의장이 백기완 선생, 부의장이 이재오 현 특임장관이었는데 그 밑에서 사회팀 간사를 맡았습니다. 그 해 86년엔 직선제 개헌투쟁이 뜨거웠죠. 4.27 청주, 5.3 인천, 5.10 마산 식으로 대규모 집회가 연이었어요. 저는 청주집회를 지원했습니다. 재야 민중운동 단체니깐. 그런데 서울에서 원정데모를 왔다고 그날 바로 구속됐어요. 집시법(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치소에서 100일 정도 살았습니다. 그 100일 동안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해 봤어요. 그때 내린 결론이 서울 쪽은 워낙 능력 있는 친구가 많으니까 내 고향 남해에서 다시 시작하자. 당시 남해에는 야당 수준의 지역운동은 있었지만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은 미미했거든요. 내가 돌아가면 (사회운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내려갔죠. 어쨌든 늘 살았던 고향이니까.”
- 이를 테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군요. 그리고 처음으로 총선에 출마하게 되죠?
“1988년 농민회에서 활동하던 선배들을 중심으로 13대 총선에 참여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민중의 당’과 연계해 후보를 내자고요. 선배들은 국민들이 기존 정당에 싫증을 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깃발을 들면 엄청 지지해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야말로 주관적 오판인데, 제가 총대를 멨습니다. 물론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나오니깐 후회되고 반성이 들더군요. 남해?하동에서 2830표를 얻었습니다. 2830명의 뜻을 봐서 계속 가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제가 볼 때는 그게 학교동창, 이웃사촌, 사돈의 팔촌들이 찍은 표거든요. 그래서 저는 당을 유지하는 것보다 마을 이장을 맡는 게 훨씬 더 민중적 대의에 맞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당은 해소되고 저는 고향마을인 이어리 이장이 됐죠. 제 말에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80년대 그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고 그는 고향에서 이장이 되는 길을 택했다. 분노로는 독재를 부술 수는 있지만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오히려 연민일 지도 모른다. 연민이란,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고 진심으로 함께 하는 것. 시골에서 주민들과 부대끼며 커온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자신과 똑 닮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한 사람을….
- 이장을 하다가 1995년 민선 1기 지방선거에서 군수가 됩니다. 군 단위 선거에서는 ‘인물’이라는 평판이 돌면 당선된다는데, 이장 하면서 인심을 많이 얻었나 봐요.
“이장도 이장이지만, 남해신문을 만들어서 열심히 했죠. 남해신문은 지방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농민들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했습니다. 당시 지방지는 군수와 저녁 한 끼 먹으면 홍보기사 써주고 했거든요. 군수판공비 갖고 기자한테 촌지도 주고…. 옛날이야기지만 그만큼 군청과 기자들이 유착돼 있었죠. 그런데 남해신문은 그런 식의 홍보기사 안 써줬어요. 오히려 농민의 입장에서 잘못을 낱낱이 파헤쳤습니다. 군청 공무원이 정부보조금을 횡령한 사건을 집중 보도해 관련자를 모두 징계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예였죠. 또 어려운 가운데서도 직접 신문을 제작하고, 배달까지 도맡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의 바르고 일 열심히 한다는 칭찬을 듣게 됐는데, 그게 지방선거 출마로 이어진 겁니다.”
- 군수로 취임하자마자 기자실부터 폐쇄했다면서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남해신문 할 때부터 군청과 언론이 유착하는 것을 봤으니까. 진작부터 군수 되면 (유착의 온상인) 기자실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어휴, 난리 났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걸 또 없앴습니다. 중앙정부에서…
“제가 군수 시절에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수산부장관을 지냈어요. 남해군에서 바다양식사업 한번 해보겠다고 장관을 찾아갔습니다. 사업이 잘 풀려서 확정될 무렵, 노 대통령이 얘기 좀 하자더라고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대통령이 저한테 묻는 겁니다. ‘김 군수 어떻게 기자실 없앴어요?’”
- 그러면 노 전 대통령과는 그때 인연을 맺은 건가요?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광주청문회 스타였잖아요. 전국으로 특강을 다녔는데 남해농민회에서 2번 초청했습니다. 그때 알았죠.”
