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지고 볶는 일상생활보다 더 훌륭한 법당 어디 있나?

장백산-1 2015. 8. 2. 01:07

 

 

 

지지고 볶는 일상보다 더 훌륭한 法堂 어디 있나?

 

구비구비 산골이었다. 경북 봉화군 봉성면 금봉2리. 17일 오후 산 비틀을 꽉 채운 사과밭 사이를 돌고

돌자 문수산 중턱의 金鳳庵이 나타났다. 그곳에 고우 스님이 있었다. 고우 스님은 "形式을 通해 本質을

向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形式, 方便을 버리고 '즉바로 本質로 들라'고 말하는 쪽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금봉암에는 제사, 기도 불공, 연등접수도 받지 않는다. 거창한 법회도 없다. 스님은 그 대신

가까이서나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區別없이 茶를 건넨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법문이 따로

있나. 茶 마시는 일이 법문이지." 스님은 상좌의 시봉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形式과 權位를 거부한다.

 

고우 스님은 한국 불교가 손가락에 꼽는 대표적 '선(禪)知識'이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중국의 마조 스님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했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말이죠. '마음', '부처', '무아'도 이름일 뿐이 그 이름 그 너머에 '부처'

있습니다."

 

-'석가세존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오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진짜 부처님이 오신 날은 肉身이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깨달은 날이죠. 깨닫기 前에는 결코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께서도 깨닫기 前에는 苦惱하는 보통 人間이었을 뿐이죠. 그러나 깨달은

後에는 달라집니다. 自由自在한 存在, 그 自體로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거죠."

 

-우리가 보는 세상과 부처가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릅니까?
"形相만 본다면 부처가 아닙니다. 또 本質만 봐도 부처가 아니죠.
形相과 本質을 同時에 함께 하나로 봐야 비로소 '부처'입니다."

 

-그럼, 形相이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고우 스님은 '達摩 大師' 얘기를 꺼내셨다.
"당시 중국의 수도는 낙양이었죠." 낙양의 '영녕사(永寧寺)'란 절에 巨大한 木塔이 있었다고 한다.
그 木塔이 벼락을 맞았다. 얼마나 목탑이 컸던지 타는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럴 정도로 당시 중국에는 절을 크게 짓고, 탑을 높이 쌓는 '形式的인 佛敎'가 盛行했다고 한다.

숱하게 절을 짓고, 탑을 쌓았던 양나라 무제가 달마 대사를 만나서 물었다.
"내 功德이 얼마나 되오?"  달마대사는 "무공덕(無功德)"이라고 잘라 말했다.
고우 스님은 "기록에는 '무공덕'이라고 돼 있지만,

요즘 말로 하면 '공덕은 무슨 공덕, 지랄 공덕!'이라고 쏘아붙인 것"이라며
"달마 대사는 그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얘기도 던졌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 자극적인 얘길 했을까요? "權位와 旣得權을 철저히 否定한 말입니다.그게 바로 禪宗이죠.
'形式'으로 代辨되는 權位와 旣得權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불교에선 '불(佛).법(法).승(僧)', 이 三寶를 信仰의 對相으로 삼습니다.

어디에 '선(禪)'이 있습니까?  "禪은 절에도 없고, 法에도 없고, 스님들 속에도 없습니다."

 

-그럼 禪이 어디에 있습니까?  "禪은 모든 사람들의 日常生活 속에 普遍化돼 있습니다.

즉, 모든 空間과 時間 속에 녹아 있죠.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禪'입니다."

 

-그런데 '禪'을 보는 것이 왜 그리 힘듭니까?
"禪이 形式化했기 때문이죠. 석가모니부처님이 오신지 2500년이 흘렀습니다.
'부처'를 찾기 위해 方便으로 마련한 '過程'과 '手段' 卽, 修行이 禪을 보지못하게 形式化한 거죠.
더구나 사람들은 그 形式만을 붙들고 있습니다. 달은 안 보고, 손가락에만 執着하는 거죠.
禪은 철저하게 그런 形式을 깨고, 本來모습으로 돌아가는 作業입니다. 그게 바로 禪 修行이죠."

 

며칠 전, 印度의 요가 수행자 한 분이 고우 스님을 찾아 왔다.
"韓國의 禪佛敎를 알고 싶다"며 금봉암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때 고우 스님이 물었다. "인도에는 요가 수행의 고수들이 많지요?"

 "네, 몇 달씩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꼼짝도 안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대단한 분들이죠."

 

 

고우 스님이 말했다. "눈을 감았을 때만 찾아오는 마음의 平和는 진짜가 아닙니다.
눈 뜨고 生活하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마음이 고요하고, 이 자리에서 마음이 平和로워야 합니다.
눈을 감았을 때만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다면 그게 바로 '공(空)에 떨어진(無記空) 자리'죠."
日常生活 속에서 흔들림 없이 通하는 마음의 고요와 平和라야 진짜 '禪'이라는 얘기였다.

 

-세상은 각박합니다. 일반인이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고요'와 '평화' 즉, 禪을 찾는 것이 可能합니까?
"물론입니다. 지지고 볶는 日常生活보다 더 훌륭한 法堂은 없습니다(處處法堂 事事佛供). 日常 속에서

허깨비 같은 形相인 이 世上 모든 것들을 붙들고 있는 '나'를 每瞬間 볼 수 있으니까요.  그 '나'를 비우

면 本質을 볼 수 있죠."

