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증도가 -- 不見如來開秘訣 / 心外無差別法

장백산-1 2014. 10. 2. 14:30

 

 

 

證道歌- 제22강  (獅子吼 無畏說~終) 2006년 3월 29일  무비스님

 


 반갑습니다. 오늘 3월 29일. 음력으로는 벌써 3월 초하루가 되었습니다.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증도가도 이제 끝날 무렵이 됐는데, 뭐 중요한 내용은 이미 다 나왔습니다.

영가스님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당신이 공부해온 것이 적지가 않았습니다만,

크게 깨달음을 이루고 보니 또 과거에 공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

그래서 당신의 그 깨달음의 내용을 여한 없이 설파를 했고, 이 내용은 누가 와서 질문 하더라도,

또 누구 앞에서라도 참으로 자신 있고 당당한 그런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이여 深嗟懵憧頑皮靼(심차몽동완피달)이로다.

이런 표현들이 어떤 그 영가스님의 기개가 상당히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가 있지요.

도인스님들도 보며는, 자신의 그 성격이 다소 반영이 되는 것 같아요 

깨달음의 경지는 설사 다르지 않다고 손치더라도, 각자가 타고난 독특한 개성이라고나 할까? 성격이라고나 할까?

이런 것들은 그 법문을 가만히 들어보며 는, 상당히 그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저희들 강원에서 많이 공부하는 뭐 선의 지침서라고 하는 그런 내용 중의 하나로서 禪要(선요)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선요의 주인공 高峰(고봉)스님은 보면 은 아주, 그야말로 이름대로 높은 봉우리이면서 누구도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위엄이 서리고, 또 정말 그 날카로운 칼날 같고, 칼날 같고 또 무서운 우뢰 소리와 같은 그런 느낌을 주는 반면에, 그의 제자 법을 이은 준봉스님이라고 하는 분은, 아주 온화하고 넉넉하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감싸주는, 그런 것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영가스님도 보며 는, 앞에서 공부했던 신심명의 표현하고는 많이 다르지요. 

이런 표현들이 獅子吼(사자후)라고 하는 말이 몇 번 나왔는데, 정말 얼마나 그 동안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을 때의 어떤 그 뭐라고 할까. 마음과 깨닫고 나서의 어떤 그 심정을 서로 비교해 봤을 때, 자신의 그 어떤 깨달음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가 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獅子吼 라고 누구에게도 두렵지 않다. 이런 표현을 했어요.

獅子吼無畏說(사자후무외설)! 그리고 懵憧(몽동).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마치 頑皮靼(완피달)과 같은

그런 이들을 깊이 슬퍼한다. 그랬어요.

완피달 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한 말인데,  다루지 아니한 가죽 靼(달)자입니다. 이것이...

 


   완악한 가죽 이러는데, 그 가죽을 벗겨서 그것을 가공을 잘해야만 그것이 부드러운 가죽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대로 말려버리면, 이게 어떤 동물의 가죽이라도 아주 굳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철보다도 더 굳어요. 그렇게 굳고 어떻게 사람이 다룰 수가 없고, 쓸모도 없는 그런 가죽이 돼버리지요.

그러니까 굳기 전에 약품처리를 해서 가공을 해야만, 그것이  부드럽고 쓸 수 있는 건데 이 완피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루지 아니한 가죽. 가공하지 않은 가죽 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굳고 강하고 어찌할 수 없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런 상태다.

그래 당신이 이렇게 정말 귀가 번쩍 뜨이고, 눈에 불이 버쩍 나는 이런 기가 막힌 그런 이치를 설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뭐 미동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슬퍼한다.’ 그랬습니다.

 


   只知犯重障菩提(지지범중장보리)하고 不見如來開秘訣(불견여래개비결)이로다.

다만 중죄를 범하며 는, 菩提(보리)에 障碍(장애)가 된다는 사실만 알고, 如來가 열어놓은 그 秘訣을 보지 못했더라.

그래요. 그 뒤에 이제 또 이야기가 나옵니다마는, 앞에서 용시 비구의 이야기하고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뜻으로는

사실 반복되고 있어요.

 


   그 如來의 秘訣이라는 것이 뭐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공부해온 것입니다.

