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모를 뿐'임이 분명해 집니다
제가 설법을 할 때나 글에서나 '모를뿐'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 공부는 머리로 법문을 듣고 이해하는 공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법문을 듣고 그 내용을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하며, 내가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불교 경전을 대입해 보아서 딱딱 들어맞을 때 느끼는 쾌감 같은 것을 마음 공부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허공에 도장을 찍듯, 마음 공부는 하되 한 바가 없어야 하고, 공부를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붙잡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좋은 법문일지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붙잡아 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대입시켜 볼 어떤 기준점을 만들어 놓으면 안 됩니다. 방편으로 다양한 설법을 해 드리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살라'는 투의 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도 설법을 듣고 '이렇게 살아야지'하는 그 어떤 기준을 잡아 놓으면 안 됩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말처럼, 미리 정해놓을 수 있는 법은 어디에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주법이라는 말처럼, 머무를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처럼 정해진 바 없는 공부, 길 없는 길이 바로 중도의 길입니다.
이 길은 딱 정해진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어떻게 가면 된다 하고 딱 정해진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이것만 하면 깨닫는다고 할 만한 어떤 수행법을 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문을 들을 때 필기하지 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읽을 때 밑줄 치지 말라는 방편의 표현을 하곤 합니다. '그저 들을 뿐' 하고 멍청하게 들으라고도 합니다.
마음 공부는 세속에서 하는 공부와는 달라서, 영민하게 깨어서 듣고 정리를 잘 해서 머리에 기억하고, 그것을 잘 써먹고 그러는 공부가 아닙니다. 마음 공부는 그저 간절한 발심으로 듣되, 잘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이구나' 하고 정리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그냥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모를 뿐'임이 분명해 집니다. 그러니 더욱더 답답해지고, 은산철벽에 갇힌 듯이 궁금할 뿐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해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법문을 들으라고 했을 뿐입니다.
'법상스님이 이런 말을 했어', '법상스님의 가르침은 이거야', '법상스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던데', 하지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말을 했지만, 한 마디도 설한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또한 듣되 듣는 바 없이 들어 주십시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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