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에 묻힌 친일파 묘비 문구에 경악.. 아이들의 분노
서부원 입력 2019.12.30 12:05[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역사 교사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2019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아이들과 관련 유적지를 무던히도 찾아다녔다. 한두 시간 거리인 개항장 군산과 목포의 근대문화유적을 비롯해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숱한 인물들의 자취를 찾아 1년 내내 주말을 반납하다시피 했다.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관심이 부족해서 그렇지 지역에도 기억하고 답사할 만한 곳이 적지 않다. 이곳 호남에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 백범 김구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지역민들조차 놀라워한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송재 서재필과 대종교의 창시자 홍암 나철, 임정 국무위원을 지낸 일강 김철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백용성 조사 등 호남 출신 독립운동가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런가 하면 반면교사 삼을 만한 인물도 있다.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탓에 당연히 만석꾼 지주가 많았고, 그들 중 다수는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기꺼이 친일의 대열에 섰다. 인촌 김성수와 수당 김연수 형제가 대표적이다. 그들의 땅을 밟지 않고는 호남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일제에 부역한 대가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영화를 누렸다. (관련 기사: "역사왜곡은 맞지만..." 친일파 생가 못 건드린다는 고창군 http://omn.kr/1m2xq)
비록 주어진 교육과정에 따라 진도에 연연해야 했지만, 내심 올해 한국사 수업은 '현실에 안주 말고 역사에 살라'는 글귀를 주제로 삼았다. 아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반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삶을 대조하고 성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계기수업은 물론 과제와 수행평가도 의도에 맞춰 재구성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 같은 공간에서 잠들다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주년 행사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이번엔 아이들과 조금 먼 길을 나섰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자발적 참가 신청을 받아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고등학교 1, 2학년 아이들과 함께 '백범 로드의 끝에서 만난 친일파들'이라는 주제로 충남 공주의 마곡사와 국립 대전 현충원을 찾았다. 고작 두 곳이지만, 광주에서 오가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다.
▲ 마곡사 백범당에서 함께한 고등학생들이 문화해설사로부터 백범 김구와 마곡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 서부원 |
알다시피 마곡사는 김구가 20대 청년 시절 신분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깎고 잠시 승려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가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듣고 일제를 향한 적개심으로 일본 군인을 처단한 후 잡혀 감옥에 갇힌 뒤 탈옥하여 삼남 지방을 떠돌던 시기다. 당시 김창수(김구의 본명)가 일제의 검거를 피해 숨어다닌 길을 '백범 로드'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마곡사에는 그의 호를 딴 백범당이 새뜻하게 복원되어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김구가 실제 머물던 곳으로 건물 벽에는 당시의 사진과 휘호 등이 걸려 있고, 곁에는 해방 직후 그가 이곳을 찾아와 심었다는 향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내로라는 사찰이지만, 백범당으로 인해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마곡사는 경유지일 뿐,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이다. 그곳에 가야 비로소 독립운동가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함께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국가 현충 시설인데도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김창룡을 비롯한 악질 친일파들이 수많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묻힌 자리 위에 군림하듯 장군 묘역에 잠들어 있다.
우선, 장군 묘역으로 가는 도중 대통령 묘역에 잠깐 들렀다. 위치상 현충원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바로 앞에 울창한 숲이 없다면 현충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다. 그곳엔 최규하 전 대통령 내외가 묻힌 큼지막한 합장묘만 덩그러니 조성되어 있다. 그 옆으로 넓은 묫자리가 빈터로 남아있는데, 앞으로 세상을 떠날 대통령이 묻힐 곳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잠들어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유해는 국립 서울 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이후 세상을 떠난 대통령이 없기에 꽤 오랫동안 빈터로 남을 듯하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미 대통령 예우를 박탈당했고, 이명박과 박근혜 역시 구속되어 죗값을 치르고 있으니 현충원에 안장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이들은 최규하라는 이름을 낯설어했다. 대개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제19대 문재인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을 순서대로 잘 알고 있지만, 최규하는 십중팔구 빠뜨리고 만다. 사실상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축출된 대통령이라고 설명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은 워낙 존재감이 없는 분이라 왕따당하듯 홀로 여기에 묻혀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대통령 묘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에 문제의 장군 묘역이 있다. 주차장에서 중앙 계단을 따라 올려다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권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피라미드를 살짝 눕혀놓은 듯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여기엔 6.25 전쟁 이후 순직한 육해공군 출신 장성들의 묘가 계급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에 친일파의 무덤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끼어있다.