- 첫인상이 어떻던가요?
“아이고, 천상 시골아저씨였죠. 강단도 넘치고.”
- 이장, 군수도 있지만 결국 장관 발탁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볼 수 있겠죠.
“아무래도 그렇죠. 행정자치부는 굉장히 큰 부처였습니다. 국민의 정부 때 정부조직법에 따라 내무부하고 총무처를 합쳐 놓았는데요. 옛날 내무부만 해도 어땠습니까? 모든 시도, 시군구를 컨트롤 하던 곳 아닙니까? 내무부의 서기관, 행정계장 하던 사람들이 남해군수로 왔습니다. 그렇게 막강한 내무부에 총무처까지 합한 조직을 대통령이 저에게 맡긴 겁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 당시 여야를 막론하고 반대가 심했죠.
“야당은 당연하고 여당 내부에서도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저도 ‘우려반 기대반’으로 시작했지만 참여정부의 핵심과제인 국가균형발전을 힘차게 추진했습니다. 지방 살리기 3대 특별법인 지방분권특별법, 지역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밀어붙인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장관한 지 6개월 29일 만에 그만뒀습니다. 처음에는 한총련 대학생들의 시위를 문제 삼았습니다. 학생들이 미군 훈련장을 점거했는데 포천경찰서에서 못 막았다고요. 점거 농성이 옳지는 않지만 사람 다친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유럽의 예를 보더라도 경찰서장에게 책임을 묻는 선에서 끝날 사안이었죠. 여론이 저에게 호의적으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중간평가를 한다면서 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정권출범 6개월 만에 중간평가를 한다면서요.”
-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자존심 상했죠? 당시 국회 업무보고 자료를 보면 ‘이장, 군수 하다가 장관 되니까 기분이 좋겠다’는 등 온갖 야유와 모욕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 가지 있었죠. ‘시골 촌놈’, ‘이장 출신’.”
- 솔직히 어떤 기분이었나요?
“한 대 쥐어박고 싶었죠. (웃음)”
- 해임안이 통과되고 얼마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추진됐습니다.
“2003년 가을에 제 해임안이 가결되자, 재미 붙여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까지 간 거죠. 하지만 이듬해 총선에서 뒤집기로 열린우리당이 1당이 됐어요. 어쩌면 저를 그렇게 해임시키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총선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통(通)’하기 시작한 것은 최연소 군수로 승승장구할 때다. ‘남해잔디’를 개발하고 스포츠마케팅으로 잘 나가던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만나 인생이 꼬여버렸다. 하지만 온갖 수모 끝에 6개월 만에 장관에서 쫓겨난 일로 그는 오히려 ‘전국구 정치인’로 발돋움했다. 씨름으로 치면 뒤집기의 묘미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 2006년인가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3위를 했습니다.
“2006년 2월 18일이었죠. 3위로 최고위원이 되고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2006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사람들 격려하기 위해서요. 부산 쪽에 와 있는데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통령이 좀 봅시다, 한 거예요. 부랴부랴 집사람한테 전화해서 와이셔츠 다려놓으라고 했죠. 집사람이 눈치가 빠릅디다. 대통령 만나더라도 절대 도지사 나간다고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청와대 들어가서 대통령과 두 시간 동안 저녁을 먹는데 지방선거 걱정을 태산같이 하세요. 특히 부산, 경남, 대구, 경북을요. 대통령과 결별할 게 아니라면 제가 뭔가 의사표시를 해야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대통령께 말씀드렸죠. 다른 데는 잘 모르겠고 경남도지사는 제가 나가겠다고요.”
- 대통령한테 말려들었네요. 분위기 조성해서 밀어 넣은 거잖아요.
“결과적으로 그런 셈이죠. 어찌됐든 3개월 준비를 해서 25.5%를 득표했습니다. 패했지만 2002년 16.9%보다 10% 가까이 늘었어요. 어디 갈 데도 없고 경남에서 끝장을 봐야지, 싶어 2008년 총선에서는 남해?하동에서 출마했습니다. 이번에는 40.6%를 기록했지만 또 실패였습니다. 2002년 도지사, 2004년 국회의원, 2006년 도지사, 2008년 국회의원까지 2년마다 선거를 치러 거푸 고배를 마신 거죠.”