不見一法卽如來(불견일법즉여래)다. 그랬지요?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자리에서 보면, 自性(자성)자리에서 보면, 그 어떤 것/法도 그 속에 存在할 수 없다.이말이지요.

어떤 罪도 法도 부처도 중생도 존재할 수 없는 마음. 心外無差別法(심외무차별법) 이라는 말이지요.

마음 밖에는 差別된 法이 하나도 없다. 一心(일심)의 법칙이지요.

 


그래 無罪福無損益(무죄복무손익)-10 이라고 그랬지요? 罪이니 福이니 하는 것도 없고 損害니 利益이니 하는 것도 없다.

바로 그 한마음자리라고 이해하면 제일 쉽습니다. 그것이 秘訣이지요. 그런데 또 그 어떤 方便의 立場에서 보면, 별 별

이야기가 많지요. 중죄를 범하거나 뭐 不通懺悔(불통참회)니 어쩌니 그런 이야기들이 많고, 도대체 깨달음과는 뭐

거리가 멀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밑에 보면,

 


 有二比丘犯淫殺(유이비구범음살) 두 비구가 있어서, 한 사람은 음행을 범하고 한 사람은 살인을 범했어요.

그랬는데 수행을 잘하다가 그런 어떤 그 큰 죄를 범했어요. 저 앞에서 용시 비구는 혼자서 두 가지 죄를 범했고, 여기서는

두 비구가 한 가지씩 그렇게 범하게 됐다는 이야기인데, 토굴에서 둘이서 공부를 하다가 한 사람이 탁발을 하러 나갔었어요.

 


   그런데 낮에 한 남아있는 비구가 낮잠이 들어서, 앉아서 좌선 하다 낮잠이 들어서 잠깐 누워서 자고 있는 사이에,

초녀 라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무하는 여자가, 마침 그 허름한 남자 곁을 왔다가 누워서 자는 비구를 보고는 그만

음심이 발동해서, 이 나무하는 여자가 스님을 강간을 했다는 것입니다.

 

   뭐 이상하게 들릴는지는 모르지만, 인도 사회에서의 어떤 풍경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그 뭐 초막이라는 것이, 집이라는 것이 무슨 벽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저 하늘만 가릴 정도의 그런 토굴인데,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한 그런 일이지요.

 


 그래서 그 여자한테 이 비구가 당하고 나니까 낙심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기도 뭐 잠결에 그렇게 자의로 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당하고 나니까 낙심을 하고, 평생 공부가 이게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반 비구가 탁발을 해서 돌아왔어요. 그래서 왜 그렇게 있느냐고 하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상황이 그렇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탁발하고 온 비구가 그만 화가 나가지고,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를 나가서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저 쪽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화가 나가지고 그 여자를 좇아가서, 그냥 엉겁결에 쫓아간 것이지요. 그래서 보복을 하려고 쫓아가니까

그 여자는 상황이 다급한 줄을 알고, 도망을 가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의적으로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엉겁결에 죽었고, 또 음행을 한 비구도 그렇게 엉겁결에

음행을 하게 되었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두 사람은 우리가 수행자로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바리존자! 지계제일 우바리존자에게 찾아가서

참회를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지계제일 우바리. 율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不通懺悔(불통참회)라. 참회가 통 할 수 없는

그런, 큰 죄라고 이렇게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까 비구 250계의 조항으로 따지자면, 제일 큰 죄를 범했지요.

 

   그러니까 이건 도저히 참회가 될 수 없다. 해가지고 물리쳐버렸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뉘우치고서 새로운 수행을 시작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갔다가 이렇게 배척을 당했으니까, 죄의 매듭만

더욱 증장시켜줬다. 增罪結(증죄결). 우바리존자의 그런 반딧불 같은 소견은 죄의 매듭만 증장시켜줬다. 그랬어요.

 

   그리고나서 또 이 사람들이, 당시에 유마대사가 유명하니까 혹 유마대사에게는 뭔가 특별한 그런 가르침이 있지 않을까? 우리 마지막으로 유마대사에게 가서 한번 들어보고, 자살을 하든지 무슨 환속을 하든지 하자. 이렇게 이제 이야기가 돼서 그래 유마대사를 찾아 갔더니, 罪性이 本來 空하다. 우리의 自性자리에는 그런 罪니 福이니 하는 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달마대사와 혜가 스님! 또 혜가 스님과 3조 승찬 스님의 대화 속에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지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죄를 가져 와 봐라.”

