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괴로움의 원인 ‘현상’서 찾는 한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장백산-1 2024. 7. 14. 21:25

괴로움의 원인 ‘현상’서 찾는 한 결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선명상 아카데미’

제3강 ​​​​​​​‘이것 모르면 빌 게이츠도 괴롭다’

육근이 빚어낸 현상은 아무리 쪼개도 존재하는 ‘1’과 같아
육근이 빚어냄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업식(아뢰야식)에 저장된 고락의 씨앗 제거해야
고락을 일으키지 않는 마음 평정 연습이 선명상 수행의 출발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선명상 아카데미 제3강이 7월 9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진행됐다.

한국불교 전통 수행법인 간화선에 기반한 선명상의 요체를 알리기 위해 사회리더를 대상으로 강연을 펼치고 있는 조계종 총무원장 진우 스님의 선명상 아카데미 제3강이 7월 9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진행됐다. 세 번째 강의의 주제는 ‘이것 모르면 빌 게이츠도 괴롭다’. 진우 스님은 “인간의 육근이 빚어내는 현상은 결코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다”며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잠재의식 속에 저장돼 있는 고락 감정의 업을 제거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주에 이어 진우 스님 강의를 요약해 지면으로 전한다. [편집자]

 

 

지난 강의에서는 고와 락은 찾아오는 시점이 다를 뿐 즐거움이 있으면 괴로움이 오는 시점이 반드시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밀물과 썰물처럼 명백히 벌어지는 일들이다. 현상은 반드시 생로병사하고 성주괴공 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생기. 서로 인연이 되어 일어나는 연기법이다. 이 부분을 여실하게 분명히 알아야 현상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이 사사건건 닿으며 그곳에서 즐거움을 얻고 괴로움을 얻는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만, 수천년 동안 인류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발전은 지속될 것이며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특히 과학문명은 급속하게 발전했고, 4차 산업시대를 넘어서 AI시대가 도래했다. 이대로 발전한다면 도로가 없어지고 배도 없어질 것이다. 모든 것이 공중에 떠서 살 것이다. 여기서 더 시간이 지나면 공중에 떠 있는 것도 모자라 유체이탈까지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되면 몸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굳이 내 몸으로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해외에 가려고 한다면 물리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내 몸이 직접가야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다. 물리적인 몸이 이동하지 않고 나의 ‘식’만 빠져나가는 것이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업식 등 식만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를 보는 천리안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진우 스님은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잠재의식 속에 저장돼 있는 고락 감정의 업을 제거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을 거듭해온 인간의 괴로움은 사라졌는가. 수 만 년 살아오면서 인간이 원하고 상상하는 것들이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괴로움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애쓰고 노력하고 연구하고 발전해왔는데도 불구하고 근심, 걱정, 괴로움, 고통은 없어지지 않았다. 원시인과 지금의 인류를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행복할 것 같은가. 정해진 답은 없지만 지금의 우리가 더 행복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괴로움을 끊기 위한 노력도 계속 이어졌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철학, 종교 등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인간의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과연 더 안다고 괴로움이 없어지고 모른다고 더 괴로울까? 돈이 많거나, 명예롭거나, 권력을 얻을면 괴로움이 없을까. 하물며 종교인, 수행자라고 해서 과연 괴로움이 없을까? 이런 모든 것들은 필연에 필연이 겹치고 겹쳐서 빚어지는 중중무진이다.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중첩된 상황이 그런 결과물과 현상으로 인연 지어질 뿐이다. 돈이 많아서 행복하더라도 상대적인 대가가 따른다. 인과 업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럼 우린 무엇 때문에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 괴로움이 왜 생기는지 원인과 실체를 모르고는 괴로움을 절대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에 괴로움의 실체를 낱낱이 설명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실체를 모른 채 현상만을 보고 판단한다.

