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眞實로 마음밖엔 한 法도 없다.

장백산-1 2015. 7. 26. 20:26

 

 

 

< 질문 >
망상이 많이 끼어 들어 너무 힘듭니다. 그것을 잠재우려니 더욱 힘들어집니다.

< 답변 >
눈 앞엔 本來 한 法도 없소.· · ·견문(見聞)에 즉(卽)해서 見聞이 아니오.
 
보는 게 보는 것인 채로 보는 게 아니고, 듣는 게 듣는 것인 채로 듣는 게 아니란 말이오.

이 말이 理解가 잘 안 되면 꿈을 生覺해봐요. 꿈속에서 내내 보고 듣고 해도 꿈을 깨고나면

實際로는 보고 듣고 한 일이 전혀 없죠? 꿈 속 일 全部가 마음이 제가 지어놓고 제가 보는 거지 않소?

그렇다면 마음이 마음을 본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오. 보는 게, 보는 게 아니란 말은 自己가 自己를

볼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런데 사람들은 말로만 이 世上 全部가 마음뿐이라고 하고는, 하나같이 마음

바깥에 무엇이 있다고 그러고 있는 것 아니오. 마음 바깥에서 뭔가를 보면 그런 사람은 凡夫고, 외도

(外道)요.

 

눈은 어머니 배밖에 나오면서부터 빛깔만 봤고, 귀는 어머니 배밖에 나오면서부터 소리만 들었으니,· · ·
그러니 모두 청맹과니요, 귀머거리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소? 아침에 눈떠서 저녁에 잠잘 때까지 전

일상을 통해서,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體驗되어진 모든 것이 體驗한 것이 아니오.

이렇게 말은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者가 없고, 거기서 들었는데 들은 者가 없는 게 眞實이오.· · ·

이 世上은 끝끝내 적멸(寂滅)하오. 究竟에 다가갈수록 괜히 이런 소리, 저런 소리 군말 붙일 餘地가

조금도 없소. 그렇기에 뭔가를 알았다는 사람도 精神 나간 사람이고, 아직 모르겠다는 사람도 제

精神이 아니오. 여러분 마음 가운데의 神靈한 性稟은 무엇을 알고 모르는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소.
그것이 眞理요, 그것이 도(道)고.· · ·

 

* * *

< 질문 >
믿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 답변 >
믿으면 바보고, 믿지 않으면 멍청이요. 天地가 온통 마음뿐이어서 마음바깥에는 티끌 만한 한 法도 없소.
마음이 그대로 法이오. 그 마음으로 하여금 그 어떤 法을 理解하고 받들어 모시고, 또 자기가 이해한 바

대로 그 法을 따라 봉행(奉行)하고 하는 모든 行爲는 포승줄도 없이 스스로 그 法에 묶이는 것과 마찬가

지요.

 

믿고, 안 믿고 하는 따위의 말은 信仰的인 過程에서 나오는 소리요.···

眞理, 깨달음은 여러분이 믿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 世上 어느 것도 眞理, 깨달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오.··· 이렇게 말해도 眞理에 대해 변죽만을 울리는 것뿐이지, 眞理 그 自體는 人間의 言說로 더듬

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이오. 부처님이 얻은 지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요.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머리를 굴려 理解도 하고 알아낼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이오.

 

그러니 佛法, 眞理, 깨달음이니 하는 말은 우리가 世俗의 智慧를 가지고 더듬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 '佛法이란  '眞理란 이런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佛法도 眞理도 아무것도 아니오. 헛소일 뿐리요.

아무리 높고 精巧하고 貴한 理致를 알아냈다 해도 물 속 달 그림자를 건진 것과 다르지 않소. 그러니 믿는

자도, 안 믿는 자도 究竟에 相應하긴 틀린 것이오. 믿어도, 안 믿어도 門밖의 소식입니다.

이쪽 저쪽 分離, 分別하는 짓을 빨리 그만두세요. 영산 회상에서 受記를 받는 것은
여러분이 믿고 안 믿고, 깨닫고 깨닫지 못하고 하는 따위와도 전혀 相關없는 짓이오.
이 世上 모든 것이 다 꿈이오. 그 꿈이 始作된 곳으로 돌아가세요.