          “죄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 그와 같이 罪라고 하는 것의 本來 性稟이 本來 空한 것이다. 實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마음의 자리에 눈을 뜨게 되었지요.

 

그래서 心生卽從從法生(심생즉종종법생) 心滅卽從從法滅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생겨남으로 해서 가지가지 法이 生기고, 마음이 滅함으로 해서 가지가지 法이 滅한다.

이 말이 앞에서 말한 如來의 秘訣이지요. 如來가 열어놓은 秘訣이다(如來開秘訣). 다른 것이 아니지요.

마음의 原理가 곧 秘訣입니다

뭐 특별한 무슨 알아듣지도 못할 그런 呪文(주문)도 아니고, 무슨 손으로 이상한 짓을 하는 그런 結印(결인)도 아니고요.

바로 마음의 實體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하며는, 그것보다 더 뛰어난 秘訣은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이 두 분들이, 두 분이 유마대사에게 가서 그런 그 法門을 듣고,

頓除疑(돈제의)라. 몰록 疑心을 除去했다. 妄想을 除去했다. 이거예요.

그리고는 還同赫日(환동혁일)이 消霜雪(소상설)이라 그랬어요.

마음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마치 그 뜨거운 태양! 밝은 태양이 서리나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시원 하게 그만 마음속에 그런 그 煩惱 妄想과 罪業이라고 하는 것이 다 녹아져 버렸다.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들의 잘못은 認定은 하겠지요. 認定을 하고 懺悔를 하겠지요.

이렇게 罪性(죄성)이 本空(본공)한 理致를 알고 懺悔를 해야 그게 진짜  懺悔가 되는 것입니다.

   千手經 水準만 해도 어떻습니까?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 

             罪亡心滅兩俱空(죄망심멸양구공)

             是則名爲眞懺悔(시칙명위진참회) 이렇게 했잖아요.

   천수경 뭐 다 외우시지요? 그와 같습니다. 이 이치의 입장에서 보며는...

 


 罪性이 本來 空한 理致를 알고 그런 가운데서 懺悔를 해야... 뭐 무릎이 닳도록 참회를 하고,

하루에 3천배 아니라, 3만배 3십만배 하면서 참회를 해야 그것이 진짜 참회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理致를 모르고서 참회를 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그것은 큰 所得이 없습니다.

理致를 그렇게 알고 참회를 할 때, 진짜 참회가 된다는 말이지요.

 


  참회하되 참회하는 것이 아니고, 참회할 것이 없는 立場에서 참회하는 것. 그것을 理懺事懺(이참사참)이라 그래요.

초발심자경문에 理懺事懺으로 可以消除(가이소제)하라. 가이 녹여서 제하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유마대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마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가스님께서 사례로 여기다 또 갖다 놨지요. 저 앞에 용시 비구 이야기하고 똑같은 경우인데, 갖다 놓았습니다.

  

不思議解脫力(부사의해탈력)이여 妙用恒沙也無解(묘용항사야무해)라.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뭐 끝도 없지요.

또 그런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말 기기 미묘 하고, 정말 불가사의한 해탈의 힘이고, 그렇습니다.

자성의 이치이지요. 마음의 이치이고, 자성 자리에서 보면, 不見一法(불견일법)이라. 한 법도 볼 수가 없는 것.

 

   그것이 여래라고 했지 않습니까? 심법은. 마음의 법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解脫力(해탈력)이여 妙用恒沙也無極(묘용항사야무극)이라. 묘한 작용이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아, 다함이 없다.

 


  四事供養敢辭勞(사사공양감사로)아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이라. 이러한 이치가 내 살림살이가 완전히 된,

영가스님의 입장이라면 四事供養을 감히 수고롭다고 사양할 것인가? 네 가지로 공양하게 되어있지요.

