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맡겨라

장백산-1 2016. 10. 31. 08:52

주인공을 믿고 주인공에  맡겨라 - 대행 스님[妙空大行]


일체를 움직이게 하는 장본인(張本人)이 누구인가?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一念不起處 일념불기처), 

이름하여 주인공(主人空)자리에 몰록 자신을 놔버려라! 그리하면 자기 근본이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이 마음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자신의 '주인공主人空'을 믿고 모든 것을 主人空자리에 놓아라!.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렇게 말을 하게 하고, 듣게 하고, 생각 나게 하고, 또 자기 몸과 마음을 운전(運

轉)하여 '움직이게 하는 자'가 있으므로 사람이 이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므로 자기를 운전하는 

그 당체(當體), 다시 말해서 主人空을 믿고 모든 것을 주인공자리에다 놓으라는 말이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데<本來 無一勿>도대체 주인공은 무엇이고, 믿는 자는 누구냐? 이렇게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마는 처음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의 주장심이 잡힐 때까지는 그렇게 해야 한다.

 

中心軸(중심축)이 있어야 수레바퀴가 돌아갈 수 있듯이 만약 심봉(心棒)도 세우지 않고 이것도 저것

도 모두 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만 이론일 뿐이요, 공空에 떨어진 사람이다. 이렇게 되면 자꾸 

허망하게 느끼게 되고 좌절하기가 쉽다. 이는 自性을 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래자기를 무시

하게 된다.

 

모든 것을 主人空에다 믿고 맡겨 놔버리고 그걸 지켜보아야 한다.

 

수박은 수박씨가 터져서 배아가  뿌리가 되고 싹이 되어 나와서 열매가 열린 것이니 수박이 잘 되기

위하여서는 그 뿌리에다 물과 거름을 잘 주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뿌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니 삶의 모든 것을 자기 뿌리인 根本, 主人空에다 일임하고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뿌리를 믿고 거기에다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잠재(潛在)해 있는 實相,

本來面目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뿌리인 실상, 본래면목을 믿지 못한다면 道에서 멀어진다.

 

탐. 진. 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과 分別 妄想 妄心을 쉬면 저절로 청정한 보리심이 나타난다. 그러

면, 삼독심을 여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무조건 자신의 主人空을 믿고 삼독심과 분별 망상 망

심을 주인공자리에 내려놓아야 한다.

 

일단 본래무일물, 주인공자리, 본래면목을 알고 나면 그것을 믿고 놓을 삼독심 분별 망상 망심도 없는 

것이지만 처음에는 무조건 자기의 主人空을 믿고 삼독심 분별 망상 번뇌 망심을 주인공자리에 내려 

놓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주인공, '거기'에서 나오고, 거둬들이는 것도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내는 마음이 일어날 때는 즉시, 자기 본래면목, 주인공 자리에게 탐하는 마음을 가라 앉혀 

달라고 일임하여 보라. 화나는 마음이나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보라.

그러면 탐내는 마음이나 화나는 마음이 그냥 그대로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자꾸 하다보면 탐.진.

치 삼독심을 스스로 여의게 되고 본래 청정한 보리심이 나타난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육신을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마음을 나라고 할 수도 없고, 生命을 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마음이 일어나기 이전 주인공자리, 本來面目을 이름 하여 主人空이라 말하는

것이니 초발심자들은 마땅히 다음과 같이 해나가야 한다.

 

① 일체의 생활, 모든 삶을 主人空에 일임하여 내려놓는다. 즉 맡긴다.


② 자기 주인공을 내면에서 깊숙이 믿으며, 믿음에 있어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③ 마음의 일체 쓰임을 자기 내면에서 觀한다. 마음의 일체 작용을 주인공에 몰록 맡겨 놓으면(放下着)

   스스로 의정(疑情)이 일어나서 자기의 참 생명수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④ 만약에 이 육신이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새삼스레 '이게 뭘까?' 한다든가, 내가 뻔히 아는 것을 가지

   고 또 의정을 낸다면, 마치 빈 맷돌이 도는 것처럼 아무 소용이 없으니 아는 것은 아는 것대로 자기의 

   주인공에게 맡겨 놓아라.

 

⑤ 스스로 정말 모르는 것이 의정 났을 때에는 자기 내면 깊이 觀하여, 굴리며 의정을 풀어야 한다. 결코 

    남에게 물어서 풀어서도 아니 되고, 經을 보고 풀어서도 아니되며, 생각으로 思量하여 풀어서도 아니

    된다.