 

* * *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뒷말이 끊어지지 않는 걸 보면,
이 말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군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一切 存在는 有情 無情을 막론하고

다 실체성(實體性)이 없어서 <이것>이라고 지칭(指稱)할만한 固定된 實體가 없다 는 뜻입니다.

 

따라서 衆生은 '제 성품'(自性)이 없어서 생사(生死) 조차 없고,
부처(佛) 역시 性稟이 없어서 보리(菩提)도 열반(涅槃)도 없는 게 眞實입니다.

따라서 <생사의 바다>를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도 初心者를 위한 어쩔 수 없는

方便說임을 알아야 하며, 이 境地에 이르면 <배우고 닦는다>(習學)는 말도 생사법(生死法)이요,
인과법(因果法), 수보법(受報法)의 범주를 벗어나는 게 아니니, 어찌 이를 참다운 修行이라 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一乘法은 初發心에 몰록 불과(佛果)를 얻는 것이며, 결코 구경각(究竟覺)을 證得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심(初心)과 도중 (途中)과 구경(究竟)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고인은 이르기를, 「있는 그대로이면 빠르거니와 造作하면 더디다」고 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마음'을 밝힐지언정 헛되이 마음 밖에서 '法'을 求하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는 일이 있어선

아니 됩니다.

 

* * *

一乘法이건 아니건 불문하고, 구경각(究竟覺)은 學人에 依해 證得되는 게 결코 아닙니다.
바꿔 말해서 證得되는 것은, 卽 깨달은 바가 있고 얻은 바가 있는 것은 이미 벌써 分離 分別하는
이분법적인 분병의식이기 때문에 <참된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름대로 修行을 하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것>이 아니라, 평소에 머리 속에서 갈구하던 이상(理想)의 境地가 헐떡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어느 한 瞬間 화현(化現)한 망정(妄情)에 지나지 않음을 믿으세요.

또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는 一切의 有爲의 努力이 미치지 못한다는 事實을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眞理는 '마음'으로 깨달을 수도 없고, 몸으로도 行할 수 없다는 事實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몸도 마음도, 나아가서 이 世界도 몽땅 빙소와해(氷消瓦解)하여, 天地間에 안팎으로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이 되어야 비로소 구경(究竟)에 상응(相應)할 수 있는 조그만 可能性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 3,000 배건 10,000 배건 그것은 凡夫나 外道들이 有爲의 功德을 바라고 하는 妄靈된 行爲에

불과할 뿐이니, 도무지 固定不變하는 獨立的인 實體가 없는 허깨비 같은 이 몸과 마음을 까닭 없이

수고롭게 한다고 해서 무슨 所用이 있겠어요?

 

깨달음이니, 解脫이니, 涅槃이니, 成佛이니, 眞理니 하는 一切의 生覺, 槪念, 觀念을 다 내려놓고,
내려놓았다는 生覺마저 없어져서, 이렇게 문득 <생각 없는 무심정>(無思無心定)에 들 수 있으면

道를 깨치기가 빠르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고, 유심(有心)으로 道를 求한다면 그야말로 당나귀

해가 되어도 깨칠 분수가 없습니다.


* * *

萬法은 연생(緣生)이요, 緣生하는 모든 法, 것, 存在, 現象은 本來가 무생(無生)이라,
<性稟도 없고>(無性) , <모양도 없고>(無相), <작용도 없음>(無作)의 萬法을 사람들로 하여금 理解하게

하고 믿어들게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모름지기 연기설(緣起說)의 秘密한 뜻을 철저히 구명

(究明)하여 萬法이 性稟 없고, 모양 없고, 作用 없고, 느낌 없고, 흔적 없고, 始終 없음을 끝까지 사무쳐서
지금의 이 세간상(世間相)이 있는 그대로 眞理, 깨달음, 本來面目으로서 상주(常住)함을 밝혀야 합니다.