 

   신도들은 수행자에게 공양을 올리는데 네 가지인데, 하나는 房舍(방사)내지 臥具(와구). 그리고 의복. 그 다음에 음식.

그리고 의약입니다. 방사 의복 음식 의약. 또는 방사와 와구를 같이 쳐서, 와구 의복 음식 의약. 이렇게 이제 그 약이

중요하고요. 음식이 중요하고 입는 것이 중요하고 거처할 방사나 이부자리가 중요하다. 그래서 네 가지이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뭐 그런 것을 가지고 수고롭다고 사양할 까닭이 뭐 있느냐 이겁니다.

萬兩黃金亦銷得(만량황금역소득)이라. 하루에 만 냥의 황금을 쓴다 하더라도 다 녹일 수 있다. 이겁니다.

그것이 신도들에게 받아써도 빚이 될 까닭이 없다. 이렇게 이치를 제대로 알고 수행한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도 녹일 수 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반대로 이런 말도 있지요. 금생에미명심 하면 적수도 양안소라. 금생에 이 마음의 도리를 밝혀내지 못하면

설사한 방울의 물을 누구에게 얻어먹었다 하더라도, 그 한 방울 에 물 값에 대한 빚을 녹이기 어렵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참, 정말 이 佛法을 꿰뚫어 아시는 그런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은 참 능소능대하지요.

정말 東頭來東頭打 西頭來西頭打.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가르치고,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가르치고, 狀況에 따라서 그렇게 이제 다양한 그런 가르침. 팔만 사천의 그 가르침이 있게 된다. 다 맞는 이야기지요. 萬兩黃金(만량황금)또한 녹일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粉骨碎身(분골쇄신)하여도 未足酬(미족수)라 그랬어요.

이 네 가지 은혜. 그 네 가지 공양과 또 네 가지 은혜가 있지요? 恩惠(은혜). 은혜를 많이 입고 살지 않습니까?

이 은혜에 대한 것도, 공양을 받은 것이나, 또 은혜를 입은 것이나 이런 데에 대해서, 粉骨碎身 한다하더라도 사실은

깨닫지 못하면 족히 갚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적수 도 양안소라. 방울 물도 또한 녹이기 어렵다. 라고 한 표현하고 분골쇄신해도

또한 족히 갚지를 못한다 한 것하고 똑 같지요.

그 은혜를 치면, 출가인 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교인들이지요 뭐. 출가인 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은혜와 국가의 은혜와, 그 다음에 삼보의 은혜와 중생의 은혜. 이렇게 네 가지 恩惠를 치지요.

이 네 가지 은혜와 네 가지 공양. 이런 것에 대한 그런 빚. 그 빚도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一句了然(일구요연)하면 超百億(초백억)이라 그랬습니다.

한 구절. 한 마디에 환히 깨달아 버릴 것 같으면, 지금까지 진 빚. 수행 하면서 진 빚. 얻어먹고 뭐 입고한

모든 빚의  백억 배를 초과하는 그런 은혜를 갚는 길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萬兩黃金(만량황금)도 亦銷得(역소득)이라.

하는 말과 一句了然하면 超百億이라. 백억 배를 초과한다.

지금까지 입은 은혜보다는, 백억 배나 훨씬 초과해서 갚을 수 있는 길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이거 뭐 백억 가지 법문이라고 해석한 경우가 있는데, 그건 안 맞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한 마디에 환하게 깨달을 것 같으면 은혜의, 그 자기가 진 빚의 백억 배를 초과해서도 갚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있다. 그렇지요. 금강경에서 늘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정말 금강경의 이치 하나를 제대로 우리가 이해한다면,

항하강의 모래 수 만치 많은 그런 삼천대천세계에다가, 금은보화를 가득이 채워서 보시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

그런 말을 했지요.


   그렇습니다. 이 도리는 제대로 우리가 이해를 하고, 제대로 깨닫기만 하면, 그 말씀이 정말 맞는 말 이예요.

 

   예를 들어서 뭐 금정산의 수백만 배, 수천만 배의 그런 금은보화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有限한 것이고,

이 道理는 無限의 世界이기 때문에, 그래서 比較가 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金剛經에 그런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참 그거 하나가 우리 가슴에 와 닿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지요.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이여 恒沙如來同共證(항사여래동공증)이로다.

