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립문자(不立文字) - 문자로써는 뜻을 표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문자나 말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글과 말에는 궁극의 진리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말과 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선(禪)에 관한 책들이 요즘 많이 출판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불교학자는 역설적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글자와 말이 동원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어느 노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법을 듣거나 설법의 의미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질(本質)을 먼저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나서 설법의 의(意)를 생각해야 한다." 글자를 글자로만 읽으면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며, 만물에 부처님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참된 의미를 파악한 뒤에 언어나 문자에 접해야 궁극, 즉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두고 어느 선사는 "하늘이 어찌 무심(無心)할 수 있겠는가. 사시사철이 바뀌며 운행하는 사이에 만물은 생겨난다"고 전제하면서 "소리도 없이 기(氣)도 없이 언제나 천지(天地 : 우주, 이 세상)는 글자 없는 경전을 펼쳐 보인다"고 읊고 있습니다. 이에 덧붙여 그는 "석가모니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인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천지간(天地間)의 진리(眞理)가 바로 <이것>"이라면서 "마음의 눈을 열고 세상을 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리(眞理)을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어있는 꽃의 색깔이 다양하고 잎사귀가 푸른 것 그대로가 진리(眞理)이므로 별도로 진리(眞理)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도 꽃도 바위도 풀도 바람도 태양도 공기도 땅도 물도 존재하는 그대로 우리 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그들과 접하게 되면 자연히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나 노래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꽃, 바위, 풀, 바람, 태양, 공기, 바람, 땅, 물, 새가 우리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어 꽃과 새를 표현하게 됩니다. 사람이 하는 말이란 그 자체로 본질적인 존재가 아닌 방편(方便)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 형상을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꽃은 그냥 자연의 순환을 따라 피어납니다. 꽃의 말없음 속에서 인간은 뭔가를 느낍니다. 그야말로 <유마경>에서 진리(眞理)를 앞에 두고 침묵하고 있는 유마거사(維摩居士)의 경지를 경이롭게 바라보면서 "침묵이 천둥 같다"고 고백하는 뭇 불보살들처럼 말입니다.

침묵(沈默)이야말로 천둥과 같은 거대한 소리라는 말은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침묵은 '말이 없음'이 아니라 진실 그 자체의 소리지만, 음계가 다르므로 진실을 들어도 진실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에 투철해야 비로소 무언(無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한 수행자가 산 속에 사는 선사(禪師)를 찾아와서 선(禪)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선사는 대답하기 전에 먼저 수행자에게 묻습니다. "자네가 이곳에 올 때 골짜기에서 개울을 건넜지?"  "네, 건넜습니다." "그 개울의 물소리가 들렸나?" "네, 들렸습니다." "그럼, 그 개울물 소리가 들린 곳에 가서 진리(眞理)에 들어가게." 개물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 것이 진리(眞理)에 드는 첫걸음입니다.

도원(道元)선사는 <법화경(法華經)>을 읽고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봉우리의 색깔이며 개울물 흐르는 소리 모두가 부처님의 목소리와 모습이어라.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자신을 인도하는 진리(眞理)의 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선(禪)에서 얘기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이해하는 생활태도입니다.

백은(白隱)선사가 "한 손의 소리를 들으라"고 말한 것도 도원선사의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손으로 소리를 낼 리가 없다고 말하지 말고 한 손이 내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한 손에서 나는 소리가 반드시 들릴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소리 없는 소리를 들어야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어떤 책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어느 유치원 벽에 씌어 있던 글이라며 소개한 것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는 한 권의 책이다. 그 책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읽고 무엇인가를 써나가야 한다.>

저는 '불립문자(不立文字)'에서 공(空)을 읽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 권의 책으로 읽을 뿐만 아니라, '나'라는 이 책에 무엇인가를 써넣어야 합니다.

 ㅡ송원태도(松原泰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