 

고불(古佛)의 法이 本來 일승법(一乘法)인데, 상(相)에 헷갈린 凡夫의 정견(情見)이 諸 各各이므로 여러

승(乘)으로 나누인 거예요. 마치 사람이 손가락으로 虛空에다가 숱한 금을 그어, 수많은 區分을 지었다가,
이제 다시 손바닥으로 虛空에 그은 금(線)을 지워 없애려 하는데, 虛空이야 어찌 일찍이 劃을 받아들인

적이 있었겠어요?  이 理致를 알면 現行하는 一切의 時間 空間的인 差別相은 모두가 <참된 하나>를

여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며,

따라서 有情 無情 間에 一切萬法의 구경운재(究竟運載)는 오직 <하나> 뿐이요, 이 구경에 이르면 끝내는

그 <하나>조차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일승법(一乘法)에선 하나를 얻으면 一切를 얻는 것이요,
始作과 끝이 서로 거둬서 인과(因果)가 同時라서, 결코 앞뒤가 分離되어 떨어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초발심(初發心)에 문득 불과(佛果)를 얻어서, 다시는 더 修證하는 일이 없음이 정법안장(正法眼藏)

이니, 結局 因果 아닌 因果가 佛果인 겁니다.

 

그러므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을 기하는 구도자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이 일에 다가선다면
더욱 난행(難行)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몇 아승지겁을 지나도 相應할 분수가 없다고 말하는 根據예요.

그러므로 經에 이르기를,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佛性)의 상낙아정(常樂我淨)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에 依持하여 믿음을 내고, 모름지기 <견문(見聞)의 作用>을 짓는 일을 당장 그만둘 수만 있으면,
머지 않아서 진불(眞佛)이 如如함을 보게 될 것입니다.

 

* * *

이 世上 모든 것들이 꿈인 줄 알았으면 그것이 이미 生과 死를 여읜 건데, 무슨 사설이 그리도 많아요?

지금 있는 이대로의 日常이 모두 꿈과 같아서 實답지 않다는 事實이 밝혀졌으면, 日常生活에 휘둘리건

휘둘리지 않건 또 自在하건 自在하지 못하건 무슨 相關이에요!!!

 

요지는, 연생(緣生)하는 萬法이 自體의 性稟이 없어서, 안으로는 <나>도 없고 밖으로는 相對할 티끌

만한 한 法도 없는 게 제법실상(諸法實相)입니다. 緣起的인 條件, 因緣의 가화합(假和合)으로 나타나

있는 이 <나>와, 역시 因緣의 和合, 假合物로 나타나 있는 모든 세간상(世間相)이 自體性이 없어서
꿈 같고 환(幻) 같은 것임에도, 迷惑한 衆生이 이 世上 모든 것을 실유(實有)로 잘못 알고 執着하기

때문에, 이 미집(迷執)을 떼 주기 위해서 이 世上 모든 것이 꿈과 같고 幻과 같음을 밝혀 世上에 대한

執着을 여의게끔 하는 것이 마음工夫의 요체인 겁니다.

 

모두들 現實라는 꿈 속에 모든 게 있다고들 하지만, 깨고 나면, 곧 本來性稟을 보고 나면,
비록 눈 앞에 하늘과 山河大地가 또렷또렷해도 티끌 만한 한 法도 볼 것이 없는 게 眞實인 겁니다.

볼만한 對相, 境界가 없으면 마음이 없고, 마음이 없으면 一切의 理致와 道理가 붙을 데가 없어서,
世間相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상주(常住)하니, 이것이 바로 정법안장(正法眼藏)이 열리는 겁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여몽삼매(如夢三昧) 하나 만으로 구경(究竟)할 수 있다」고 했으니,
헛되이 견문각지(見聞覺知)를 精神 없이 좇으면서 分別을 일삼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이

오래도록 無心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머지 않아 如如한 本體가 우뚝 드러남을 알게 될 것입니다.


* * *

虛妄한 꿈속에서 모두들 이 世上이 <있다>고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곧 本來性稟을 깨치고 나면 온갖

것은 티끌 만한 한 法도 볼 것이 없는 겁니다. 꿈속의 모든 것은 분명히 마음의 변현(變現)임이 분명한데,
꿈꾸는 동안엔 이 모두가 마음 바깥에 있는 實體로 보여서, 이에 현혹되어 分別하고 執着하면서 야단법석

을 떠는 게 아니겠어요?

 

이제 萬法이 인연생기(因緣生起)하기 때문에 自體의 性稟이 없음을 밝히면,
안으로는 <나>도 없고, 밖으론 티끌 하나 상대할 것이 없는 게 실상(實相)인데,

그러므로 보고 듣고하는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제 마음을 보는 것인데,
迷惑한 衆生이 늘 面前에서 <다른 것>을 分別하고 執着하는 게 바로 無明이니다.
마음이 제 마음을 보는 걸 어떻게 본다고 하겠어요?