法中王最高勝이라. 법 가운데에도 왕이다. 이겁니다. 뭐 여러 가지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가스님이 지금까지 하신 그런 가르침! 뭐 길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不見一法卽(불견일법)이 卽如來(즉여래)-114 心外無物(심외무물). 마음 밖에 아무 物件이 없다.

 


 一切差別法이 마음 밖에 아무 것도 없다. 하는 바로 이 道理. 이 道理야말로 法 가운데에도 王이다. 그리고 가장 수승하다.

이 道理를, 抗河江의 모래 數와 같은 如來들이 다 함께 證得했다. 그래요. 그럼 깨달았다라고 하며는 뭐 다 부처님이고,

깨달으신 분인데, 다 如來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깨달았다라고 하며는 모두 이 理致를 깨달았다라는 것이지, 다른 理致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항하강의 모래 수와 같이 많고 많은 깨달으신 如來들이 다 같이 이 道理를 깨달았다. 이 이야기지요.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하니 信受之者(신수지자)는 皆相應(개상응)이로다.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풀어 놨으니,

解 자 는 뭐 설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풀어놨다.” 이거예요. 그야말로 지금까지 우리가 들어온 그 證道歌의 內容은,

바로 영가스님이 갖고 있는 如意珠를 풀어 놓고, 그 여의주를 우리는 마음껏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저 앞에는 旣能解此如意珠(기능해차여의주)-52 그런 말이 있었지요?

이미 능히 이 여의주를 풀어 놨으니... 이 解 자는 풀어 놨다라고 그렇게 이해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이 여의주를 여러분들에게 다 풀어 놨어...

지금 우리는 몇 날 며칠을, 그 여의주를 수용했어요. 여의주를 사실은 다 가지고 있지요.

 

   다 가지고 있지마는 어떻습니까? 이해를 못하면 그 가지고 있는지 어쩐지 모르지요.

예를 들어서 캄캄한 어두운 곳에 보물이 있는데, 등불이 없으며는 볼 수가 없지요.

뭐 후레시를 가지고 비추어야 그것이 보물인지 뭔지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치요?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 이 불법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누가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깨달은 사람이 제대로 설명해주는, 영가스님 같이 이렇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으면, 아무리 설사 개인적으로 지혜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래서 스승이 중요한 것이고, 또 스승도 이치를 제대로 깨달으신 분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하고,

불교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제대로 알고 설명을 하는가? 그렇지 못 하는가 하는 것. 이거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寶物이 있는데 燈불이 없으며는 그 寶物인지 아닌지 모르듯이, 이런 훌륭한 理致를,

다시 말해서 우리들 가슴속에 다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데, 여의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 事實을

누가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지혜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참, 대단한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내가 지금 여의주를 다 풀어 놨다.” 그건 당신의 여의주를 풀어놓았고,

따라서 우리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여의주를 말하자면, 영가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 우리가 이해하게도 되었지요.

 


   그래서 그 여의주를 영가스님이 쓰시듯이, 우리도 우리 여의주를 마음대로 끌러서 활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信受之者(신수지자)는 皆相應(개상응)하리라.

믿고 받아 가지는 사람은 다 상응할 것이다. 다 거기에 맞아 떨어질 것이다. 다 계합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了了見無一物(요요견무일물)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이라.

   또 최후라고 해도 좋을 그 단계가 되었는데, 우리 일심자리에서 보며 는, 차별된 아무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밝게 보고 밝게 보아 한 물건도 없으니, 환하게 꿰뚫어 본다 이겁니다. 실상을 꿰뚫어 보며 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이라.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어...

사람이니 부처니 하는 것은 우리가 便宜上, 說明하기 위해서 지어서 부르는 이름일 뿐이지 全部 幻想이지요.

그리고 그림자이고요. 꿈속에서 무언가 이렇게 스치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나타나 있는 듯이 보일 뿐입니다.

 

 了了見無一物(요요견무일물)이라. 아무리 밝게밝게 살펴보아도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더라.

그러며는 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이 세계는 뭐냐?

이 三天大千世界(삼천대천세계)! 大千世界(대천세계)도 海中浮(해중부)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라.