▲ 김창룡 무덤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있는 아이 백범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되는 악질 친일파 김창룡의 무덤이 국립 대전 현충원 장군 묘역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 서부원 |
이곳에 묻힌 친일파의 대표 격인 김창룡의 무덤 앞에 아이들과 함께 섰다. 곁에 세워진 묘비의 내용만 보면, 존경할 만한 순국선열이요 호국영령이다. 김창룡의 묘비명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친일 사학자 이병도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이들은 미리 조사해온 자료를 읽으며 그의 친일 행적에 분노했고, 그런 자를 현충원에 안장한 이들의 생각 없음을 질타했다.
서른여섯의 나이에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를, 아이들은 천벌을 받은 것이라 표현했다. 그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아직 죗값을 다 치르진 않았다고 말했다. 이미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마당에 그의 극악무도한 친일 행위에 대해 모든 이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묘비 옆에 그가 악질 친일파였음을 알리는 별도의 팻말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즉석에서 아이들에게 과제를 내주었다. 이곳 장군 묘역에 숨어있는 친일파의 무덤을 찾아 인증 샷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친일파의 기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로 한정했고, 묘비의 앞뒷면에 적힌 글귀도 꼼꼼하게 읽을 것을 주문했다. 스마트폰을 몸의 일부처럼 여기고 다루는 아이들에게 친일파 무덤 찾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묘비에는 죄다 6.25 전쟁의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더군요. 그 어디에도 친일 행적은 적혀있지 않았어요. 어디선가 읽었는데, 6.25 전쟁을 왜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 친일파 김석범의 묘 김석범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간도 특설대에 복무했고, 만주국 창춘 보안사령부의 사령관까지 역임한 악질 친일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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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백홍석의 묘 백홍석은 일본군에 배속되어 중좌의 직위까지 오른 친일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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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여 분만에 아이들 모두 과제를 완수했다. 스마트폰으로 무덤마다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일파의 무덤을 속속 카메라에 담았다. 한 아이는 이곳에 묻힌 친일파 김창룡, 김석범, 신현준, 송석하, 백홍석 등을 을사오적에 빗대 '현충원 5적'이라고 부르며,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겠노라 다짐하기도 했다.
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탓하다
친일파들이 묻힌 국립 대전 현충원도 넓게 보면 '백범 로드'에 포함할 수 있다. 왜냐면 김구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 함께 잠들어 있어서다. 바로 김구의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와 큰아들인 김인 열사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 묻힌 김구의 유해가 이곳에 이장된다면, 국립 대전 현충원은 3대가 함께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
두 분의 묘소 앞에서 아이들끼리 논쟁이 붙었다. 친일파 무덤 옆에 별도의 팻말을 세우자는 기존의 주장과 친일파 무덤을 파묘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충돌했다. 곧장 파묘해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은 김구 암살의 배후인 김창룡과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곳에 묻혀있다는 게 당최 사리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탓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함께 묻힌 곳이라면, 국립 현충원이라는 위상과 권위가 실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생존해 계신 독립운동가 중에는 죽어서 현충원으로 가기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분노한 아이들도 국립 현충원이라는 이름이 아깝다며 혀를 끌끌 찼다.
광주로 돌아오는 길, 열심히 과제를 수행하고 즉석 토론을 벌인 아이들에게 미리 준비해 간 선물을 건넸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가 저문다고 해도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다짐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문하며, 정운현 선생이 쓴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를 선물했다. 비록 분량이 만만치 않지만, 함께한 아이들은 분명히 완독해낼 것이라 확신한다.
아이들로부터 희망을 발견한 한 해였으니, 역사 교사로서 저물어 가는 2019년이 조금도 아쉽지 않다. 낼모레면 2020년 경자년 새해다. 새해는 무엇을 주제 삼아 아이들과 만날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본다. 순간 괜찮은 주제 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내년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아울러 친일 행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00살이 된다. 2020년 새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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