 

따라서 지금 여기 現實에서 보고 듣고 하는 對相 境界는 모두가 꿈속에서의 그것과 같아서

전혀 실다움이 없는 꿈, 환상, 신기루,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結局 '깨달음'이란, 심성(心性)이 生覺을 여의는 것이지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게 아닌데,

다시 말해서, 각자에게 本來 具足히 갖춰져 있는 <神靈한 깨달음의 性稟>(靈覺性)을 確認하는 것인데,
迷惑한 者들이 <미혹한 마음>을 消滅하고 별도의 <깨달음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써 '깨달음'인 줄 알고

공연히 헛애를 쓰고 있는 셈이에요.

 

이 영각성(靈覺性)을 저쪽에서는 '부처'라 하고, 이쪽에선 '깨달음'이라 하는데, 靈覺性이 곧 '마음(心)'이요,

도(道)요, 法이요, 眞理요, 선(禪)이라는 명칭으로, 달리 구하고 얻고 할 게 없는 겁니다.

지금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며, 눈을 찡그리고, 시비를 벌리고 갈등하는 등의 이 모두가 바로 당신, 곧 

<神靈한 깨달음의 性稟>이니, 衆生들이 이 天眞한 영성(靈性)인 自己自身을 등지고는 바깥으로 妄靈되이

境界를 分別하고 執着하는 虛妄한 意識의 놀음을 내 마음인 줄 알고, 無始이래로 이 도적을 아들인 줄 알고

고이고 섬기고 했으니, 범부 살이가 어찌 온전하길 바라겠어요?

 

그러므로 곧장 영통(靈通)하길 바라거든 다만 밖으로 온갖 虛妄한 모습(相)을 取하지만 않는다면
바로 究竟에 相應하리니, 달리 妙한 道理가 있는 게 아닙니다. 더욱 정진하세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 *

이 몸도 마음도 이 世界도, 나아가서 저 虛空까지도 몽땅 내 마음 거울에 비춰진 業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잘 모르겠거든 꿈을 떠올려보세요. 꿈속에 나타난 모든 것은 죄다 마음의 변현(變現)일 뿐, 다른 것이라곤

도무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꿈속에서 사람들은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줄 알고 야단들이거든요.
그러다가 꿈에서 깨고 나면, 곧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고 나면, 실로 티끌 만한 한 法도 볼 게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에 現前하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다만 지금까지는 그것들이 꿈인 줄 알지 못해서 그것들에 執着했지만, 이제 그것들이 다 마음 거울에 비친

業의 그림자일 뿐임을 똑똑히 알았으니,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그것들을 實際인 줄 잘못 알고

지내왔던 뒤끝이라, 왕왕 제 버릇이 되살아나긴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좋건 싫건 모두 꿈속의 일이라면 그치고, 회피하고, 혹은 찍어눌러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등의 一切의 人爲的인 造作이 다 쓸데없는 일이니, 왜냐하면 그 모두가 꿈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인은 이르기를, 「여몽삼매(如夢三昧) 여환삼매(如幻三昧) 만으로 구경(究竟)에 상응할 수

있다」고 했으니, 더욱 찬찬히 <깨달아 살필>(覺察) 일입니다.

 

* * *

佛法에 因緣이 많은 것 같군요. 여기 저기서 설법도 많이 들었고, 이런 저런 책들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그래서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알아들은 바 內容을 철저히 사무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말이나 문자의

변두리를 겉돌기만 하는 겁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이 세상은 몽땅 꿈과 같고 환과 같으니라」 하는 말은 아마도 佛子 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그런데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철저하게 究明하는 사람은 참 만나기 어렵거든요. 경에 이르기를,
「환(幻)인 줄 알면 그것이 여읜 것이니, 따로 方便을 必要로하지 않느니라」 한 말은
곧장 性稟을 밝혀서 成佛하길 기대하는 납자(衲子)에게 있어선 대단히 중요한 말인데,
대개의 수행자는 이 말을 그저 대수롭잖게 지나쳐 버리고 헛고생만 하니, 참 딱한 일입니다.

