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에 연기법 실천
감사와 찬탄
연기법은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 그것이 있기에 내가 있고, 또한 내가 있기에 그들, 그것이 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만한 생각이 있을까.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돕고, 나를 살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연기적인 자각은 이처럼 우리를 따로 따로 떨어진 저 혼자 잘난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연결된 전체로써의 하나임으로 보게 함으로써, 나를 있게 한 일체만법에 무한한 감사와 찬탄을 보내게 한다.
보시, 자비로운 나눔
일체 모든 존재들이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나를 살려주었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보시와 나눔이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다면 이 연기적인 삶에 나와 너라는 분별은 사라진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일 수밖에 없는 동체(同體)적인 한생명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곧 내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를 행하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주는 것’은 곧 내가 ‘받는 것’이다.
이러한 동체대비(同體大悲)야말로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꽃피어나는 상(相) 없는 자비이며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다.
수용(받아들임)
연기법의 세계에서 보면,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하고 불평등한 것 같을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러한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라. 즐거운 일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즐겁게 받아들이고, 괴로운 현실은 과거에 지어 놓은 악업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임으로써 악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참된 수용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불이법의 수용은 곧 삶과 통째로 하나로 계합하는 것이다. 분별없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중도의 실천이다.
무집착(내려놓음)
이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연기하며 변화하기에 영원한 것은 없다. 붙잡아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집착하고, 그것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언젠가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붙잡아 집착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이라고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뿐이다. 연기적인 삶이란 방하착(放下著)이요, 집착을 내려놓는 삶이다.
관(깨어있는 관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연기법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셨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온전한 관찰, 관조(觀照)에 있다. 분별없고 치우침 없는 관찰에 있다. 중생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자기 식대로’, ‘의식으로 걸러서’ 해석해서 왜곡되게 바라보지만, 부처님은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있는 그대로를 분별없이 보는’ 관(觀)수행, 위빠사나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준다.
공존(조화로운 삶)
현대의 환경문제와 기상이변 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중심주의에 따라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연기적인 가르침 안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소외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없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곧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동체적이고 상의 상관적 지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이 소멸된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실천은 인간과 자연이 상의상관적이며 동체적인 관계로써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와 자비의 정신에 따라 내 몸처럼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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