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 의대증원 · 명태균… 비상계엄이 모두 삼켰다 [올해의 국내 10대 뉴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20여년 전 개봉한 한 영화 광고 문구만큼 2024년 한국을 잘 설명하는 글귀가 또 있을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케이(K)문학의 성취에 온 국민이 기뻐한 것도 잠시, 45년 만의 비상계엄과 포고령 선포라는 어안이 벙벙한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와 동행하는 법. 망상과 주술의 안갯속에 빠져 있는 지도자를 정리해 케이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계기로 삼고, 기후위기와 인구위기 극복 등 미래를 준비하는 2025년이 되길 바란다.
45년만의 계엄…내란 소용돌이 빠진 한국
12월3일 밤 10시28분, 한국 사회의 시계가 순식간에 45년 전으로 돌아갔다. 극우 음모론에 빠져 야당과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싸잡아 “반국가세력”으로 바라본 윤석열 대통령의 폭주에 우리 사회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뻔했다. 6시간 만인 4일 새벽 비상계엄이 공식 해제될 때까지 경악과 충격, 분노가 교차한 밤이었다.
요건도, 절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 선포였고, “처단한다”는 서슬 퍼런 표현이 넘쳐난 계엄 포고령은 국회, 언론, 노동자, 전공의 등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장악 ‘작전’에 투입된 특수부대원들을 지휘한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 등은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에게서 ‘의원들을 끌어내라’, ‘선관위 서버를 접수하라’ 같은 지시를 수차례 받았다고 폭로했다.
비상계엄을 온몸으로 막아섰던 시민들은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이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국회는 비상계엄 선포 11일 만에 탄핵소추 의결로 내란 우두머리(수괴)인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12 · 3 내란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성범죄로 불명예 전역한 뒤 역술가가 돼 점집을 운영했다는 예비역 장성이 일부 현역들을 규합해 계엄 계획을 세우고, 북한의 군사 도발을 유인한다는 ‘북풍’ 공작을 꾀한 정황까지 수사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절차, 내란 수사 등에 불응하며 버티고, 여당은 국민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커녕 내란특검 출범과 헌법재판관 임명까지 막아서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도 여기에 장단 맞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조처조차 거부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 작가가 10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문학상 메달과 증서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한강, 아시아 여성 첫 노벨문학상
한국문학은 2024년 10월10일 저녁 8시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 작가 한강(54)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전세계에 발표된 국내 시각이다. 1970년대생 작가로, 아시아 여성 작가로, 최초 수상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유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며 그의 작품을 상찬했다. 5·18 광주 배경의 ‘소년이 온다’, 4·3 제주의 ‘작별하지 않는다’, 광포한 폭력과 섬약한 인간을 마주시킨 ‘채식주의자’, 내년 처음 서구권에 소개될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등으로 4분기 출판시장은 압도되었다. 노벨상은 벼락같았으나, 한국문학의 존재감은 근년 돌올했다. 올해 3월 김혜순 시인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시 부문)을 국내 최초 수상했고, 올해까지 3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통산 5회)에 한국 작가가 올랐다. ‘윤석열 내란사태’의 “큰 충격”을 고백한 한강은 말했다. “폭력의 반대편”에 ‘문학’이 있다고.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6월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양윤선홀에서 서울대병원이 무기한 휴진선언 기자회견이 열리기 전 의사 가운이 놓여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의대정원 2천명 증원’ 의료대란 장기화
정부는 지난 2월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의대 입학 정원을 3058명에서 5058명으로 2천명 늘리는 의대 증원 계획을 발표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규모였다. 의사들은 졸속 추진이라고 거세게 반발했고 대형병원에 근무하던 전공의(인턴·레지던트) 1만여명이 집단 사직했다. 의대생들도 동맹휴학했다. 정부는 전공의들에게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고, 의료계와 정부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전공의에게 의존해 운영해온 대형병원은 의료 공백이 발생했고, 환자들은 대형병원에서 진료를 받기 어려워졌다. 의료개혁 철폐를 요구하는 전공의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정부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내년도 의대 증원 규모는 1509명으로 줄어 현재 모집 중이다. 집단 사직·휴학 여파로 의사국가고시, 전공의 지원 인력이 지난해의 10분의 1 이하로 줄었지만 의-정 갈등은 출구를 찾지 못하며 해를 넘기고 있다. 이경미 기자 kmlee@hani.co.kr
김건희 여사 공천 개입 의혹과 미래한국연구소의 불법 여론조사 의혹 등 사건의 핵심 인물인 명태균 씨가 14일 오후 경남 창원시 성산구 창원지방법원에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판도라의 상자 된 ‘명태균 게이트’
지난 9월 ‘김건희 여사가 4·10 총선 여당 공천에 개입했다’는 첫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어지는 추가 보도를 통해 경남지역 정치브로커 명태균씨가 대선 때부터 비공개 맞춤형 여론조사 등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깊숙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여론조사 비용 대신 2022년 6월 보궐선거 때 김영선 전 의원(국민의힘)이 공천을 받았다는 정황들이 추가로 확인됐다.