 

 물거품은 바닷물에 잠깐 떠 있는 것이지요. 바닷물의 變化에 依해서 잠깐 떠 있다가, 그냥 바로 바닷물이 돼버리지요.

거품이라는 存在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냥 꺼져 버리면 바로 바닷물입니다.

 


   一切聖賢 如電拂(일체성현여전불)이라. 그럼 그 가운데서 뭐 부처님이니 누구니 하는 수많은 깨달으신 모든 聖賢들!

그거는 번갯불이 번쩍하는 것이다 이겁니다. 번갯불! 아! 참! 대단한 표현입니다.

영가스님은 최소한도 이쯤의 眼目이 됐다는 것입니다.

 


   假使鐵輪(가사철륜)이 頂上旋(정상선)이라도 定慧圓明終不失(정혜원명종불실)이로다.

가령 무쇠바퀴가, 무쇠바퀴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이제 좀 더 강하게 표현하면요?

 

   머리를 부수고 지나간다. 내 몸이 산산조각이 된다하더라도, 가령 쇠바퀴가 내 머리위를 지나가서 나는 산산조각이

난다하더라도, 내가 깨달은 定(정)과 慧(혜)는 圓明(원명)해서 마침내 잃어지지 않는다. 몸뚱이 하고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그 뜻 이예요.

 


   영가스님의 이 自信이 넘치고, 또 完全히 眞理를 사무쳐서 보신 이런 분의 그런 아주 當當한 그런 가르침이고,

얼마나 아주 패기 넘치고, 기백이 넘치는 말씀입니까? 큰 그 쇠로 된 바퀴가, 머리 위를 지나가면서 골이 부숴 져서

뭐 산산조각이 설사 난다하더라도, 내가 증득한 定과 慧는 뚜렷이 밝아서 결코 잃지를 않는다.

 


   日可冷月可熱(일가랭월가열)지언정 衆魔不能壞眞說(중마불능괴진설)이라.

   이런 眞理에 合當한. 바로 眞理의 말씀! 사자후의 말씀!

이것은 설사 그렇게 될 리는 없지마는, 해가 차갑게 되고 달이 뜨겁게 되는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는 그런 어떤

세상이 온다하더라도, 뭇 마구니는 능히 이 진실을 眞說! 이 참 설법을, 진리의 설법을 능히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하! 이고!! 이렇게 자신 있는 말을 해야지요. 그만치 자신감이 넘치니까 자신 있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뭐, 거짓말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거짓말을 합니까?

 


   若將妄語誑衆生(약장망어광중생)인댄 自招拔舌塵沙劫(자초발설진사겁)이라-7 그런 말씀하셨지요?

만약에 거짓말을 가지고 중생들을 속일진댄, 나는 발설지옥에 가서 진사겁을 지내는 그런 과보를 내 스스로 받을 것이다.

그랬어요. 정말 자기의 생애를 다 바쳐서 큰 깨달음을 얻어 내었고, 그 깨달음에 의한 이런 당당한 설법! 참! 대단하고,

볼수록 아주 참 깊이가 있고, 감동적이고 그렇지요.

이런 말을 우리가 자꾸 工夫를 해서, 마음에 이렇게 깊이 젖어 들며는, 더욱 더 큰 感動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象駕嶸漫進途(상가쟁영만진도)에 誰螳螂(수당랑)이 能拒轍(능거철)가.

코끼리로 수레를 해서 아주 위풍당당하게 끌고 가는데, 길에 뽐내면서 간다.

漫進途 라고 하는 아주 잘 난 듯이 뽐내면서 길에 나아가는데, 

誰螳螂이 能拒轍가 어떤 당랑이가 능히 그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데는 誰見螳螂能拒轍가 해서 見(견)자가 들어있는 책도 있는데, 見자가 필요 없습니다.

 

   어떤 당랑이가 능히 拒轍할 것인가? 수레바퀴를 막을 것인가? 당랑이라고 하는 그 벌레 있잖아요?

