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사람들을 말하게 하기도 하고 움직이게 하기도 하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장백산-1 2024. 1. 2. 16:15

사람들을 말하게 하기도 하고 움직이게 하기도 하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얼굴에 있는 눈은 결코 얼굴에 있는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얼굴에 있는 눈이 그 눈을 찾겠다고 바깥으로 얼굴에 있는 눈을 찾아나선다고 해도, 끝끝내 자기 얼굴에 있는 눈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얼굴에 있는 눈이 그 눈을 볼 수 있을까요?

눈을 통해 보이는 모든 대상들을 볼 때, 곧장 그 대상들을 보자마자 대상들을 보고 있는 눈이 내 얼굴에 있으니 보고 있구나 하고 눈이 확인됩니다. 자성, 불성, 본래면목, 참나라고 거짓으로 이름을 붙인 이같은 이름들 또한 얼굴에 있는 눈이 그 눈을 찾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성, 불성, 본래면목, 참나, 주인공 듣등의 이것들은 육근을 통해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성, 불성, 본래면목, 참나, 주인공 듣등의 이것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소리가 아니어서 들을 수도 없고, 맛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으며, 생각으로 헤아려 볼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 그 어떤 노력을 다하며 바깥으로 찾아 나선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것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자성, 불성, 본래면목, 참나, 주인공 듣등의 이것들은 눈이 눈을 보는 것과 같아서, 눈으로 볼 때 확인되고, 귀로 들을 때 확인되고, 움직일 때 확인되고, 생각을 일으킬 때 이미 첫번째 자리에서 먼저 확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큰스님들은 이 몸은 송장같아서 이 몸이 말하고 움직이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놈이 누구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으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지요? 이 글을 보자마자 이 글자를 해석하는 것은 나의 의식이고 생각입니다. 의식 생각 그것은 육식(六識)일 뿐이고, 분별심(分別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글을 보고 해석하는 '나'가 아닌, 이 글을 보자마자 아는 그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이 말을 듣고 이 말의 뜻이 '뭐지?' 하고 말의 뜻을 찾는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하는 그것은 누가 합니까?

머리로 헤아려 이것을 알려고 하거나, 찾으려고 하면 어긋납니다. 그러니 궁금하고 확인하고 싶기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구나 하는 절망감이 와야 하고, 그 허탈감 앞에서 '모를 뿐'하는 꽉 막힌 마음으로 버텨야 합니다. 이것이 화두이고, 의정입니다.

당신을 말하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모를 뿐입니다. 이것이 곧 선에서 말하는 수행입니다.


글 쓴이 :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