이후 윤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이용한 명씨 관련 의혹은 각종 선거 개입과 여론조사 조작, 공천·취업 알선 명목 금품수수, 창원 제2국가산단 선정 과정 개입 등으로 일파만파 커졌다. 이 과정에서 오세훈·홍준표·박형준·박완수·김진태·이준석·윤상현·조은희·윤한홍·권성동·김종인 등 유력 정치인까지 입길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경남선관위로부터 김 전 의원과 명씨 등 수사 의뢰를 받아놓고도 뭉개고 있던 창원지검은 뒤늦게 수사에 착수해 지난 3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명씨를 구속기소했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추석연휴 마지막 날인 9월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에서 한복입은 한 어린이가 저고리를 풀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기상청은 이날 오전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를 제외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 특보를 발효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부채질한 추석, 가을 덮친 폭염
올해는 사상 최악의 폭염이 기승을 부린 1994년, 2018년에 견줄 만한 한해였다. 특히 9월 ‘가을 폭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추석 연휴(9월16~18일) 기온은 평년보다 8~9도 높았고, 추석 당일 최고기온 기록을 새로 쓴 곳이 21곳에 달했다. 송편이 쉬고 야외수영장은 북적였다. 연휴 직후엔 서울에 역대 가장 늦은 폭염경보가 내려졌다. 2010년 이후 14년 만의 일로, 특보 기준을 체감온도로 바꾼 2020년 이후 한번도 없던 일이다. 유럽연합의 기후감시기구는 올해 지구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6도 올라 ‘역사상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2015년 파리협정에서 세운 목표치 1.5도를 넘어선 첫해가 된 셈이다. 한편 지난 8월29일 헌법재판소는 2030년까지만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정한 현행법이 미래세대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취지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아시아 첫 ‘기후소송’ 판결이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19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돼 있다. 이날 원·달러 환율(시작가) 1453.0원은 세계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16일 장중 1488.0원 이후 약 15년9개월 만에 최고치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물가 이어 환율까지 불안 1450원
올해 초부터 불안한 물가가 서민 경제를 옥좼다. 상반기 한때 물가상승률은 3%를 웃돌았고, 특히 2~4월 채소류 등 신선식품 물가상승률은 20% 안팎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통령은 “(대파 한단이) 875원이면 합리적으로 생각된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발언을 했고, 이는 여당의 4월 총선 참패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다행히 하반기 들어 물가는 안정세를 찾아갔다.
대신 원-달러 환율 불안이 확산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쉼 없는 주식 매도세가 환율 상승을 부추겼다. 보편관세 도입 등 한층 매워진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승리한 미국 대선 결과도 원화 가치를 흔들었다. 그런 중에 터진 ‘12·3 내란사태’는 직격탄을 날렸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 리스크로 전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원-달러 환율은 단숨에 1450원대까지 뛰었다. 세계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과 같은 수준이다. 김경락 기자 sp96@hani.co.kr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이 4월10일 국회 의원회관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상황실에서 개표초반 일찌감치 당선된 의원 이름표에 당선스티커를 붙이고 있다.총선 ‘민주 175석’…민심, 정권을 심판
민심은 매서웠다. ‘야당 192석, 여당 108석’.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여당이 맛본 적 없는 참패를 기록했고,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시끌시끌했던 공천 파동에도 175석을 확보하며 정권 심판의 전면에 나섰다.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논란, ‘채 상병 순직 사건’과 ‘런종섭’ 파문,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875원’ 발언 등이 중첩된 결과였다. ‘윤석열 검찰’의 전방위적 수사로 2년 내내 정치생명을 위협받았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총선 압승으로 당내 지위를 확고히 하며 차기 대선의 발판을 만들었다.