 

生覺 좀 해 보세요. 이 世上의 모든 것의 本質이 꿈이고 幻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이고

허깨비라면 따로 배워 얻을 것은 뭐겠으며, 털어 버려야 할 煩惱妄想는 뭐겠어요?
이 世上 그 모든 것이 다 지금 <있는 그대로> 空寂해서 없는 거와 같은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옛 어른들도 이르기를, 「여환삼매(如幻三昧) 하나만으로 구경(究竟)에 이를 수 있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오랜 꿈에서 깨고 보니, 이 몸도 마음도 이 世界도, 나아가서 저 虛空까지도
몽땅 꿈속에서 <마음의 변현(變現)으로> 衆生의 마음 속에 나타난 <業의 그림자>(業影)일 뿐임이

밝혀졌으니, 이와 같은 事實을 分明히 밝힌 納子라면,일시(一時)에 모든 것을 다 놔버리고 쇄쇄낙락

(灑灑落落)해도 무방하지 않겠어요?

 

모든 경론(經論)의 말씀은 한결 같이 그저 「마음을 밝히고 性稟을 봐서 成佛하라」고 한 말로 요약

됩니다. 그러니 面前에 展開되는 一切의 현전상(現前相)이 다 꿈이요, 幻, 그림자, 물거품인 줄 알아서
一切의 現前相에 虛妄하게 執着해서 그 執着心에 의해 어리석게 휘둘리고 끄달리지만 않는다면,
本來性稟은 스스로 밝아질 것이니, 달리 또 딴 道理가 있는 게 아닌 겁니다.

 

* * *

우선 마음공부라는 게, 이 세상에서 보통 하는 말대로라면, ― 열심히 갈고 닦아서 보다 훌륭한 究竟의

目標에 到達하고자 하는 努力을 말하는 것일 텐데 ― 그런데, 불법 공부, 眞理探究는 그런 게 아니에요.

眞理란 말 그대로 참되고 變함이 없어서 <참된 理致>가 아니겠어요? 따라서 前에는 몰랐다가 參究를

통해서 지금에야 알아냈다면, 그것은 분명히 <몰랐다> <알았다>가 엇바뀌면서 껌벅껌벅 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을 眞理라고 할 수 있겠어요?

 

요컨대, 眞理는 지금 있는 것을 바꾸고 난 다음에야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겁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만약 그것이 참된 깨달음이라면 前엔 몰랐다가 지금에야 깨닫는,
그런 게 아니라는 事實을 分明히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게 아니고, 各者에게 本來 具足하게 갖춰져 있는 영각성

(靈覺性)을 確認해서 밝혀내는 것을 일러서 <깨달았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眞正한 깨달음은
<깨달은 것>도 없고, <알아낸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는, ― 本來 저마다 具足히 갖추고 있으면서도,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이른 바 <값을 매길 수 없는 집안의 보배(無價寶)>를 밝혀내서, 되찾아 가지고

마음껏 쓰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중생이 지금껏 순간순간 쓰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임으로, 알려면 지금 당장

알아차릴 일이요, 고개만 까딱해도 벌써 천리만리만큼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공부하면 됩니까?」 하는 따위의 물음은 전혀 잘못된 질문입니다.

 

* * ** * *

진리(眞理)를 탐구한다 함, 곧 佛法을 工夫한다는 것은 이 몸과 마음으로 모종의 편의(便宜)함을 얻기

위함이 아니고, 다만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世上事의 實相을 밝혀냄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그 숱한 규범(規範) 이나 갈등(葛藤)의 本質이 무엇인지를 알아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상정(常情常識)의 완고한 틀이나, 자기중심적인 모든 희구(希求)하는 바 사정(私情)이
마음공부에 끼여들 여지는 애초부터 없는 겁니다. 만약 이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여러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애쓴다던가, 또는 개인적인 바람을 이루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라면, 이야말로  俗流를 헤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각설(却說)하고, ··· 따라서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우선 모름지기 이 <나>라는 存在의 根本을 밝혀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저 바깥의 <다른 것>을 살피는데는 모두가 이골이 난 처지지만, 막상 이 <나>를

깨달아 살피는 일은 어려운 일 중에도 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이 대목에 이르러선 어리둥절합니다.
― 손을 쓸 수 없다니 ― 그게 뭘까? ··· 쉽게 생각하세요. 눈으로는 눈을 보지 못하고,
그 손가락으로는 그 손가락을 만질 수 없듯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알아내는 일>은 우리들이 마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여기고 있는 이 知覺作用으로는 不可能하기 때문입니다.