 

⑥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니어서 꿈속에서 일체의 모습이 갖가지로 나타나는 보이는 것은 모두가 자기가 化

    해서 나타나는 것이니 설사 꿈속에서 자기가 부처님 또는 그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여도 결코 

    거기에 속지 말 것이며, 또한 화가 나거나, 안 되는 일이 있거나, 가정의 식구들이 속을 썩이더라도 자

    기 주인공에다 맡겨 놓는다.

 

⑦ 病에 시달리는 식구들이 있어도 주인공에게 맡겨 놓고 낫게 될 것을 절대 믿는다. 본래 참나는 體가 

    없기에 空해서 참나에게는 일체, 병이든 무엇이든지간에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항상 잘

    되어도 감사하게 맡겨 놓고, 잘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맡겨 놓아야 한다.

 

⑧ 불성(佛性)은 본래 부동(不動)하여 움직임이 없지만, 내 마음의 중심 주인공은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기 때문에 내가 壽命이 짧으면 七星이 되고, 아플 때에는 醫師가 되고, 가난하면 관세음이 되고, 

    천도가 되려면 지장地藏이 되고, 법法의 거울이 되면 판사判事가 되고, 임신姙娠이 안 되었을 때에는 

    삼신三神이 된다.

 

내 마음의 중신, 주인공은 이렇게 찰나찰나 나투며 만법의 분신分身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

면 부처(法身), 마음내면 응신(報身)이요, 움직이면 화신(化身)이니, 내가 했다 안했다 내세울 것이 없어

야 자유로운 사람이며 부처이다.

 

그렇게 되어야 윤회에 끄달리지 않으며, 시간도 공간도 초월하게 되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

動靜 그대로가 생활이며 참선參禪이 되는 것이다. '끊어졌다 안 끊어졌다' '놨다 안 놨다' 이 모든 생각

을 놓으면 그것이 곧 참선이다.

 

'망상을 끊어야지' 하는 것은 벌써 그 妄想이 붙어 돌아가는 것이다. 또 '망상을 끊지말아야지' 하는 것도 

망상이 붙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이니 망상이 아니니 그 분별을 주인공에 놓아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가지려 하고, 갖지 않으면 버리려 하는 양변兩邊의 마음을 다 주인공에 내려놔야 한다.

 

정진精進<기도나 좌선>중에, 또는 꿈에서 해나 달이 환히 비추었다든지, 백새가 나타났다든지, 하는 것은 

다 자기 성품(自性) 속에서 나오는 것이며, 앞으로 정진하여 밝아질 수 있는 것을 예고하여 주는 것이니 

거기에 걸려서 구속되지 말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무조건 일체 만법이 공空에서 나고 드는 줄 알고<萬法歸一> 공空에다 들이고 내며 오직 모든 것을 空에다 

내려놓아라! 그러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을 때에는 말없이 안으로 굴려라. 그래야 자기와 참자기가 상봉하

게 된다. 모든지 일체를 다 놓아라! 놓는다는 것조차도 없을 때까지 놔버려라! <休去憩去>

 

말이나 생각하는 것 모두가 幻想에 지나지 않으니 主人空에 일임해버리면 모든 과거의 아집我執, 과거의 

인연에 따른 유전성, 업보성 이 모든 것이 몰록~ 쉬게 된다. 쉬게 되면, 앞으로 갖는 것도 없고 짊어질 것

도 없다. 그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소리를(觀世音) 다 들을 수 있고, 또 관觀해보고 판단할 수 있게 되니, 

'나는 눈도 천개(千眼)이요 손도 천개(千手)이니, 원하는 대로 몸을 나투어(顯現) 다가가서 다독거려 주리

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첫 번째, 놓아버리는 공부<不取相>가 되어야  비로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니, 

그런 까닭으로<분별심을>놔버리는 공부를 첫 번째로 시키는 것이다. 아주 놔버린 자는 오히려 사는 도리

가 있으나, 붙들고 있는 자는 죽는 도리밖에 없다.