집권 2년 만에 받아 든 기록적 참패는 윤석열 정권을 향한 국민의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선행 지표였다. 그러나 윤 대통령과 여당은 마지막 신호마저 무시했다.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다”던 윤 대통령은 쇄신 대신 ‘계엄’을 택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지난 6월24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 소재 일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에서 불이 나 소방관계자들이 진화 작업을 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아리셀 화재로 이주노동자 등 참변
6월24일 경기도 화성시 리튬전지 제조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로 이주노동자 18명 등 모두 23명이 숨졌다. 박순관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그의 아들 박중언 총괄본부장 등 임직원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유족의 장례 절차는 사고 발생 132일 만인 11월3일 마무리됐지만, 회사와 유족 간 보상 협의는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리셀 참사는 불법파견·위장도급을 통한 ‘위험의 외주화’와 이주노동자에게 위험을 전가하는 ‘위험의 이주화’가 동시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뒤이은 수사로 확인된 사고 원인은 결국 안전의무 소홀로 인한 ‘인재’였다. 무허가 파견업체로부터 노동자를 대규모로 파견받아 안전교육 등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숙련이 필요한 전지 제조 공정에 투입했으며, 국방부에 전지를 납품하는 과정에서 품질검사 시험데이터를 조작한 사실 등도 드러났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8월30일 저녁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아웃(OUT) 말하기 대회’가 열려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6년 5월17일 한 여성이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살해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 앞은 여성 혐오 범죄의 추모 및 규탄 장소가 됐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초·중·고까지 번진 딥페이크 성범죄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이미지·음성을 합성하는 기술인 ‘딥페이크’ 성범죄가 지난 8월 말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가해자들은 피해 여성들의 사진을 훔쳐 다른 사람의 맨몸 사진과 합성해 성범죄물을 만들고 신상 정보도 함께 유포했다. 초·중·고교에까지 이런 성범죄가 만연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 뒤에야 국회,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합성 성범죄물을 소지·구입·저장·시청하거나 유포 목적이 입증되지 않은 제작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 10월16일부터 시행됐고, 텔레그램 등 국외 플랫폼 사업자의 성범죄물 유통 방지 책임도 강화하기로 했다. 2018년 불법촬영 확산, 2019년 텔레그램 기반 아동·청소년 성착취 ‘엔(n)번방’ 사건에 이어 딥페이크 성범죄까지, 피해가 심각해진 뒤에야 땜질 처방 식 대처가 반복되고 있다. 젠더 폭력이 기술 발전과 맞물려 변화하는 양상을 고려한 종합적인 대책 마련은 여전히 숙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어론장악저지공동행동 회원들이 72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정점 찍은 윤 정권 방송장악 시도
윤석열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가 정점을 찍은 한해였다. 황상무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은 문화방송(MBC) 기자 앞에서 “엠비시는 잘 들어”라며 ‘정보사 오홍근 테러 사건’을 언급(3월14일)해 논란을 빚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보도전문채널 와이티엔(YTN) 민영화를 일방적으로 처리(2월7일)했고,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꾸린 22대 국회의원선거방송심의위원회는 문화방송에만 법정 제재 17건을 쏟아냈다. 문화방송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임기 만료(8월12일)를 앞두고 임명된 이진숙 방통위원장은 취임 당일(7월31일) 방문진 등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에 나섰다가 이틀 만에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됐다. 방문진 새 이사 임명 처분은 법원에 의해 제동(8월26일)이 걸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12월3일)하며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고 선언했으나, 이마저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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