 
 
 
진우 스님은 “인간의 육근이 빚어내는 현상은 결코 괴로움의 원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현상이 문제일까. 불교에서는 눈, 귀, 코, 혀, 몸, 생각의 육근과 보이는 것, 소리, 냄새, 맛, 닿는 것, 느껴지는 것의 육경, 그리고 여기에 나의 생각을 얹어버리는 육식을 합쳐서 18계라 부른다. 이 안에서 모든 현상이 이뤄진다.

 

세상이 무너져도 내게 문제의식이 없다면 편안할 것이다. 반대로 세상이 평화롭고 극락이라도 내가 슬프고 괴롭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각자가 가진 고락의 업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현상은 허구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금강경’에서 공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하셨다.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라고도 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실체 없는 현상을 보면서 희로애락을 느끼고 있다. 실체가 없는 현상에 대해 실체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집착하지 않아야 괴로움이 덜 생긴다.

 

현상에 대해 유식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을 볼 때도 입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천상인은 물을 보석으로 보지만 아귀들은 피고름, 사람은 물로 본다. 물고기는 물을 어떻게 볼까. 물고기는 살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물로 인식하지 않을 것이다. 우주도 그렇다. 만약 안이비설신의가 아닌 우주의 다른 존재가 바라보는 우주는 전혀 다른 공간일 것이다. 동물들도 우리와 다를 것이다.

청강생들은 진우 스님의 강연을 열심히 메모하며 들었다.
 
 

안이비설신의 말고 다른 관점의 존재는 이 우주를 어떻게 볼까. 사물 자체를 우리처럼 볼까? 그래서 영혼이라는 것이 대두가 된다. 몸은 없지만 식견이나 업식 같은 것들이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물리적으로 모든 물체는 원자로 구성돼있다.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서 이합집산하고 인연이 되어서 생기고 사람도 되고 산도 되고 물도 된다. 이 실체는 우리가 보는 모든 물체에는 전부 알갱이의 모임이다.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였을 뿐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인연생기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연생기해 모인 것들이 생로병사 성주괴공 한다. 없어지고 생기고 서로 의지하며 이런 것, 저런 것이 생긴다. 반드시 규정돼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로병사, 성주괴공, 인연생기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원인이 있으면 당연히 결과가 있다. 그 결과는 결과인 동시에 다시 원인이 되고 또 결과를 이룬다. 이것이 반복하고 연결되어 우주의 삼라만상을 이룬다.

 

0에다가 아무리 수를 곱해도 0이다. 그런데 1이 생기는 즉시 2, 3, -1, -2가 생기며 아무리 쪼개도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큰 수여도 한계가 없다. 1부터 시작해 수를 계속 더해도 끝없이 올라간다. 현상이라는 것도 서로 비교해서 생겨난다. 그냥 보면 보이는 것이지만, 위를 가리키는 순간 아래가 생기고 ‘크다’고 하면 ‘작다’가 생긴다.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크다, 작다를 논할 수 없다. 모든 현상은 상대적이기에 재단할 수 없다. 시방이라는 공간, 우주 법계 삼라만상의 것들도 우주 밖에서 보면 한 점에 불과하다.

호우주의보 발령에도 강연에는 사부대중 300여 명이 참석해 진우스님의 강연을 경청했다.
 
 

시간도 인간이 가진 시간, 동물이나 짐승이 가진 시간이 다르다. 찰나 또는 겁이라는 단위가 있다. 천녀가 옷깃을 스쳐 4방 십리가 되는 바위가 다 닳는 시간도 결국엔 오기 마련이고 순간순간의 찰나도 지나가고 있다. 현재라고 하면 이미 과거가 됐고 미래의 시간은 오지 않았다. 일념즉시무량겁,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을 깨우치면 시공이 사라진다. 찰나의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늘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생각이나 인식 관념을 늘린다. 내가 늘어뜨린 시간을 활용하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깨우친 이는 그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신통 중에 하나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신통을 부린다고 해도 괴로움이 있다.