- 작년 지방선거에서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경상도 표심이라는 게 이번에는 밀어줘야지 하면서도 막판에 한나라당을 찍어온 역사가 있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리틀 노무현’ 김두관이 당선되리라곤 꿈에도 몰랐어요.
“사실 2006년 선거가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당선되고 흐름을 보니까 2006년에 고생한 게 바탕이 돼 조금씩 축적된 것 같습니다. 왜 ‘삼세번’이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출마는 2009년 11월에 결심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느냐. 경남에서만 국회의원 세 번, 도지사 두 번 해서 도합 다섯 번 떨어졌습니다. 선거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보통 국회의원 한 번 떨어지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근데 다섯 번이나 떨어진 겁니다. ‘부모님 때려죽은 ‘웬수’도 아닌데 설마 여섯 번까지 내치겠느냐. 한 번 해보자.’ 그렇게 ‘사즉생’의 각오로 달려들었습니다. 경남도민 입장에선 이번에도 떨어뜨리면 사람 죽이겠다 싶어서 뽑아준 거죠.”
- 인물 보고 찍어준 게 아닐까요? 경상도 기준으로 보면 한 인물 하잖아요.
“맞아요. 인물도 보셨을 겁니다. (웃음) 선거 치르면서 할머니들한테 제 얼굴이 맏사위 같아서 좋다는 덕담을 많이 들었습니다. 부모님 덕분이죠. 비호감은 아니지 않나요? (이 대목에서 기자 얼굴을 쳐다보며 은근히 동의를 구함.) 할머니가 좋아하는 얼굴이죠. 그래서 어르신들 표를 많이 얻었습니다.”
- 그런데 ‘무소속’으로 출마했단 말이에요. 당선을 위해 지조를 버렸다는 비판도 받았을 법한데.
“네, 당선되고 싶었습니다. 누구는 정체성 없이 무소속을 택했다고 하는데, 저에게는 작년 지방선거가 절박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절박했지만 민주진보 진영의 큰 대의를 위해서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질 수가 없었습니다.”
- 예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와 경선을 했습니다. 무소속이라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나요?
“김두관이 색깔 있는 무소속 후보라는 건 모두가 다 알던 사실 아닙니까? 양해가 됐어요. 최종적으로 민주노동당 강병기 후보(현 경상남도 정무부지사)와 경선을 치렀는데 제가 여론조사에선 좀 앞섰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들이 많은 게 걱정이었습니다. 예선통과 못하면 본선이 어디 있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과감해져야 한다고 다잡았죠. 그런데 민주노총 쪽에서 한나라당과 싸워 이기려면 무소속이지만 야권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김두관이 낫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범야권 진영의 승리를 일구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죠.”
- 본선마저 이기고 이제 경남도정을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상남도는 여전히 한나라당의 텃밭입니다. 도의회도 한나라당 천지라 좀 고단할 듯싶습니다. 듣기로는 정무직 공무원 한 명 임명하기도 힘들고, 산하기관장도 예전 사람들 그대로라던데.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요?
“저는 330만 경남도민의 도지사입니다. 저를 지지한 161만의 도지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나라당 도의원들이 야당 입장에서 도정 전반에 대해 비판?감시하는 것은 기본책무에 속합니다. 철학과 가치관이 다르고, 정책에 대한 시각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합니다. 섭섭할 거 없습니다.
다만 도지사도, 도의원도 도민들이 완장을 채워준 겁니다. 폼 잡고 행세하라고 채워준 게 아닙니다. 비판을 하더라도 서로 예의를 갖춰야 합니다. 왜곡하거나 침소봉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목소리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습니다. 타협하고 대화하는 것이 민주주의 아닙니까. 효율성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그렇게 다름을 안고 가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입니다.”
