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제법(諸法)이 본래 일어남도 태어남도 없다

장백산-1 2017. 7. 13. 15:09

목건련과 설법 ③

제법(諸法)이 본래 일어남도 태어남도 없다



“‘법은 움직이지 않나니 육진(六塵)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며, 법에는 과거와 미래가 없나니 항상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며, 법은 공(空)에 따르고 무상(無相)에 따르며 무작(無作)에 따릅니다. 목건련이여, 법의 모습이 이러하거늘 어떻게 법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법을 설한다는 것은 법을 설할 것이 없고, 설할 이도 없으며, 듣는 이도 없고, 얻을 것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마힐이 이렇게 말하자 팔백의 거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변재가 없어 그의 병을 위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수많은 조건들의 결과
움직인다는 것은 중생심에 불과
‘모습놀이’ 치우치는 순간 집착
법이 공하기에 설한 이도 없어


모든 것은 연기의 법성을 머금고 있으므로 자체 모습으로서의 자상(自相)이 없고(無自相) 자체성품으로서의 자성(自性)이 없다(無自性). 이렇게 자상이 없고 자성이 없다면 실제로 일체 만법은 실상에 있어 일어난 것 같지만 일어남이 없는 무생(無生)이며 불생(不生)이다. 연기는 곧 무기(無起)이며 무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 만법은 중생들이 보기엔 나고 죽고, 가고 오고, 생기고 없어지며, 갖가지로 움직이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움직임이 없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일은 만법의 부동(不動)에 대한 오해이다. 이 부동의 이치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이 뜻을 정지 상태로 여기거나, 또는 일체 만법이 겉으로는 움직이지만 그 본질은 움직임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부동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 부처님은 우리 인간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일체 만법의 움직임과 작용이 그대로 무생이며 부동이라고 설하신다. 사람이 나서 죽는 일과 육체적 정신적 활동들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대로 움직임이 없는 부동이다. 


그러나 범부 중생들은 이러한 일체 만법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움직임이라는 모습놀이에 치우쳐 늘 대상 경계를 따라 집착하고 방황을 그치지 못한다. 이는 마음이 무명업식(無明業識)에 가려져 육경을 분별하고 망상하고 번뇌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식기관인 육근은 무명업식으로 인해 육경을 육진으로 둔갑시킨다. 육경은 육근에 의해 나타나는 일체 만법이다. 육경이 무명업식으로 인해 분별 망상 번뇌로 오염되어지면 육진이 된다. 이때의 육진에서 진(塵)이란 번뇌 망상 분별의 의미이다. 또한 이러한 부동으로서의 일체 만법은 과거다, 현재다, 미래다하는 시간의 흐름이 끊어져 있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역시 중생의 무명업식에 의해 나타난 허구, 환상이기 때문이다. 즉 중생의 무명업식 마음이 간단없이 흐르고 생멸하는 까닭에 세상에 시간의 흐름이 있다고 여기며 일체 만법이 시간을 따라 움직인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있고 아침 점심 저녁의 때가 흐른다 할지라도 일체 만법이 본래 일어남이 없는 무기, 무생, 무멸, 부동이므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의 만법은 그 자체가 텅~비어 있는 공(空)이며, 모습이 없는 무상(無相)이며, 지음이 없는 무작(無作)이다. 일체 만법은 연기 작용의 나툼으로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없고, 자체의 모습이 없으며, 만들어짐이 없다. 예를 들어 박수소리는 두 손바닥이라는 조건과 두 손바닥을 서로 치는 조건과 공기라는 전달 물질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그렇기에 박수소리는 空하며, 자체의 모습이 없으며, 지음이 없다. 이렇게 일체 만법이 제모습 제성품 제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일체 만법에 적용되는 이름과 개념과 가치도 있을 수가 없다. 즉 일체 만법은 일체 만법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일체 만법일 뿐이지 딱히 무어라고 규정지을 수 없게 된다.

부처님이 금강경에서도 말씀하셨듯이 일체법은 일체법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이 일체법이지 일체법이 본래 있지 않으며, 일체법이 본래 있지 않으므로 석가모니여래는 법을 얻거나 법을 설한 적이 엇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실상에 있어 법을 설하는 사람이나 법을 듣는 사람도 본래 자체의 모습과 자체의 성품이 없기에 법을 설한 것도, 법을 들은 것도 아니다. 모두가 다만 중생의 분별 망상 번뇌에 의해 일체 만법(일체법)이 있다느니, 법을 설한 이가 있고 듣는 이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유마거사의 이와 같은 설법이 목건련의 소견을 질타하고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 
yoomalee@hanmail.net

[1399호 / 2017년 7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