 

억겁 전부터 내 모습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여기로 왔다가 저리로 갔다가 하는데 과연 나를 끌고 온 

것이 누구인가?.. 다름 아닌 주인공主人空이다. 그러니 '에라~ 주인공 당신이 다 맡으시오!'하고 다 놔버

린다면 자신은 물론 남도 편안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해나가다 보면 주인공主人空이라고 세울 것도 없이 우주萬法이 저절로 돌아가고 있음(法輪常轉)

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한 생生을 집착하지 않고, 이 한 생을 다 놔버렸다면 일체를 얻는다. 도道를 공부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남아 있고 아직도 자기를 내세울 것이 있다면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놓고 지켜보라<止觀>, 들고 나는 것을 잘 지켜볼 줄 알 때, 비로소 한마음의 천둥 번개가 침을 

알 것이다.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인공을 믿고 나가라. 도중 어떠한 장애가 오더라도, 설사 죽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주인공은 나를 죽게 인도하지 않을 것' 이라고 철저히 믿고 놓아라.

 

자기 독존(獨尊)을 관觀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만약 좌선坐禪을 한답시고 모든 것에 귀막고, 아랫배

에 힘 주고 앉아서 관觀 한다면 오히려 육신에 집착하게 되는 형국이므로 참다운 수행이 될 수 없다.

 

참나는 뿌리 없는 기둥과 같아서, 모든 것을 연방 쥐고, 또 놓고 돌아가는 것이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空

하다. 이것을 알 때라야, 비로소 어디에 관하는 것도 아니게 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없는 중심'에 

관觀해야 된다.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니, 오직 거기에다 모든 것을 놓고, 일임하면 그것이 바로 참선禪이다. 뿌리 

없는 뿌리를 觀하다 보면 모든 것이 한 군데서 나고 드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로 뭉치게 

된다. 이때서야 비로소 나<眞性>를 발견發見하게 되는 것이다.

 

구멍 아닌 구멍에서 일체一切가 다 나왔으니, 그 구멍 아닌 구멍을 관觀해야 된다.

자기는 본존불本尊佛, 즉 마음의 시자侍者라고 믿고 생활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주인을 찾기 않기에, 하는 일마다 헛일이 되고 만다. 모두 자기 껍데기를 

위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만일若 마차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칠 것이냐? 소를 칠 것이냐?

譬牛駕車 車若不行 打車卽是 打牛卽是(비우가거 거약불행 타거즉시 타우즉시)

 

고양이가 쥐 노리듯, 어린 아이 엄마를 그리듯, 자문자답自問答하면서 자나 깨나 오매불망으로 자기의 본

래면목本來面目, <진여>을 그리워해야 된다.

 

눈밝은 스승을 만나야 된다. 장님을 따라가다가는 구덩이에 빠지고 만다. 무작정 남을 좇지 말고, 자기 독존

獨尊, <자성>을 먼저 發見할 일이다. 우리의 이 마음자리는 本來 淸淨하고, 텅 비어 허공처럼 맑은 자리인데 

<廓然無聖> 새삼스럽게 '맡긴다', '일임한다', '대화한다'느니 하는 것은 도대체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

만 그것은 모르는 말이다. 내가 본래 절대공<眞空>이기 때문에 절대의 누구하고도 대화할 수가 있고, 맡길 

수도 있는 것이지, 만일 내가 본래 절대공<大寂光>이 아니라면 맡긴다 해도 대화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분별 번뇌 망심 망상을> 놔버리는 과정 없이는 그 귀중한 무가보물無價寶物, 절대공, 진공을 터득할 수 

없다. 無心은 무심해지고 싶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심해지고자 애를 써서 무심이 되었다면 그 

무심은 이미 無心이 아니다. 진짜 공부는 자기를 알고 나서부터, 즉 견성見性을 하고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자기의 주인공을 잡고 나가다가 자기自己를 찾고 나면 그때부터 만행萬行이 시작된다.

         

전체가 門이기 때문에 문이 없다고 하였다<無門>. 그러니 오직 한 門만 찾아야지, 이 문 저 문 기웃거리다

가는 문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바로 門이기에 일문(一門)이다. 내 문의 빗장을 쥐고 관觀하면서 萬 가지 

들이고 내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내면의 깊숙한 門인 것이다. 

 

일체 만물이 다 스승 아님이 없고, 문門 아님이 없다. 문門이라고 하니까 문門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면 門

을 찾지 못한다. 온 천지 온 우주가 환히 터졌기에 그렇다.

 

'門을 꼭 찾아야 되겠다'하는 마음 때문에 공부하기가 어렵다. 그 마음이 오히려 門을 가로막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