- 의회주의자 같은 말이네요. 단체장만 쭉 해 오신 분이…. (웃음)
“제가 젊은 시절에 민주화 운동, 사회운동을 했습니다. 의회주의자들이 지켜야 할 민주주의 원리를 저 역시 믿습니다. 변명 같지만 저도 원래는 의회부터 출발하려고 했습니다. 군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이렇게 코스를 밟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덜컥 군수부터 돼버리더니 여기까지 왔네요.”
- 그런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복지공약을 갖고 한나라당 도의회와 협의를 계속해나가고 있죠? 성과는 있나요?
“어르신 틀니 예산은 상임위에서 전액 삭감이 됐습니다만, 예결위에서 복원했습니다. 본회의 투표까지 갔으면 무산될 뻔했는데 다행히 여야 합의로 살린 겁니다. 친환경 무상급식도 118억 원이 삭감됐습니다. 그러나 그중 35억이 다시 복원됐고, 추경까지 더 설명하면 80~90%까지 적용할 수 있을 듯합니다. 여지는 충분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당선되고 싶었다고 했다. 무소속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진심이다. 그 한 마디 말 속에 저간의 말 못할 수모와 고통들이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부모 때려죽인 ‘웬수’도 아닌데 여섯 번까지야 내치겠느냐는 근성어린 낙관 앞에 기자의 삐딱한 시선도 잠시 무장해제를 당한다. 한나라당, 강적을 만났다.
- 4대강 사업을 두고 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정치적 중량감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라던데. 그런 생각 안 해봤나요?
- 한나라당 쪽에서는 야권 차기주자 중 가장 두려운 상대라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씨름 잘 하는 걸 아는가보지.”
- 그럼에도 여전히 김두관을 내려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예컨대 “국민이 막 찍겠어”라는 식으로….
“좀 봐주지. 야박하게…”
- 원래 특권의식을 가진 분들은 촌사람을 내려 보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노 전 대통령과 닮은 점이 많다고 보는데요.
“저는 4년제 대학 나온 사람입니다.”
- 노무현과 김두관, 어떤 관계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제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스승이죠.”
- 그럼 유시민과 김두관은요?
“친구이자 라이벌?”
- 유시민 원장과는 과거 함께 참여정치실천연대 공동대표를 지낸 적이 있죠? 두 분 중에서 누가 노무현 대통령과 더 친했나요?
“유시민 원장이 더 친했을 겁니다. 대화도 더 많이 나누고. 저는 성골이 아니잖아요. 진골도 아니고. 육두품인데, 왕의 사랑을 받은 육두품이었죠.”
- 유시민 원장은 젊은 층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사님은 젊은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드라마 ‘대물’ 안 봤어요? ‘남해도지사’를 모릅니까? 농담이고. 당연합니다. 제가 글을 잘 씁니까? 이슈파이팅을 잘합니까? 경남도정 잘 챙기고, 정책성과 만들어내고, 지금 제가 할 일은 그거죠.”
- 기왕 드라마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사람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다’고 했습니다. 김두관만의 내 사람 만드는 비법이 있나요?
“특별하게 마음을 얻는 비법은 없고, 진정성이라고 할까. 편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은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니까.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만나고….”
- 그럼 혹시 여자의 마음을 얻는 법도 있을까요?
“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마음으로 늘 미안한데 표현이 잘 안 돼요. 지금껏 생일선물 한 번 고른 적 없는데 이번엔 해보려고요. 1월 31일이 생일인데 그때 꽃을 선물해볼까 합니다.”
노무현 가문의 계승자들이 대개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인 반면, 그는 바닥에서 뒹굴며 도전과 좌절을 반복해야 했다. 작년 지방선거에서 김두관 지사는 승리에 대한 절실한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처음으로 대면한 그는 시종 여유롭고 유연했다. 인터뷰가 당초 예정된 시간을 훌쩍 지나 1시간 30분 가까이 진행되자 비서실 공무원들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가는 경남도민의 이름으로 끌려 나갈 것 같아 급히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단답형입니다. 김두관에게 경남도지사란?
“일자리죠.”
- 김두관에게 정치란?
“(잠시 침묵 후) 직업입니다.”
<사진=배정한기자>
[스포츠서울닷컴 정치팀 ptoday@medi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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