 

-本質을 보는 순간, 어찌 됩니까?  "本質을 보면 알게 되죠. '모든 것이 平等하구나.' 라고 부자도,

가난이도, 신분이 높은 이도, 낮은 이도, 지혜 많은 이도, 적은 이도, 모두가 平等함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佛敎의 위대한 가르침이 있는 거죠."

 

-사람들이 모든 것은 다 平等하다는 事實을 알면 어찌 됩니까?
"남과 比較를 안 하게 되죠. 人種도, 民族도, 宗敎도 比較를 안 하게 되죠. 있는 그대로 平等하니까요.

그래서 갈등과 대립이 저절로 풀립니다. 봄날에 눈 녹듯이 모든 문제가 풀리죠. 듣기 좋자고 하는 말

이 결코 아닙니다. 實際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禪을 '21세기 人類의 代案'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고우 스님은 '똥을 푸는 사람' 얘길 꺼냈다. 부처님 당시에 똥을 푸는 사람은 印度의 賤民階級이었다.
부처님이 지나가면 똥 푸는 사람은 늘 도망쳤다. 하루는 부처님이 그 사람을 불러서 물었다.
"왜 도망가느냐?"  "황송해서요"  "뭐가 황송한가?"  "제가 賤民이라서요"

부처님이 말했다. "身分이란 건 많이 가지고,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든 制度일 뿐이다. 거기에 속지 마라."

이 말에 똥 푸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身分에 높.낮이가 없음은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의 職業은 賤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이 말했다. "國王이나 大臣도 國民을 괴롭히면 賤한 놈이고,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면 누구라도 高貴한 사람이다."

 

-이 일화는 무슨 뜻입니까?
"이 世上 모든 것이 平等하다는 眞實을 알게되면 劣等意識도 풀립니다. 주위를 보세요. 지금 우리

社會職業에 대한 劣等意識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世上 모든 것이 平等하다는

事實을 깨우치면 자신의 職業에 대한 價値와 意味를 제대로 알되죠. 이건 굉장한 것입니다."

 

-왜 굉장한 겁니까?
"자기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될 때, 그 일을 정말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럼 富와 名譽는 물론,

人格까지 저절로 따라옵니다. 그게 바로 順理죠. 사람들은 그 事實을 모르고 오직 돈만 目標로

삼고 있죠. 그래서 極端的인 利己主義가 판을 치는 겁니다."

 

-이기주의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틀어쥔 '나'가 있어서죠. 사람들은 自身을 잡으려고만 하지,

놓으려고 하진 않죠. 自身의 存在의 本質 原理에 대한 誤解에서 이기주의가 나옵니다."

 

-本質로 向하는 데 '선(禪)'만이 唯一한 修行法입니까?  "꼭 禪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禪이 다른 修行과 다른 점은 남을 認定을 한다는 거죠. 간화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봉사 활동을

하든 말이죠. '禪'만이 可能하고, 다른 수행법을 통해선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

예를 든다면?  "중국의 六祖 혜능대사는 온전하게 本質에 드신 분이죠.
혜능대사는 出家하기 前에 이미 상당한 境地에 있었습니다. '효(孝)' 수행을 했거든요.

홀 어머니를 모시며 純粹한 마음으로, '나' 없이, 지극하게 孝道를 했거든요. 그걸 通해 이미

本質의 문턱까지 가 있었죠. 그리고 出家 後 스승의 짧은 가르침으로 훌쩍 本質에 든 거죠."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基督敎는 '전변설(轉變設)'이죠. 眞理의 根源, 眞理의 窓口가 따로 있다는 거죠.

反面 佛敎는 '연기설(緣起設)'이죠. 根源의 자리가 어디에나 普遍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基督敎의 眞理는 너무 멀어서 못 보고, 佛敎의 眞理는 너무 가까워서 못 보죠."

 

-부처의 자리를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란 무엇입니까?
"부서지고 없어져 아무것도 없어서 '空'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固定된 實體가 없기 때문에 '空'입니다.
本質과 形相이 同時에 '하나'로 있기에 '空'입니다. 空을 二元論的 思考로는 도저히 理解할 수 없겠죠.
그런데 이게 事實인데 어떡합니까."

 

-고행을 통해서만 그 本質 자리에 가는 겁니까?
"佛敎의 修行은 결코 苦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이죠.

갈수록 自己를 알고, 自己를 안 만큼 삶이 自由로워지는데 그게 왜 苦行입니까.
眞理에 대한 理解와 믿음이 不足한 사람이 억지로 修行을 하려고 하니까 '苦行'이 되는 겁니다.

불교의 修行은 아주 커다란 즐거움이죠."

 

해가 떨어졌다. 깊은 산, 뻐꾸기 울음이 크게 들렸다. 뜰에 나서니 밤별도 크게 보였다.

'졸졸졸'하는 개울물 소리도 밤새 쩌렁쩌렁했다. 禪僧의 막힘없는 법문에 세상이 더 크게 보였다.


 

고우스님


◆ 고우 스님=스무 살 때(1961년) 경북 김천의 청암사 수도암에서 출가했다. 그리고 선방 수좌 생활만

계속해 왔다. 80년 신군부는 정화를 명분으로 불교 지도부를 모두 축출했다. 주요 사찰의 주지는 다

쫓겨났다. 그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좌회의 결의로 고우 스님이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을 맡았다.
그 공백이 정비되자 스님은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봉암사 주지와 각화사 태백선원장, 전국선원수좌회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과 전국선원수좌회 선림지도위원을 맡고 있다.
선원장을 맡던 시절, 경북 봉화의 각화사 태백선원은 전국의 선승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선방 중 하나

였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자안시중생(慈眼視重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