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두려워서 행동 하는가 사랑해서 행동 하는가

장백산-1 2024. 9. 14. 22:34

두려워서 행동 하는가 사랑해서 행동 하는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할 때 행돌을 하는 근원을 면밀히 살펴보면 ‘두려움 때문에 하는 행동’이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 대부분이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행동 안 하면 나중에 불편하니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니까 하는 것이다. 돈을 번다는 행위 또한 그 이면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남들 다 돈을 버니까, 나만 돈을 안 벌면 뒤쳐질 수 있으니까, 가난해질 수 있으니까 두려워서 돈을 버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대인관계를 넓히는 것도 대부분 두렵기 때문에 한다.

그런데 ‘누구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면 이 생각은 사랑과 자비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내 근원에 있는 본질적인 불성(佛性), 신성(神性)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이다. 둘이 아닌 무한한 자비로움이 우리의 근원이고 그곳에서 나온 생각과 행동이남을  ‘도와주어야 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는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이기에 돕는다는 생각도 없이 저절로 돕게 되어 있다. 입이 심심할 때 끊임없이 손은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지만 손이 입에게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온 우주와 일체 모든 존재는 근원에서 둘이 아닌 존재 즉 불이법이기에, 우리의 가장 근원에서는 늘 자연스럽게 돕는다. 도우면서도 돕는다는 생각이 없이 돕는다. 돕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돕는 행위가 너무나도 당연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 근원에서 나온 돕겠다는 진리의 생각이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이걸 나누어 주고 나면 나는 뭐 먹고 살지?’ 하는 분별을 하는 생각이 생긴다. 너와 나가 둘로 나뉠 때 두려움도 함께 생겨난다. 지혜를 깨닫지 못할 때는 이처럼 언제나 두려움은 함께 한다.

똑같은 행동도 때에 따라서 두려워서 하는 행동이 있고 사랑해서 하는 행동이 있다. 부모님께 자주 찾아가고 효도하는 것은 어떨까? 대부분은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효도를 하고 자주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다. 그 모든 행동의 동기는 사랑과 자비에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랑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로 부터 불효자라는 말 들을까봐 또는 너무 오래 안 찾아뵈었더니 왠지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심지어 훗날 재산을 못 받게 될까봐 찾아뵙기도 한다.

누군가를 돕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진정 그를 사랑해서 돕기도 하지만, 돕지 않으면 위치상 왠지 욕 얻어먹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돕기도 한다. 절에 가고 교회에 가는 것은 어떨까? 더 많은 사랑을 배우게 되고, 지혜와 자비가 가득한 곳이기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옥에 갈까봐, 부처님이나 하느님께서 나를 미워할까봐, 심지어는 남들 다 하는 종교생활을 나만 안 하면 뒤처지거나 왕따가 될까봐 두려워서 가기도 한다.

모든 행동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불교의 업사상 또한 같은 행위를 했더라도 어떤 의도로 했느냐에 따라 선의 과보를 받을지 악의 과보를 받을지가 결정된다. 거짓말 한 행동은 나쁘지만, 그 의도가 좋았다면 오히려 선업을 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행동 뒤에 있는 의도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사랑인가’ 그것이 중요하다. 나의 행동은 두려움에 입각한 것이 많은지, 진심 사랑인지 살펴보라. 내가 얼마나 지혜롭고, 영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