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명상을 해야하는 이유 !!!

장백산-1 2014. 2. 28. 02:47

 

 

 

 

 

명상(冥想)을 해야하는 이유 !!!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狀態

 

우리 마음 意識의 日常은 언제나 무언가를 하고 있는 狀態.

‘doing’ 의 상태다. 일을 하고 있거나, 밥을 먹고 있거나, 책을 보고 있거나,

TV를 보고 있거나,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하지?’,

이제 뭘 할까?’ 하고 할 것을 찾기 시작한다.

 

심지어 남들이 보기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瞬間조차도

內面에서는 끊임없이 生覺이 일어나고 있다.

정 할 것이 없을 때는 生覺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다.

 

하고 있다는 것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고,

어딘가를 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卽, 行爲할 때 우리 意識 마음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 때 우리의 마음 의식언제 그 목적지에 도착할지에 마음이 차 있거나,

빨리 도착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물색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 상태다.

 

그런데 그런 行爲들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意識的, 意圖的으로 行爲하는 것이고,

둘째는 無意識的으로 行爲하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목적을 정해 놓고,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意圖的으로 을 하고,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다른 경우, 無意識的으로, 그저 習慣的으로

하고 행동하고 각을 하기도 한다.

 

그저 습관적으로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밥을 먹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입에 가져다 대는 행동이나,

어떤 사람의 특정한 에 화를 내며 대응을 하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의도를 했던, 하지 않았던 끊임없이 하는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하는 상태,doing’의 상태는 어떤 特性을 가질까?

 

 

意圖的으로 行爲하는 狀態

 

먼저 의도적으로 하는 마음 의식의 상태를 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의도한다.

성공하려고, 돈 벌려고, 인정 받으려고,사랑 받으려고, 칭찬 들으려고 등

多樣한 理由로 意圖를 일으켜 行動한다.저마다의 다양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 많이 움직이고, 많이 행동해야

더 크게 成功하고, 認定 받고, 나아가 더 많이 幸福해질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어느 정도는 행위는 곧 행위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업보의 법칙에 따라

행위를 많이 할수록 많은 결과를 가지기도 한다.

많은 시간을 일해야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된다.

적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集中을 하거나,특별한 能力이 있는 사람이거나,

어떤 靈感이나 直觀에 따라 일을 하게 될 때

더 적게 하고도 더욱 더  많이 얻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오히려 끊임없이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는 것 보다,쉴 때는 온전히 푹 쉬어 주고,

할 때는 集中力 있게 몰입해서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큰 成就를 이루곤 한다.

 

사람도 낮에는 일하지만 밤에는 자야 하고,

농사 일도 봄, 여름, 가을에는 열심히 일하더라도 겨울에는 쉬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삶의 이치는 멈추어야 할 때와 나아가야 할 때, 쉴 때와 일할 때,

잠들 때와 깨어날 때,이완할 때와 수축할 때가 적절히 중도적으로

均衡을 유지할 때에 오히려 더 큰 힘(力)과 智慧靈感이 생겨난다.

 

그것이 바로 自然의 理致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치는 이완과 수축, 밤과 낮, 들숨과 날숨 등

모든 것이 波動하는 波長처럼 골(골짜기)과 마루(봉우리)가 반복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無爲自然의 의미가  自然의 理致다.

우리 삶 또한 계속해서 行爲만 할 것이 아니라,쉴 때 충분히 쉬어줌으로써

나아가야 할 때멈추어야 할 때의 흐름을 잘 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바닷가에서 윈드서핑 하는 사람이 파도를 거스르기 보다

그 파도의 흐름을 타고 함께 유유히 따라 흐르듯이,

우리도 自然의 흐름, 宇宙法界의 흐름에 올라타서

우리의 삶 또한 自然스러운 삶의 波動許容해야 한다.

 

, 많이 行爲해서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얻으리라는 生覺

虛妄하고 헛된 幻想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런 것처럼 보일 뿐, 정말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어떤가?

더 많이 움직이고, 일하고, 행위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지만

성공할 거라는 확신에 찬 幻想을 쫒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껏 우리는 거의 단 한 瞬間쉬는 시간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생각이라는 마음 의식의 活動이 온전히 쉬어본 적이 없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意圖的으로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는 것만이 成功의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 않는 시간그냥 버리는 시간이고 아까운 시간이며

낭비하는 시간이라고 굳게 믿어 왔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다.

 

 

無意識的으로 行爲하는 상태

 

두 번째로 무의식적으로 행위하는상태를 살펴보자.

 

우리는 의도적으로도 항상 무언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精神病的인 강박관념 속에서 살고 있지만,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자동적 반사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우리 무언가를 끊임없이 행동해야만 직성이 풀린다.

또한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들이 그저 툭툭 튀어 나오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이 저절로 피하게 되고,

으로는 상대방을 욕하거나 비난하게 된다.

과거에 습관적으로 하고 거친 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나도 모르게 이 튀어 나올 확률이 높다.

