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온은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실체적인 것일까?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표상, 개념화의 정신작용은 과거 기억된 정보의 데이터베이스를 비교, 추리, 총괄함으로써 드러내고 나타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내 안에 ‘생각하는 나’, ‘사유하는 나’, ‘지각하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눈앞의 대상을 보면 언제나 ‘이것은 국화꽃이고, 저것은 소나무고, 저것은 자동차고, 이 사람은 아무개다’라고 표상지어 알기 때문에 내 안에 그러한 표상작용, 개념작용, 지각작용이 고정되게 실존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다만 내가 어릴 때 ‘소나무’라고 배웠고, ‘스님’이라고 이름을 붙여 기억했을 뿐이기에 그렇게 소나무 스님이라는 이름으로 임시로 저장된 정보일 뿐이다. 내가 만약 미국인이라면 그 소나무를 ‘Pine’이라고, 스님을 ‘Buddhist monk’라는 표상으로 기억했을 것이다. 또한 스님이라는 이름에 따른 이미지도 사람마다, 나라마다 다 다를 것이다.
기복불교만 접해본 사람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라고 이해할 것이고, 명상하는 스님을 주로 생각하는 외국인이라면 명상하는 구도자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처럼 표상작용이란 저마다 다르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내 안에 상온이라는 사유와 생각하는 정신작용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처럼, 우리는 내 바깥 세계에도 실질적인 생각의 대상, 표상의 대상, 사유의 대상들이 실존한다고 여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실은 바깥 세계에 그런 언어적 개념을 가진 사유의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사유의 대상도 마찬가지다. 선과 악, 정의와 사랑, 길고 짧은 것, 굵고 가는 것, 아름답고 추한 것 등이 실재로써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그런 것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낸 개념적 가설일 뿐, 실체적으로 고정되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상온을 통해 사유와 생각, 나아가 사상과 이념과 철학 등을 만들어내고,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이념과 사상 등이 실체적 진실이라고 여기며, 사로잡히고 집착함으로써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다투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상온무아(想蘊無我)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러한 사유와 생각, 사상과 이념 등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다.
상온이 무아임을 안다면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인 갈등이 해소되고, 대립을 넘어 화합과 조화로써 서로가 서로를 수용하고 용납하며 활짝 열린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와 대적정의 무쟁(無爭) 사회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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