(中略), ···

 

성교(聖敎)의 요체는 바로 이 ≪지각활동(知覺活動)의 性稟인 <나>≫에게로 돌아가는 게 全部예요.
따라서 지각(知覺)을 통해서는 <나>를 알아낼 길이 없고, 오직 意識으로 헤아리고 더듬고 하는

一切의 천착(穿鑿)이 그쳤을 때에만 이 神靈한 <참 나>는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神靈한 참나, 여기에는 一切의 理致나 道理도 결코 미치지 못하는, 말 그대로 眞佛이 如如한 境地요,

天聖人의 歸依處인 겁니다.

 

말로는 이 肉身을 환화공신(幻化空身), 假有如幻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虛妄한 몸과 妄靈된 情識(生覺, 마음, 意識, 느낌, 感情, 欲求, 欲望, 意志, 意圖)를 붙잡아서

<나>로 삼고는, 이를 고이고 받들기 위해서 쉴 날이 없으니 어느 세월에 究竟에 相應하겠어요?
헛되이 가려운 데를 긁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문득 생각 망상 번뇌 느낌 감정 욕망 의도등을 푹쉬세요.
쉬는 것은 지금 당장 쉬는 게 좋아요. 애쓰면 애쓸수록 길은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니, 모름지기 一心으로

精進하세요. 究竟에는 그 一心마져도 놔버려야하지만~~~

 

* * *

事實이 마음 뿐이요, 眞實로 마음밖엔 한 法도 없습니다.
<지켜보는 마음>이 있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할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마음의 흐름을 잘 깨달아 살펴서, 이 世上 모든 것들이 마음의 虛妄한 境界를 따라서 흐르는,
마음에 投影된 自己 業의 그림자일 뿐임을 깨달아서 더는 世上에 속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금새 <本來 하나인 마음>을 <보는 자>와 <보이는 자>로 갈라놓고는, 마치 관찰자가 

관찰 대상을 노려보듯 하니, 그래 가지고야 어디 불편해서 한 순간인들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요?

本來가 <한 마음> 뿐, 마음밖엔 眞實로 티끌 하나도 없는 것이 眞實이니, 그렇다면 <깨닫는 자>와

<깨달은 바>는 모두 <한 마음>의 변현(變現)일 뿐이요, 낱낱으로는 性稟도 作用도 없는, 迷惑한

마음이 지어낸 허구(虛構)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모든 일이 다 없고, 없다는 것도 없어서, 비로소 <마음이

쉬고 생각이 끊어져서>, 하나뿐의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만이 우뚝 드러날 것이니, 結局

망령된 범정(凡情)을 除할 뿐, 달리 수승(殊勝)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結局 부처는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을 證得하는 일이 없으니, 왜냐하면
진여법성(眞如法性)이 本來 얻을 바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얻을 바 없는 도리 가운데서 부처를 봐야 하는 것이니,
헛되이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헤아리고 더듬는 일을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 * *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생각의 대상과 , <나>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自體性이 없다면,
― 말로써가 아니라 眞實로 그렇다면 ―  <누가> 있어서 <무엇>을 증득(證得)하겠어요?

그러므로 구경(究竟)의 깨달음은 학인(學人)에 의해 證得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마음으로 무엇을 깨달은 바가 있으면 거기에는 能과 所(能所 :主觀과 客觀)가 있게 될 터이니,
<참된 하나>(眞一)가 이루어질 수 없고, 몸으로 닦아 이루는 바가 있으면 그 모두가 有爲로 이룬

덧없고 허망한 것으로 떨어질 테니, 역시 究竟에 相應할 수가 없고, ···

 

요약컨대, 모든 聖賢들은 이 <성스러운 지혜>(聖智/靈覺性))를 스스로 깨달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聖스러운 智慧는 <참되고 如如한 法性>(眞如法性)인지라, 스스로 이미 온전히 갖추어졌거늘,
어찌 外部의 因緣을 빌려서 이루어지겠어요?

