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현재 마음은 한 찰나 드러난 영원의 모습

장백산-1 2024. 6. 8. 22:15

30. 영원의 모습

현재 마음은 한 찰나 드러난 영원의 모습

알아차린다는 건 꿈을 꾸는 것과 동일,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을 자각하는 것
마음에서 공간 배제돼도 시간은 배제 안 돼,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마음은 현재 마음
마음이란 알아차리면서 흘러가는 것

 

합천 해인사 일주문의 주련에 쓰인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1) 스님이 ‘금강경’을 해설한 ‘금강경함허설의(金剛經涵虛說誼)’에 나오는 표현으로 ‘천겁이 지났어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가 이어져도 늘 지금이다’라는 의미다. 글씨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鎭, 1864~1933)이 썼다.

 

지금까지 나는 마음을 자주 꿈(夢)에 빗대어 말했는데, 저 ‘성유식론’의 진지한 관점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마음이 무엇을 알아차리는 것은 꿈을 꾸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 마음이 바깥으로 자기의 환영을 투영하여 그것을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하는 사람들에겐, 생사윤회란 ‘마음을 가진 자(含識)’가 꾸는 긴 꿈이요, 여기서 죽어서 저기서 태어나는 것은 하나의 꿈에서 깨어나 또 다른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언젠가 ‘진짜로 깨어나면(眞覺)’ 자기가 보고 들었던 것이 결국 마음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런 비유를 마뜩잖게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약간의 관용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름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군가 한 저명한 고전 작품에서 ‘우리의 삶은 꿈과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다’라는 문구를 본다면, 자기가 즉각적으로 느꼈던 어떤 감흥 속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가. 그리곤 잠시나마 잔인한 역사와 운명이 휘저어 놓은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꿈 이야기를 좀 더 밀고 나가보겠다. 아직까지 꿈의 진정한 신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의 몇 편의 글에서 줄곧 범부와 성자의 마음을 몸과 세계(국토)와 묶어서 다루었다. 몸과 세계는 모든 꿈에서 반복되는 단순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심층의 마음(제8식)은, 극히 미세하게 또 끊임없이 안으로는 감각기능을 가진 몸을 직관하고 있고, 바깥으로는 세계를 분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표층에서 작동하는 모든 마음도 자기만의 인식 대상(所緣)과 함께 생기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꿈의 신비란 꿈속에 나타나는 경계보다는 ‘꿈을 꾼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있다.

 

꿈꾸는 줄도 모른 채 꿈을 꾸다가 다시 깨어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하고 놀라운 일인가. 이 신기한 일은 바로 ‘알아차린다(了)’고 하는 영적인 인식 작용에 기대고 있고, 그런 작용이 바로 마음 자체이며, 그 마음이야말로 말로 도달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미륵의 후예라면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어떤 문구 하나를 되새기는 것만으로 족하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은 단지 가설(假說)이다.’ 이런 전제하에 마음의 모습에 관한 몇 가지 학설이 등장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나를 또다시 시간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찰나와 영원의 문제 말이다.

 

‘성유식론’의 연구자들 사이에선 예로부터 ‘안난진호(安難陳護) 일이삼사(一二三四)’라는 문구가 전해진다. 안혜·난타·진나·호법이 그 차례대로 일분(一分)·이분(二分)·삼분(三分)·사분(四分)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냉철한 판단에 따르면,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마음이란 결국 바로 지금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마음, 즉 현재의 마음이다. 그것을 관해 보면, 무엇을 알아차리는 순간 하나의 마음 자체가 두 쪽이나 세 쪽이나 네 쪽으로 갈라진 듯한 구조적 형태를 띤다. 그래서 저 네 논사의 네 종류 학설이 등장하였다. 이중 진나의 삼분설과 호법의 사분설이 주로 회자된다. 혹자는 사분설이 마치 후대 유식학의 비장의 학설처럼 말하지만, 나로서는 한 찰나 현재의 마음이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학설조차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그 말의 의미를 여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설사 마음이 네 부분 심지어 무한한 부분들로 되어 있다고 말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나의 당혹감을 고백하기에 앞서, 저 삼분설의 기본 취지를 간략히 소개하겠다. ‘성유식론’ 서두에서는 유식(唯識)이라는 전체 종지를 간략히 표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식(識) 자체가 전변해서 마치 두 부분인 것처럼 나타난다.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자증분(自證分)에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삼분의 기본 구조다. 마음이 생기하면, 언제나 인식 대상이 나타나 있고, 인식 대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것을 인식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인식 대상을 ‘상분’이라 하고, 인식 작용을 ‘견분’이라 한다. 그런데 가령 맑은 거울의 표면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나거나 혹은 고요한 물의 표면에 둥근 달이 나타나 있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다시 나의 마음에 거실 풍경이 보인다고 상상하면서, 앞의 두 사례와 비교해 보자. 어떤 투명한 것의 표면에 대상의 형상이 나타나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유사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거울이나 강물이 ‘안다’고는 하지 않으면서 마음은 ‘안다’고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마음은 무엇을 안다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안다’는 것은 어떤 대상(상분)을 아는 작용(견분)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을 ‘자증분’이라 한다. 만약 삼분의 구조 안에서 ‘안다’고 하는 최종 자격을 부여한다면, 자증분이 될 것이고, 그것은 마음 자체에 해당한다.

 

나는 마치 어떤 말의 의미를 아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저 삼분설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었다기보다는 왠지 더 깊은 미궁 속에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내가 언제나 마음을 시간과 묶어서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 마음이란 알아차리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는 마음은 눈과 귀 혹은 색깔과 소리 등에 의지하지 않고도 꿈속의 경계들을 지어내어 보거나 듣는다. 심지어 두려움과 환희를 느낀다. 그것은 마음의 알아차림이 반드시 물리적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나 마음에서 시간을 빼버린다면, 꿈을 꾸거나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마음이 생각생각 흘러가는 것이 바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저 삼분설이라는 것도 이렇게 이해하기로 하였다. 지금 하나의 마음(자증분)이 둘(견분과 상분)로 갈라지는 것이 바로 한 찰나이다. 그러나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이 실로 두 개로 쪼개질 리가 없다. 쪼개지지 않는 저 영적인 근원은 본래 고요하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마음이란 저 영원이 한 찰나 잠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함허 스님이 말하길 “천겁이 지났어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가 이어져도 늘 지금이다(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라고 하였다. 그러니 내가 꿈속의 시간에서 헤매는 동안에도 항상 영원에 머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과 시간은 알려 하면 오히려 모르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흘러가고 있고, 알고 싶어 하는 찰나 이미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낙담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전해지는 바로는, 한 위대한 성자가 생사의 오랜 꿈에서 진짜로 깨어나 일체를 두루 훑어보고 오직 마음일 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끝내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사라진다 해도, 마음의 비밀을 깨달은 자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진짜로 깨어난 자의 마음은 우주 전체를 두루 비추는 거대한 둥근 거울(大圓鏡)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지구에서 보는 별빛이 아득한 과거의 모습이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이 어지럽게 공존하는 이 우주를 한 찰나에 비추는 신비한 거울을 상상해 보면 금방 즐거워진다.

백진순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dharmapala@hanmail.net

[1731호 / 2024년 6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