 

意圖하지 않았는데도 無意識的으로 저절로 行爲하는상태는

무엇보다도 生覺이 잘 하는 主特技. 生覺은 내 意圖와는 전혀 상관 없이

무의적으로 저절로 끊임없이 온갖 것들을 만들어내고 生覺해 내곤 한다.

우리가 生覺雜念, 煩惱, 妄想이라고 부르는 理由

生覺統制 不能 狀態로 雨後竹筍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뇌과학에서도 하루에 이런 生覺과 妄想들이

하루에 6여 개 정도가 일어난다고 하니,

이쯤 되면 도저히 生覺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生覺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종알대며 生覺을 해 대고 있다.

 

生覺 하는 것’, 이 生覺하는 行爲야말로

우리가 행위하는 모든 ‘doing’의 최고봉이라 할만 하다.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生覺을 한다.

 

 

doing에서 being으로의 轉換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우리는 내 스스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끊임없이 생각행동으로 行爲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冥想의 始作은 바로 이 事實을 直視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그저 고요하게 텅~빈,

아무것도 행위하지 않는 마음 의식상태에 잠시 머물러 보는 것이다.

‘doing’에서 ‘being’으로의 전환,

‘행위에서 있음으로의 전환, 그것이 명상의 시작이다.

 

一切의 ‘행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잠시 내려 놓고

잠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고요함 속에 그저 存在해 보는 것이다.

그냥 있어 보는 것이다.

 

 

왜 명상을 해야 하지?

 

그러면 본격적인 명상 강의에 앞서

왜 행위의 시간에서 있음의 시간으로 옮겨가야 하는지,

‘doing’에서 ‘being’으로 전환해야 하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존재의 상태, being의 상태는 곧 텅~빈 의 상태라고 할 만하다.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고요함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는

텅 ~ 빈 바탕空間꽉~찬 充滿함이 있다.

 

텅~빈 空의 狀態란 아무 것도 없는 無意味하고 虛無한 空이 아니라,

그 텅~빈 가운데 모든 것을 可能하게 하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無限權能모든 創造의 씨앗들을 품고 있는 無限 可能性의 空間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텅~빈 충만의 의미다.

그것을 佛性, 본래자리, 自性佛, 法身佛, 참나, 진아, 대아, 신성, 주인공 등

그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것에 固定된 實在하는 實體는 없지만

그 텅~빈 狀態에는 모든 것을 可能하게 하는 에너지情報場이 存在한다.

 

量子物理學에서도 量子수프, 零點場, 혹은 디바인 메트릭스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에너지情報場存在를 설명하고 있다.

 

바로 이 淸淨한 텅~빈 空의 場,

卽, 텅~ 비어 있지만 모든 것이 充滿根源과 보다 더 깊이 連結될수록

우리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도 自然스럽게 根源의 에너지를

現實의 삶에 가져와 現實創造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根源 에너지場과 連結될 때 비로소

제 스스로 生覺으로 만들어 놓고 제스스로 그 생각 속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

헛된 妄想의 苦痛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淸算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우주의 흐름과 하나되는 지고의 평화와 고요 속에 이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근원 에너지장과 연결될 수 있을까?

그 근원과 연결 상태를 단절시키는 生覺의 作用을 멈추면 된다.

 

그 근원과 연결을 끊는 작용이 바로 ‘doing’, 의식 마음의 행위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는 마음 의식의 行爲를 함으로써

내 방식대로의, 自我觀念自我意識/我相에 입각한 世上建立하고,

그 방식대로 되면 행복이고,그대로 되지 않으면 불행이라고 착각하면서

자신 인생의 불행과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

 

행복과 불행,선과 악,옳고 그름,성공과 실패 등이라는

무수한 二分法的 觀念/槪念을 만들어 놓고 그 중 한 쪽을 選擇하기 위해

또 다시 끊임없이 행위하고 노력하는 삶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현실이라는 삶의 실체다.

 

즉 우리는 본래의 근원적인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스스로 빠져 나와

선악 등의 二分法的 觀念의 現實을 스스로 만드는 行爲를 하며 살았고,

그렇게 만든 虛妄한 觀念/槪念 속의 現實에서

더 좋고, 더 옳고, 더 행복하고, 더 성공적인 삶을

選擇하기 위해 끊임없이 행위하며 살고 있다.