 

모든 衆生이 일찍이 한 번도 이 <本來의 자리>(本位)를 떠난 적이 없고, 반대로 이 本來의 자리도

한 瞬間도 모든 衆生을 떠나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도 지금도 찰나찰나 매순간순간 本來의 그 자리에서

본래의 그 자리, <그것>을 쓰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니, 그러므로 지금 당장 알아차릴 일이요,

정식(情識)으로 헤아리고 더듬고 하면 크게 어긋납니다.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瞬間  現在 환히 아는, 이 <나의 마음>이 그대로 <부처 마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서, 이 <마음의 성품>(心性)이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보면 이것이 바로 <참 부처가 여여한 것>(眞佛如如)이니,
달리 밖으로 구하고 더듬는 일은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 * *

<마음의 바다>(心海)는 본래 스스로 청정한데 <경계의 바람>(境風)이 부는 바람에 문득
<의식의 물결>(識浪)이 일어서 쉴 날이 없는 겁니다. 그러다가 모든 境界가 性稟이 비었음을 분명히

깨치면 境界를 따라서 일어나던 바람이 잔잔해지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지혜가 나타나고 <마음 바다>

는 本來의 如如함을 되찾는 겁니다.

 

이 때, 바깥 경계를 기웃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찍어 눌러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하면 그 마음은

더욱 시끄러워질 뿐이니, 그저 문득 무심(無心)에 들어서, <기웃거리는 마음>이나 <기웃거리지 않게 된

마음>이나 모두가 <한 마음>을 여의는 게 아님을 알아서 양변(兩邊)에 도무지 간여(干與)하지 않으면
마음은 저도 모르는 새에 저절로 고요해짐을 알게 될 겁니다.

 

道는 본래 다툼이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억지노름을 하지말고, 그저 순히 흐름을 따르는 가운데
面前의 萬 가지 境界가 다 마음의 변현(變現)일 뿐임을 分明히 보아서, 마음에 조작(造作)이 없으면

머지 않아서 걸음걸음마다 부처님을 뵙게 될 테니, 이것 이외에 별다른 재간이 있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 * *

인연(因緣)에 依持해서 생겨나는 모든 法은 <자체의 성품>(自體性)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 (因緣)에

依持해서만 存在하게 되는 겁니다. 마치 그림자가 物體에 依持해서 나타나고, 메아리가 音聲에 依持해서

나타나듯이 말이에요. 만약 그림자나 메아리가 固定된 實體의 自體의 性稟이 있는 것이라면 꼭 타(他)에

依持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因緣에 의지해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
이 世上의 모든 것은 因緣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
自體의 性稟이 없어서, 마치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전혀 진실 됨이 없는 건데,
다만 사람들이 그 겉모양에 헷갈려서 이 虛妄하고 無常한 形相, 現象을 실체(實體)로 誤認하여

執着함으로써 이 세간상(世間相)이 마치 실유(實有)인 양 '있음'이 된 것입니다. ···

 

저 '알렉산더'나 '징기스칸'과 같은 英雄 호걸들이 이룩한 大帝國이 지금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2500여 년 前에, '붓다'도 이 事實을 문득 깨닫고 보니, 새벽 별이 새벽 별이 아니고,
이 世上 모든 것이 <있되 있음이 아니고, 없되 없음이 아닌>(色卽是空 空卽是色) 妙한 존재(妙有)임을

(眞空妙有)밝혀냈던 것이고, 20 세기 들어서 일체 존재의 실상(實相)을 구명하던 科學者들도 오랜 연구

끝에 一切 萬有의 究竟의 質料인 양자(量子/quantum)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실로

놀라운 結論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요컨대, 人間의 觀察 對相인 物理的 精神的인 現象, 이 世上 一切 萬法은 人間의 觀察 行爲와는 相關없이

저 바깥에 그 自體의 固有한 性稟을 가지고, 저마다의 길을 가면서, 獨立的인 機能을 하는 그런 存在가

전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依해서 지어진, 다시 말해서, 이 世上 一切 萬法은 人間들의 마음이 스스로

마음 거울에 投影한 業(행위/생각, 말, 행동)의 그림자, 虛妄한 情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事實

깨달아야 합니다.

結局 三界는 唯心이요, 萬法이 唯識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출처 : 현정선원 / 大愚禪師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