 

이게 옳은 일인가 좋은 일인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수만 가지 원인과 조건들에 의해서 하나하나의 현상들 하나하나의 결과들이 나타난다. 그걸 놓고 어떤 게 원인이고 결과인지 규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시시비비한다. 그조차도 하나의 현상이다. 부처님은 그게 다 연기현상이라고 했다. 수만 가지 조건들에 의해 하나하나의 결과들이 나타난다. 옳게 보든 그르게 보든 그 자체도 연기의 현상이다.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인연, 연기, 인과작용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중무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조차도 생로병사 한다. 성주괴공 한다.

 

그럼에도 남는 것은 나의 괴로움뿐이다. 그냥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다. 시간적으로는 ‘삼세양중인과’라 한다. 현재가 미래로 이어지며 겹치고 겹친다.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가 계속 겹쳐친다. 과거 현재 미래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앞서 말한 18계 안에 모든 존재 현상이 다 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법유식’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모든 것(18계)은 색, 즉 현상이다. 하지만 결국 공이다. 가장 작은 ‘1’이 있음으로 2, 3, 4가 생긴다. 1을 있음(有)이라고 한다. 이러한 1은 영원히 제로(0)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잘게 쪼개도 없어지지 않는다. 더 잘게 쪼개도 작아질 뿐 없어지지 않는다. 현상은 이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는 현상에서 벗어난 것이 제로(0), 공이다. 감정, 고락이라고 하는 즐겁고 괴로운 필연적 양면성에서 빠져나온 게 제로다. 제로에는 무엇을 붙여도 붙일 수가 없다. 이를 선에서는 ‘성성적적’이라고 한다. 이게 깨달음이고 어떤 현상이 일어나도 조금도 괴롭지 않다. 벼락을 맞아도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뿐이다. 깨닫기 위해선 고락이라는 업을 없애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잘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금성벽’이라고도 한다. 도저히 깰 수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을 완전히 박살 내는 것이 선이다. 간화선으로 해탈하여 고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즉 어떤 괴로움도 붙지 않는 제로가 된다. 해탈, 니르바나, 성불, 견성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떤 생각을 하든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걸림이 없어진다. 이를 신구의 삼업청정이라 한다. 지금이라도 고락이라는 감정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 선명상이다.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선명상은 누워서 하든 앉아서 하든 걸으면서 하든 자신의 방법에 맞게 하면 된다.

 

 

내가 가진 육신으로 보고 듣게 되니 내가 보고 듣는 데에서 고락이라는 것이 생긴다. 우연히 생겨나는 것은 없다. 나의 괴로움을 덜어내고 덜어내어 나의 아뢰야식, 잠재의식 속에 저장돼 있는 내 괴로움의 업식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진우 스님에게 질문 있습니다]

 

질문 1> 일생의 고와 락이 같은 양으로 다가온다면 현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의미가 없다는 뜻인가요. 
진우 스님>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을 해도 괴로움이 생길 때가 있을 겁니다. 선명상으로 그 괴로움을 극복해나가라고 하는 것, 더 큰 효과를 보라는 것입니다. 무애자재하고 방하착 하면 더 큰 힘이 날 것입니다. 

 

질문 2> 매일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하는데 마음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배운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진우 스님> 내 안의 감정을 관하거나 ‘업이 나타나고 있구나’라는 것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선명상입니다. 고락의 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상태를 느끼며 차분히 해보세요.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방향만 조금 바꾸면 좋은 결과가 올 것입니다. 

 

질문 3> 선명상을 할 때,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할까요.
진우 스님> 현상은 수많은 조건에 의해 벌어집니다. 고통, 번뇌가 계속 나타나는 것은 현상과 줄탁동시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관하는 것이 선명상 중 하나입니다. 내가 고통스럽거나 괴롭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하거나 이런 것들은 순전히 나의 고락의 업식이 나타난 것으로 그것을 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강연이 끝나고 박수를 치는 청강생들의 모습.
 
유화석 기자 fossil@beopbo.com

 [1737호 / 2024년 7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