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스크랩] 가슴에 남는 성경 구절들 /혜민스님

장백산-1 2011. 12. 18. 00:42

         


나는 승려이지만 성경 말씀 가운데 어느 구절들은 내 삶의 이정표로 삼을 만큼 가슴으로 간직하는 대목들이 있다. 특히 성경 말씀의 그 구절들을 몸소 직접 실천하시는 분들을 알게 되거나 아니면 때론 직접 만나게 되면 그런 감동은 더해 지는데, 종교를 떠나서 같은 사람대 사람으로써 먼저 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사실 처음 성경을 읽게 된 것은 비교 종교학 공부를 대학과 대학원에서 하다 보니, 학교 수업중에 기독교 역사나 성경 해석학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학문으로만 읽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을 읽을때와 마찮가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깊은 진리의 말씀에 공감하고 마음으로 곰곰히 되새기게 되었다. 아마도 진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종교의 울타리에만 묵여 있는 것이 아니고 일반인들도 수긍할수 있는 보편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540절에 보면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있으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구원의 기준을 세우시는 부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원을 받을수 있는 기준이 단순히 믿음이 좋아서거나 아니면 교회에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잘 나가거나 등이 아니고 우리의 삶 가운데 만나게 되는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이 보이는 그 한 사람에게 우리가 한 행동이 바로 하느님/하나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는 부분이다. 즉 하느님/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그 대상이 보이지 않는 천국의 전지전능하신 그 분이 아니고 바로 내 주위에서 숨쉬며 어렵게 살고 있는 이웃 형제 자매가 바로 그 분과 다름이 없다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생을 봉사와 헌신으로 사신 아프리카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이라던가 인도의 테레사 수녀님 아니면 가깝게는 우리나라의 다일 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님이나 산동네에서 알게 모르게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시는 호용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나도 적지 않는 감동을 받고 그 분들을 본 받고 싶다.



또한 마태복음 7 21절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즉 다른 사람 보란듯 말로 얼마나 믿음이 강한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떠들어 대는 것은 구원을 받는 아무런 이유가 될수 없고 오직 진실한 행위로 전환 되었을때만이 예수님께서 구원을 해 주신다는 부분이다. 이 점은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불자들도 반성을 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교회나 사찰에서 예수님이나 부처님에 대한 신심의 고양만을 강조했지 그 신심이 어떻게 자비행으로 전환되어 세상에 나투는가에 대한 고민은 비교적 약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자비행은 없고 신심만 강하면 자치하다간 내 자식, 내 남편, 내 부모만을 위하는 기복적인 종교의 형태로만 안주하기 싶다. 이것은 예수님, 부처님 두분다 권했다고 보기 힘든 방식의 종교 활동으로 욕심을 내려 놓으려고 교회나 절에 왔다가 오히려 욕심만 더 부리는 계기가 되므로 경계해야 한다




또 다른 가슴속에 새긴 성경 문구는 누가복음 22 42절에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이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되시길 원하옵니다이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모든 것을 내 기준에 맞추어 내가 원하는 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지길 바라는가? 살면서 내가 콘트롤 할수 없는 부분의 일들이 천지인데도 내가 원하는 식으로 되지 않았다고 투정하며 짜증을 내지 않는가? 이럴때 마다 나는 죽음까지도 수용하시려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허공과도 같은 마음에다 인위적으로 잠시 줄을 그어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상()을 내려 놓자고 독려한다.     

                          


이와 더불어 갈라디아서 2 20절도 기억하여 상기 시키는데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 대학의 저명한 폴 니터 Paul Knitter 신학 교수님의 해석을 빌리면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안의 그리스도가 (혹은 그리스도로써) 사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즉 작은 에고로써의 내가 죽어 완전히 비여지면서 그 결과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는 아주 신비하고도 영적인 체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폴 니터 교수님는 이처럼 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경험은 부처님 법으로 말한다면 나의 모든 아상(我相)이 사라져 버리는 경험과 유사한 것으로 어쩌면 내가 없어졌을때 절대적인 전체가 한꺼번에 다 들어나는 깨달음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까하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깨달음의 경험이든 내안의 그리스도로써의 삶이던 먼저 선행 조건이 바로 기존에 나라고 여기는 작은 내가 먼저 없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내 주변 이웃을 하느님이나 부처님으로 보면서 보살피는 자비행을 통해서이든 아니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기더라도 완전히 수용할수 있도록 나 자신을 낮추는 수행을 통해 기존의 내가 사라지고 내안의 그리스도가 아니면 온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열반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저와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 석좌교수 폴 니터 교수님과의 대화 인터뷰 링크입니다.  http://www.btn.co.kr/program/Program_datail_contents.asp?ls_StSbCode=CATPR_04&PID=P413&DPID=64035

출처 : 옥련암
글쓴이 : 거 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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