 

그렇다면 잠시 우리가 왜 애초에 이런 헛된 觀念을 만들어내고,

虛忘한 世上을 만들어내며,分別을 만들어 냈는지를 生覺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原因은 바로 我相’ 때문이다. 이 몸과 마음을 보고 라고 錯覺하고,

라는 固定實體가 있다고 生覺하면서부터 삶의 모든 問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어지면 나와 남을 나누어 놓고, 分別하고,

나에게 利益이 될지 가 될지를 判斷하게 되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되고,어떤 것이 내게 더 좋은지 나쁜지를

끊임없이 是非 分別 比較 判斷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를 중심으로 虛妄한 世上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이상 우리는 언제까지고

完全한 幸福, 完全한 平和와 涅槃에는 이를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낸 그 모든 行爲의 作業들을 멈추고

本來 根源고요하고 텅 ~ 빈 바탕 공간에

意識周波數波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마음/의식의 行爲를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해야 한다.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그저 지금 여기라는 이미 본래부터 꽉~차 있고 충만했으며

모든 것이 들어오고 나가던 바로 그 텅~빈 바탕 근원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런 연습을 하는 것이 바로 명상수행이다.

 

 

너무 쉬워서 어려운 명상

 

冥想이란 이처럼 모든 행위를 멈추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하여

그 순간의 모든 현실을 알아차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自覺하는 일이다.

아무런 判斷이나 分別도 하지 않고,그 어떤 生覺도 하지 않고,

오직 현재라는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 生覺이 만들어내는 소소한 성공 조각들을 얻는 대신,

生覺 너머의 텅~ 빈 바탕 空間 根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샘솟아 나오는 源泉的인 힘과 지혜와 자비가 삶을 이끌어 가게 된다.

 

이처럼 명상이란

특정한 기술을 통해 뭔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라거나,

성공을 위한 좋은 도구라거나,불행한 상황을 행복한 상황으로 바꾸는

만병통치약이라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을 생각 너머 텅~빈 바탕 공간 근원에서 성찰함으로써

그동안 잘못 가고 있던 어리석음의 길을 돌이켜

根本的으로 삶의 方向轉換시키는 길이다.

 

명상을 통해

작은 것들을 얻으려고 욕심을 내지 말라.물론 그런 공덕도 당연히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의 참된 공덕은 내가 생각해 오던 그 진부한 인생 스토리의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인 삶의 변화이며 중생에서 열반으로의 대 전환이다.

 

내 생각대로 명상의 효과가 확실하게 잘 나오지 않는다고

좌절해서는 않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상은 그런 인생살이의 소소한 행복을 얻는 기술 같은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삶의 뿌리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게 하는

대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는 당장에 눈에 띄는 변화가 보이거나,

눈에 띄게 명상을 했더니 사람이 변했다거나,

금방 성공을 했다거나, 행복해 졌다거나, 그런 것을 바라겠지만,

명상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각 너머의 보다 깊은 근원의 세계에 직접 다가서는 것이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명상 수행 중에도 큰 변화가 없는 듯 보일 것이다.

 

이 점이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시작하다 말고 쉽게 그만 두는 이유다.

 

다른 수많은 것들 예를들어, 운동이나, 공부 같은 것들은

모두가 노력한 만큼, 행위한 만큼 결과가 바로 바로 보인다.

 

그러나 명상은 그런 것들과는 애초에 뿌리를 달리한다.

행위한 만큼 결과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내려놓고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행위가 더 빠른 것 같고,

존재하는 것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금 여기라는 이 자리에 머물러 존재하고 자각하는 것이

텅~빈 충만이라는,무한한 근원의 총체가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된다면

왜 명상이 멈춰 있는듯 하면서도 더 빨리 가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빨리 가려고 행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먼 길을 돌아 갔다가

다시 그 먼 길을 돌아와야 하는 숙제만 안게 될 뿐이다.

 

명상은 우리들이 그동안 너무 먼 길을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지금 여기 이 자리에 멈춰 서서 그저 존재하고 그 자리에 있음을 자각함으로써

더 이상 아무 곳에도 갈 필요가 없고,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하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야 말로 우리가 꿈에서도 그리던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우리가 그렇게 행위를 통해 도착하려고 했던 근원적인 목적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상에 앞서서 우리는 누구나 歸依를 한다.

歸依란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행위함으로써 먼 길로 내달려 가기만 했고,

그래서 텅~빈 바탕 空間 根源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기만 하던 것을

이제 그 本來根源 자리로, 本鄕으로 되돌아가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참된 귀의의 방법,되돌아가는 방법,

그저 根源의 힘과 지혜와 사랑의 源泉으로 곧바로 뛰어드는 방법,

삶의 방식을 근원적으로 뒤바꾸는 방법,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그래서 명상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행위하지 말고 멈춰 서서 보라는 것이다.

 

‘행위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잘 해야 하고, 빨리 해야 하고, 빨리 해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상은 그 모든 하는 것을 내려 놓는 것이기에

사실 쉬워도 너무 쉽다.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하는 것을 멈춰 본 적도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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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3월 7일부터

명상수행 강의와 금강경 강의가 시작됩니다.

명상 수행은 온 몸으로 직접 실천해서 맛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머리로만 생각으로만 하는 명상은 명상이 아닙니다.

목탁소리 모든 법우님들이함께 집에서 생활 속에서

명상수행을 실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교아카데미의 명상강의를

될 수 있으면 글로써든, 강의로써든

함께 공유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공부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