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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相 ; 모양)을 취하지 말라 - 달마 혈맥론

장백산-1 2024. 8. 7. 15:08

상(相 ; 모양)을 취하지 말라 - 달마 혈맥론


『금강경』에서 ‘무릇 모습 있는 것은 전부 실체가 없어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고 하였다. 만약 모습을 취한다면 곧 마구니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사도(邪道)에 떨어진다. 모양 있는 모든 은 전부 실체가 없어 허망하니 단지 모습을 취하지만 말라. 만약 부처라는 견해, 법이라는 견해, 부처라는 모습, 보살이라는 모습을 내어 그같은 견해 모양을 공경하고 귀중히 여긴다면 스스로 중생의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진실로 부처 법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은 없다.

 ✔ 진리, 부처, 법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어떤 모습, 어떤 상(相)도 취하지 말라.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모양이 있는 것은 전부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본다고 했다. 그 어떤 상이나, 견해라도 취하고 집착하면 중생의 지위로 떨어진다.

상(相)은 모양, 모습인데,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려면 이것은 이것의 모양이, 저것은 저것대로의 모양이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그 두 가지를 나누어 구분해 주는 서로 다른 모양을 상(相)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분별심만 타파하면 곧바로 부처라고 한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는 부처이지만 분별심으로 인해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분별된 대상만을 헛되게 인식한다고 한다.

분별심(分別心)이란, 둘로 분별하고 나누어 대상을 아는 마음이다.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는 아는 마음이다. 크고 작다고 인식하고, 잘났거나 못났다고 인식하고, 나와 너를 둘로 나누어 인식하고,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인식한다. 둘로 분별하고 나누어야지만 그 두 대상이 서로 구별되어 우리의 마음속에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모든 생각, 인식은 전부 다 둘로 나누어 아는 마음 분별심이다.

분별심이 생기는 이유는 곧 세상 모든 것들은 모양, 모습, 상(相)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모양, 서로 다른 상이 있으니, 서로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을, 분별하게 해 주는 모양이라고 하여 분별상(分別相)이라고도 부른다.

상에는 물질적인 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상, 즉 마음속에 그려진 이미지 같은 상도 있다. 사랑과 미움은 하나의 마음 속 개념이지만, 이 또한 상이며, 분별된 모습이다. 예쁘다, 잘생겼다는 것도 내 마음속에 내 나름의 틀을 세우고, 스스로 분별하는 하나의 개념이고, 분별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예쁘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에게 다른 상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속에 세워진 하나의 개념 또한 상이며, 모든 상은 이와 같이 고정된 실체인 것이 아니기에, 저마다 마음속에 새겨둔 상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키가 170인 사람을 ‘크다’는 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작다’고 받아들인다. 어떤 특정한 연예인을 어떤 사람은 잘생겼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못생겼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저마다 분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분별상은 전부 다 이와 같이 정해진 실체가 아닌, 자기 안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개념이기에 허망하다.

내가 연봉을 5,000만원을 받는다는 것이 많이 받는 것인지 적게 받는 것인지, 그로인해 내가 행복한지 불행한지는 정해진 실체일까? 그 5,000만원 연봉이라는 상(相)은 허망하여 실체가 아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진실도 없다. 내가 인식하는 대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5,000만원을 많다고 인식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작다고 인식한다. 많다고 인식하면서 풍요를 느끼고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고, 작다고 느끼면서 비참해하고 궁핍해하면서 불행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진실할까?

5,000만원이라는 연봉 자체에는 많거나 작다는 그 어떤 실체가 없다. 허망하다. 진실이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 좋거나 나쁘다고, 많거나 적다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 중립적인 현실에 자기 식대로 분별하여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면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중생의 괴로움이다.

만약 애초부터 그 5,000만원에는 그 어떤 실체도 없고 진실도 없어서, 분별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그로인해 괴로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5,000만원 연봉을 받는 사람이 한 명은 너무 많다며 행복해하고, 또 한 명은 적다고 불행해한다면 그것은 5,000만원에는 정해진 많거나 적음, 부자이거나 가난,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별된 상으로 나눠진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분별상을 진짜라고 여기며 집착한다. 그 분별상은 진짜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에서 인식되고 분별된 것을 진실이라고 여긴다. 모든 대상을 좋다거나 싫다, 크다거나 작다, 마음에 든다거나 안 든다, 옳다거나 그르다 등으로 나눈 뒤에, 좋은 것은 취하려고 하고 집착하고, 싫은 것은 버리려고 하며 거부한다.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을 때도 괴롭고, 싫어서 버리려고 하는 것이 자꾸만 내게 나타나도 괴롭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도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할 때도 괴롭지 않은가? 이처럼 둘로 나누는 분별심을 일으키면 취하거나 버리고자 하는 취사간택심이 생긴다. 분별심은 곧 취사심이 되고, 취사심은 곧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분별심이 곧 괴로움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 분별심은 중생 스스로가 만든 상일 뿐, 진짜가 아니다. 그래서 진짜가 아닌 허망한 분별상에 집착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분별하지 않고, 분별상에 집착하지 않으며,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삶의 모든 괴로움은 사라진다. 이처럼 상에 치우치지 않고, 특별한 분별상에 얽매여 판단분별, 취사간택(取捨揀澤)하지 않는다면 삶에는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없다.

중생은 모든 현상에 이처럼 분별상을 세워서, 좋거니 실커니 하면서 취사간택하고, 그로인해 괴로워하지만, 부처의 지혜를 지닌 사람은 일체의 현상에 그 어떤 상도 세우지 않고, 세운  그 상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아무런 괴로움도 없다.

진실을 알고자 한다면, 다만 어떤 모습도 취하지 않으면 될 뿐, 달리 할 말이 없다.


글쓴이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