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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라는 상(법상)을 내지 말라

장백산-1 2024. 8. 24. 14:32

법이라는 상(법상)을 내지 말라


불교는 무집착과 무소득을 설합니다. 집착할 것도 없고 본래 얻을 것도 없다고 합니다. 무유정법이라고 해서 정해진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교를 특정한 종교적 교리로 규정지으려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사실 ‘불교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규정지을 만한 정해진 법은 없으며, 특별한 정해진 교리를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불교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사람들이 내세워놓은 온갖 교리며, 전통이며, 가르침이며, 고정관념이며, 진리에 대해 부정을 하면서, 그 고정된 도그마를 깨뜨리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는 사람들이 세워놓은 온갖 망상을 깨뜨리는 것, 즉 파사의 역할을 합니다. 파사 즉 삿된 것을 파하고 깨뜨리면 저절로 현정 즉 바른 것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삿된 것을 파하면 저절로 진리가 드러날 뿐이지만, 그 진리랄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며, 내세울 수 있는 어떤 특정한 무언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진리를 가리키는 용어들은 언제나 전부가 다 방편(方便)일 뿐입니다. 언어로 쓰여질 수 있고,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방편입니다. 불성, 본래면목, 여래장, 참나, 주인공, 일심, 자성청정심, 진아 등 이런 모든 용어들이 의미하는 어떤 특정한 법이나 물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지요. 그래서 이를 가명(假名)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법상을 타파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불교에서는 무아, 중도, 연기, 공이라는 교리를 내세운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들은 전부 다만 삿되게 세워진 잘못된 분별망상을 깨부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무아, 중도, 공, 연기라는 불교의 핵심 교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전부 다 ‘없다’ ‘허망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며 가명일 뿐입니다.

무아도 나랄 것이 없다는 것이고, 공도 텅 비어 없다는 것이고, 연기도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은 인연가합으로 만들어진 비실체적 존재일 뿐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중도도 마찬가지인데요, 불교에서는 언제나 가르침을 설할 때 중도로써 설합니다. 중도로 설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언제나 무언가 하나를 내세우거든요. 중도는 어느 쪽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이법이라는 것 또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일 뿐, ‘이것이다’라고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님들이 수행 점검을 할 때에도 ‘그래 그게 맞다’ ‘네가 진리를 알았다’라고 하지는 않고, ‘그건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이유는 ‘이거다’라고 내세울 어떤 것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아도 마찬가지인데요, 예를 들어 무아는 브라만교의 아트만 사상이라는 유아(有我)적 견해에 사로잡혀 있는 부처님 당시의 수많은 인도인들에게 그러한 유아적인 아트만 사상이 잘못된 것임을 설하기 위해 무아라는 방편으로 치우친 견해를 깨뜨려 주신 것입니다. 무아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참나며 불성, 본래면목을 내세우는 방편을 쓸 수 있겠지요.

이처럼 그 어떤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법, 정해진 것이 없는 법, 허공처럼 텅 비어 흔적도 없는 법을 어쩔 수 없이 언어라는 세속제로써 사용하지 않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교리처럼 내세우게 된 것이 바로 공이며, 무아이고, 연기와 중도의 교리입니다.

이처럼 모든 교리는 사실 교리라고 정해진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 응병여약의 방편설법인 것입니다. 불법은 이처럼 그 어떤 것도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망상분별로 세워 놓은 모든 상을 다만 깨뜨리기만 할 뿐입니다.

다만 그렇다고 돌이나 나무 같지는 않아 달마 무심론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마음은 없으나 모든 법의 실상을 잘 깨닫고 참된 반야를 갖추어 삼신이 자재하게 반응하고 작용함에 거리낌이 없다” 이처럼 정해진 그 어떤 법이나 마음은 없지만, 마음 없는 가운데 여여하게 비추고 작용합니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