그것이 쇠똥이나 말 똥 속에서 나오는 조그마한, 개미보다 조금 큰 그런 벌레인데, 그것이 수레가 이렇게 지나가며는,

감히 그 수레바퀴를 막는다는 거예요. 막아봤자 거기에 뭐 조그마한 그런 벌레에 불과한데, 수레바퀴에 깔려 가지고

뭐 흔적이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아주 이 당당하고, 진리의 말씀! 眞說(진설)이라고 그랬지요?

진리의 말씀에 그 어떤 그런 그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 또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 또 아주 그 불교 안에서

아주 소소한 方便 說에 떨어져 있는 그런 所見을 가진 사람들이, 아무리 나의 주장과 나의 설법을 막으려고 한들,

또 반대의견으로 나온들 그게 어떻게 거부당할 수가 있겠는가?

 

   도저히 이것은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 내가 이런 소리한데 대해서 구구하게 말이 많은 모양인데, 나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건 그야말로 螳螂拒轍같은 것이다. 그까짓 벌레가 뭐 수레바퀴를 막아본들 어떻게 지가 당할 것이냐? 이런 아주 자신감 넘치는 말씀입니다.

 


   莫將管見謗蒼蒼(막장관견방창창)하라 未了吾今爲君決(미요오금위군결)이로다. 관견을 가져서 창창히 비방하지 말라.

管見 이라고 하는 것은 대쪽같은 소견. 그러지요? 대를 이렇게 잘라 가지고, 대구멍 으로 하늘을 보며는 하늘이 조그맣게

보이지요. 대구멍 크기만치만 보입니다. 그 넓은 하늘이 대구멍 만치만 보이니까, 그렇게 소견이 좁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넓고, 정말 세상 넓은 것 보다 우리 마음은 더 넓은데, 그런 그 대쪽같은 소견으로

나의 이 진리의 가르침을 아주 蒼蒼히. 심하게 비방한다 이 말입니다. 비방하는 것을 아주 심하게 비방할 때,

이렇게 蒼蒼히 비방한다. 그러지요. 아주 심하게 이렇게 비방하지 마라.

 

   해봤자 되도 않는 소리다. 그래 너희들이 모르고 그렇게 하니까, 未了에 吾今爲君決이라. 그대들이 모르니까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서 풀어 주노라. 決자도 풀어줄 결자. 풀어 주노라. 다 해결해 주노라. 전부 해결해 주노라.

전부 뭐 어떤 그 문제가 있더라도 이치에 대해서 법에 대해서,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전부 내가 이속에서 다 이야기 했고요, 사실은... 또 설사 미진한 의문이 있다면, 내가 다 풀어준다.

 


   지금까지 증도가로서 그렇게 다 당신이, 모든 存在의 理致에 대해서, 眞正한 佛法에 대해서,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存在의 中道的 原理에 대해서 이렇게 내가 다 남김없이 설파했고, 그것은 모르는 그대들을 위해서 가르쳐준.

그런 해결해 준 그런 길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증도가 까지 오늘 이렇게 다 마쳤습니다.

 


   참 중요한 내용이고, 이건 뭐 평생공부를 증도가 를 가지고해도 결코 손해 볼 일이 아니고,

뭐 신심명도 역시 그렇습니다마는, 이번에 또 여러 염화실 법우님들 덕택에, 또 이 증도가 공부를 이렇게

한 번 더 하면서 살펴보니까, 아주 그 증도가의 깊이와 높이가 그 전에 알고 있던 것하고 또 다르네요.

아무리 공부해도 더 할 것이 있는 것이, 바로 이 도리가 아닌가? 감동이 옛날보다는 훨씬 더한 것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염화실 법우님들 덕택이고요. 여러분들 도 이러한 인연으로 정말 부처님과의 그 인연이 되었는데,

이 세상에 그 어떤 보다도 소중한 인연이지요. 그 인연이 되었을 때, 정말 바른 소견을 얻어서, 인생을 좀더

바른 소견으로 유익하고 보람되게 살아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마음뿐입니다.

 


   전번에 예고 해드린 대로요. 내일부터는 大乘讚(대승찬)!  자료실에 있는 대승찬을 가지고 계속하겠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대승찬을 준비해서 공부하도록 그렇게 하십시다. 이상입니다.

 


기록: 수경심. 정리: 대원성.    출처 : 염화실 다음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